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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에베소서 4:1-6
    설교일
    2012-01-08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4:1-6 

 

서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된다(고후5:17). 지난주에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새로운 뜻’을 품자고 말씀드렸는데, 우리 성도가 새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백성 새 이스라엘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새 이스라엘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열매로 안다. 마7:16-20에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 맺고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는다 했다.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 맺거나, 좋은 나무가 못된 열매 맺는 일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곧 하나님의 새 백성 된 사람은 새 이스라엘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을 읽었는데, 에베소서의 핵심 되는 2가지 주제를 찾는다면 ① 하나는 1-3장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하셔서 새 백성이 되게 하셨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말씀이다. ② 두 번째는 4-6장으로 구속받은 성도의 모습, 혹은 열매가 어떠하냐는 것이다. 새 백성 된 성도의 본분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성도의 변화된 모습’ 이 둘이 에베소서를 이해하는 핵심 축이다.

 

 

1. 엡2:1-3과 2:12을 보면 우리가 새 이스라엘로 구속받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 한 마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속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의 종노릇하였다. 그저 부패한 본성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영원한 나라의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었다.

그랬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었는데, 새 이스라엘된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엡4-6장을 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말씀하신다.

1) 첫째 4:1이다. 같이 읽자. 그러므로 .........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은 먼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하신다.

2) 둘째 4:17이다. 그러므로 .........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 새 백성은 이제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3) 셋째는 5:1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이방인처럼 살면 안 되고, 그 대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하신다. 6년 전에 울산교회 처음 갔을 때 성도들이 제 아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야 너는 누군지 안 물어봐도 알겠다야 권 목사님하고 똑 같네’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이 누구 닮는가? 아버지 닮죠. 그것처럼 새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 구절을 읽었는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혹시 뭔지 발견하셨나? (방송실 세 구절 동시에 한 번 보여 달라). 세 구절 모두 ‘그러므로’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백성 되었으므로’ 하는 말이다. 엡4-6장 전체가 다 하나님의 새 백성의 모습에 대해 말씀한다고 했죠? 그래서 모든 단락이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이다.

4) 넷째는 5:15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세상 물결에 휩싸여 어영부영 살지말고, 정신을 차리고 세월을 아껴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5) 마지막 다섯 번째는 6:10-11이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뭔가? 이제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다섯까지 새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한 권면을 보면 무얼 알 수 있는가? 새 백성은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그야말로 100% 전부가 다 새롭다는 사실이다. 가치관도, 삶의 방식도, 인간관계도 새로워져야 한다. 어느 하나도 새롭지 않는 것이 없다. 골3:10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하신다. 여기 보면 ‘지식에까지’ 그런다. 모든 것이 다 새로워졌는데, 지식에까지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부분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그야말로 뼈 속까지 새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뼈 속까지 새로워진 새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옆 사람에게 한 번 이야기 해 보자. 우리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2. 이처럼 에베소서 4-6장 전체는 하나님의 새 백성은 어떻게 생긴 백성인지를 보여주는데,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첫 번째 모습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가 우연히 성도 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불러 주신 하나님께 어울리게 살라 그 말이다. 그냥 되는대로 살 것이 아니라,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말 한 마디를 해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어울려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 무엇인가? 2-3절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 보면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크게 다섯 가지 나온다. 개인의 인격적인 태도와 관계해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3가지, 교회 안에서의 행동과 관련해서 사랑 가운데 용납함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됨을 지키는 것 2가지, 모두 5가지다.

 

1)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은 첫째 겸손이다. 겸손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에게까지 누구에게나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겸손’이라고 한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르심에 합당한 여러 덕목들 가운데 첫째가 겸손인데, 교부 어거스틴은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 했다.

우리 사람도 교만한 사람 옆에는 다들 가기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 주변에는 저절로 사람이 모이듯이, 우리 하나님도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가까이 하신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가 고인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다. 겸손은 ‘은혜의 문’이라고.

이렇게 겸손이 중요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아는데, 그런데도 겸손해지는 게 쉽지가 않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타고난 우리는 태생적으로 교만하다. 어떤 분은 그런 얘기를 한다. 자기가 예수님 믿기 전에는 노골적으로 교만했는데, 예수님 믿은 다음에는 ‘겸손한 척하는’ 교만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겸손의 외양과 모습을 모방하는데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는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말도 온유하게 하는데, 마음은 그러지를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겸손해지려면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리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심령을 사로잡을 때 비로소 진짜 겸손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적나라게 보여주셔야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다. 벌거벗은 자기 모습을 봐야 겸손해 질 수 있다. 정말 인생이 하루살이같이 연약한 줄을 깨닫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100%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절실하게 느껴야 비로소 겸손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겸손은 진실이다’고 한다. 진실한 자기 모습을 아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님들이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하는 ‘평화의 기도’로 유면한 성 프란시스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프란시스를 찾아와서 묻는다. “선생님,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성 프랜시스가 유명한 대답을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땅 위 모서리 한 구석에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눈동자가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를 통해서 나의 강함과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성 프란시스 같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하나님이 비로소 당신의 강함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실 줄 믿는다.

 

2) 부름에 합당한 두 번째 모습은 뭔가? 온유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성경에 보면 온유가 정말 많이 나온다. 우리 주님도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그랬다. 그런데 막상 온유함이 뭔가? 하고 물으면 참 답하기가 어렵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많이 고민이 되었다. 온유함을 뭐라고 설명해야 쉬우면서도 틀리지 않는 설명이 되나? 그러다가 한 책에서 온유를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온유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말미암는 놀라운 만족이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작용이다’. 무슨 말인가? 내 심령이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에 평안이 충만하고 만족이 가득하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평안하게 부드럽게 관용하면서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게 온유라는 말이다.

따라서 온유에는 2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내 내면이 하나님 때문에 든든하고 평안하고 부요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부요한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넉넉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온유함은 유약함과는 다르다. 유약한 모습은 다른 사람 앞에서 큰 소리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지만, 마음이 평안하고 부요해서가 아니고 용기가 없어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을 소유한 넉넉함 때문에 당당하면서도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다.

또 온유한 사람은 누군가가 거칠게 대적하거나 비난할 때도 똑같이 거칠게 맞서지 않는다. 겁이 나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거칠고 강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진짜 강하여서 겉으로는 부드러운 사람이 이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 그러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모세다. 민12장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는다. 아마 첫 부인이 먼저 죽고 재혼한 듯하다. 이에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과 아론이 하필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든지 모세를 사정없이 비난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 한 마디로 모세에게 ‘왜 당신 마음대로 하느냐?’ 그런 말이다. 이렇게 아론과 미리암이 모진 말을 하면서 거칠게 대 드는데, 모세는 아무 대꾸가 없다. 맞서지를 않고, 어쩌면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다. 그런데 모세가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그냥 맡긴 것이다. 그래서 민12:3을 보면 모세가 저들과 맞서지 않은 것은 유약하거나 비굴해서가 아니라 온유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렇게 온유한 모세가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모세를 비난한 아론과 미리암을 장막 앞에 불러다가 호되게 책망하셔서 모세의 권위를 더 높이 세워주시는 것을 본다. 이게 온유함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한 없이 평온하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 그리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면, 그 주변 사람들까지 마음이 평안해 진다. 우리 가정에서도 부모가 온유하고 따뜻한 집의 자녀들은 정서가 안정적인데, 부모님이 거칠고 잘 다투는 집의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늘 뭔가 불안하고 쫓기는 것을 보지 않는가? 우리 주님도 그러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주님께로 가면 우리가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세처럼 주님처럼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을 소유한 넉넉한 마음 때문에 항상 마음이 평안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늘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있는 온유한 성도되시기 바란다.

 

3) 부름에 합당한 세 번째 모습은 오래참음이다.

어떤 성도가 너무 마음이 조급하고 잘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자꾸만 이사람 저 사람 부딪히는 것이 힘들어서 이제 좀 성질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심을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주시옵소서’.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긴 한데, 우리가 얼마나 참지 못하고 급한지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자체가 시간을 요구하는 인내심마저도 지금 당장 얻고 싶어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 없이는 신앙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데도 인내가 필요하고, 우리 신앙인격이 성숙해지는데도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섬기는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는데도 인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인 저 하늘나라에 이르는데도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히12:1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그러지 않는가? 인내 없이는 신앙의 마지막 목표인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가 없다. 복음서마다 종말 강화가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24장에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21장에 나온다. 종말에 대한 주님의 교훈은 여러 종말의 징조에 대한 가르침부터 시작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세상에서 당하는 성도의 핍박과 환난이다. 종말은 환난의 때다. 이렇게 종말의 환난을 교훈하신 다음 주님이 주의시켜 말씀하신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인내하는 자만 최후승리에 동참한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에서만 아니라, 우리는 또 자기 속에 솟아오르는 분노의 감정에 대해 잘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창4장의 가인 보라. 아벨과 그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받지 않으실 때 가인이 분해하고 안색이 변했다. 이에 하나님이 가인을 보고 경계하신다. ‘너가 분해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선’한 마음으로 드리는 받을만한 제사는 받으니까, 마음속에 솟아난 분과 죄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말고 분노의 욕망을 잘 다스려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인이 어찌하나? 결국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쳐 죽임으로, 평생 하나님 앞에 쫓겨나고 사람에게도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뭔가? 자기 속의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스려서 성질대로 살지 말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정말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마시고, 또 성도는 성질대로 사는 자가 아님을 기억하시고, 오래 참으시기 바란다.

 

4) 부름에 합당한 네 번째 모습은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를 대하는 삶의 지침인데,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 하신다.

우리 모두는 다들 실수가 많다. 다들 연약하고 부족하다. 또 서로가 다들 어떻게 그리 다른지, 지구상에 수십억의 사람이 있건만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애들을 키워보신 우리 성도님들은 다들 그런 말 해 보셨을 텐데, 저랑 저희 집사람도 종종 ‘저 둘을 좀 반반씩 섞어 놓으면 좋겠다’ 그런다. 같은 핏줄인데 왜 그렇게 다른지 참 신기하다.

이렇게 다들 실수도 많고 부족하고 또 서로 달라서, 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용납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부부도 함께 살려면 서로 용납해야 하는데, 하물며 백인백색의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오죽하겠는가? ‘서로 용납하고’.

그런데 서로 용납하려면 뭐가 있어야 하는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게 다 용납되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게 다 눈에 가시가 된다. 잘하면 잘해서 탓이고 못하면 못해서 탈이다.

송구영신예배 때도 한 번 소개해 드린 케냐의 임은미 선교사님 책에 보면, 선교사님에게는 수진이라는 딸만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친딸보다 5살 많은 페이스라는 케냐의 한 여자아이를 입양한다. 페이스는 아빠 없이 엄마와만 살다가 갑자기 엄마도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케냐 사람에게 맡겨 양육비를 지원해주고 돕는 일만 했는데, 친딸 수진이가 생일 선물로 언니를 만들어 내라고 졸라대서, 페이스를 아예 입양한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수정’이라고 지어준다. 처음에는 둘이서 친형제처럼 너무 잘 지내서 문제가 없다가 시간이 가면서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잦아지니까, 선교사님 마음에 수정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미움이 커져서 나중에는 그야말로 미운 가시가 박혀서 수정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얄밉게 보였다. 그때 선교사님이 하는 말이, 동화 속에 나오는 신데렐라의 계모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 신데렐라 계모 때문에 은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수정이가 사사건건 미워지면서 선교사님은 정말 큰 고뇌에 빠진다. 명색이 자기가 선교사인데, 케냐의 모든 영혼을 주님 마음으로 사랑하겠다고 큰 소리치고 기도했는데, 그리고 선교사로 주변 사람들이 존경해 줄 때면 ‘그래 내가 좀 괜찮은 선교사지 나 정도 되면 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지’ 그랬는데, 수정이로 인해서 자기 인간성의 바닥이 다 드러나 버린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내 보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차마 그럴 수도 없고, 무엇보다 선교사로서 자기 신앙인격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냥 수정이가 귀엽고 너무 예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정이가 학교를 가고 나면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선교사님도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스스로 그랬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그 놀라운 일 앞에 선교사님은 고백한다. 자기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많은 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뭔가?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은 그냥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어 주셔야 한다. 내 힘으로 안 된다. 억지로 내가 용납해야지 그러면 이상하게 내 마음이 더 꼬인다. 그래서 하나님께 정말 구해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요일4:16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러지 않는가? 사랑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구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것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줄 믿는다. 하나님 부어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5) 부름에 합당한 다섯 번째 모습은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다.

3절에 그러죠?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이 ‘하나 되라’고 명령하지 않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고 하신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님의 새 백성인 우리 성도는 성령님께서 하나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하나됨을 깨뜨리지 말고 지켜 가라 그 말이다.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된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 되었는가? 4-6절을 보면 어떻게 하나 되었는지, 7가지나 되는 근거를 말씀하신다. 첫째 몸이 하나다. 주님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한 교회뿐이라는 말이다. 둘째 성령도 한 분이다. 제 안에 있는 성령님과 우리 성도님들 속에 계신 성령님은 같은 분이다. 저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성도님도 같은 진리로 인도하신다. 셋째 소망이 하나다. 같은 저 하늘나라 소망을 가졌다. 넷째 주도 한 분이다. 우리에게는 한 주님 예수님 밖에 없다. 다섯째 믿음도 하나고, 여섯째 세례도 하나다. 무엇보다 일곱째 아버지가 한 분이시다. 만유의 창조주요 대주재가 되신 한 분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 같은 아버지로 섬긴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가 인정하건 안 하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로 묶어 놓았는데, 나뉘지 말라 다투지 말고 분열하지 말라 그 말이다. 옆 사람에게 말해 보자. ‘제 아버지하고 집사님 아버지하고 같은 분이네요’.

여러 자녀를 둔 부모의 기쁨 중의 하나는 자녀들이 서로 우애있고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거다. 자식들이 하나 하나는 다 똑똑한데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마찬가지다. 우리 성도가 서로 아픔을 같이하고 기쁨도 같이하고,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위로하고 도우면서 하나 된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 하늘 아버지는 기뻐 미소 지을 것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결론. 말씀을 정리한다.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나라 새 백성이다. 새 이스라엘이다. 새 백성다워야 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킴으로, 새 백성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