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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Feb 24, 2015
  • 1921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롬1:1 14-7주일오전

서론. 올해 우리 교회는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해’로 삼았다. 그래서 연초에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핵심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13주에 걸쳐 살펴보았다. 또 ‘도의 초보학교’라 해서 5주 동안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대해 강의도 했다. 또 전교인 성경 500독을 목표로 계속해서 통독도 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제 마음에는 우리의 신앙 기초를 더 견고히 다져야 한다는 부담이 가시지 않는다. 사실 신앙의 기초는 올 한 해 다지고 끝낼 일이 아니다. 교회는 늘 새신자가 와야 하기에 늘 기초를 다져야 하고, 우리 기존 성도들도 반복해서 기초를 다지면서 믿음은 자라고 삶은 변해가야 한다.

이제 한 해의 절반을 넘어선 이 시점에서 신앙의 기초를 더 다지기 위해,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성경인 로마서 전반부를 몇 달 동안 살피려 한다.

1. 로마서는 바울이 삼차 선교여행 중 57년경에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이다.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보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무척 가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 그래도 언젠가는 갈 것인데, 그 전에 먼저 편지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때 바울은 이미 나이가 제법 든 노사도였다. 그래서 직접 쓰지 않고, 더디오라는 동역자이자 제자에게 불러 주면서 받아 적게 하였다. 그리고 신실한 여자 일꾼이었던 뵈뵈의 손에 주어서 로마교회에 전하게 하였다.

신약의 많은 서신서 중에 로마서는 제일 먼저 기록된 서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와 사도행전 다음 서신서로서는 맨 앞에 배열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서신이라는 말이다.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로마서의 소중함을 비유하기를 ‘성경 전체를 하나의 반지라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된다’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로마서는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복음을 가장 체계적이고 핵심적으로 정리한 성경이다.

2. 이렇게 귀한 성경인 만큼 교회사를 보면 많은 위대한 목회자나 신앙 인물들이 로마서를 통해 은혜를 받고 변화된 일들을 볼 수 있다.

1) 먼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모니카라는 정말 귀한 신앙의 어머니가 계셨지만, 젊은 날 어머니 속을 썩이면서 방탕하게 살았다. 철이 조금 든 후에는 자기도 삶이 새로워져야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번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결되지 않는 영적 고통과 끊을 수 없는 죄의 유혹으로 고뇌하며 집 마당에 있는 나무 아래서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톨레 레게 톨레 레게’ 하는 아이들의 말이 들려온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하는 뜻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이 어거스틴의 마음에는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다. 그래서는 집안으로 달려가서 성경을 펼쳤는데, 한 달 전 주일 오전에 우리도 살펴본 말씀 롬13:11-14이 펼쳐졌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깨 때가 벌써 되었으니 ....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이 말씀을 읽는데, 그 말씀이 마치 살아서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지금까지 어거스틴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모든 죄짐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2) 로마서 하면 또 루터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였고 신학교 교수였지만, 여전히 죄사함과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채 늘 마음이 하나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억눌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학생들에게 로마서를 가르치려고 연구하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구원의 기쁨과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게 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도 목사가 되었지만 죄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들으면서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그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거장들이 로마서를 통해 깨어지고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로마서를 한 주에 두 번 읽었다고 한다. 루터는 아예 로마서는 성도들이 다 외워버리라고 권면하였다. 이 귀한 로마서를 배울 때 우리 성도들도 구원의 도리를 분명히 깨닫고, 확신과 기쁨을 얻고, 심령이 변화되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한다.

3. 오늘 로마서 첫 시간인데, v.1의 바울의 자기소개를 살펴보자. v.1을 같이 읽자. ‘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②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③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000년 전 로마 시대는 편지를 쓰는 형식이 딱 정해져 있는데,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편지를 쓰는 발신자의 이름이 항상 맨 먼저 나온다. 우리 한글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렇게 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돼 있다.

v.1을 잘 보시면, 바울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둘째 사도로 부름 받았다 한다. 세 번째는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 한다. 이 세 가지 바울의 자기소개 가운데 오늘은 첫 번째 ‘그리스도의 종’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1) 시대가 다르고 문화도 달라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해도 별 특별한 느낌이 없다. 더욱이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부를 때,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좋은 의미로 아주 존귀하게 여기는 뜻으로 부르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소개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1세기 독자들에게는 자기를 종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우리 성경이 ‘종’으로 번역해서 실감이 잘 안 나지만, 이 말은 원래 로마 시대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게 여겨진 신분인 ‘노예’를 뜻하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인구의 절반 정도가 노예였다 한다. 그런데 노예는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혹은 옛날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기 위해 기른 소와 같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수단으로 여긴 거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말들을 하였다.

아주 오래 전이라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영화의 한 대사가 있다. 노예해방을 다룬 미국의 어떤 영화였는데, 거만한 백인 주인이 흑인 노예를 앞에 세워 놓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조롱을 한다. ‘야 아무개 노예야, 흑인 노예인 너도 영혼이 있느냐’ 대충 그런 대사였다. 로마 시대를 넘어 19세기 중엽 노예해방 때까지, 피부색이 다르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았다고 인류는 같은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멸시하는 역사를 자행했다.

노예는 시장에 반나체로 세워져서 흥정을 하면서 사고 팔렸다. 그렇게 얼마에 팔리게 된 노예는 귓불에 구멍을 내어서 주인의 이름이 달린 이름표를 달아준다. 그때부터 짐승이 주인의 재산이듯 노예도 주인의 재산이 되어, 그야말로 사람으로서의 어떤 자유도 존엄성도 없이 오직 주인을 위해 살아야 했다. 노예가 수고했다고 칭찬하는 일 없다. 응당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도 없다. 노예는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다만 주인인 아무개의 노예로 통했다. 그러기에 노예로 사느니 단 하루라도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 도망가가다 잡혀서 비참하게 죽임 당한 노예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아무도 노예 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자기를 노예라고 소개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정말로 입에도 담고 싶지 않는 말이 ‘노예’이다.

2)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노예라 한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도 아니다. 삶을 비관하고 체념하여 될 대로 되라는 뜻으로 하는 말도 아니다. 바울은 도리어 자랑스럽게 자기를 노예라 한다. 자원해서 노예라 한다. 노예가 된 것을 아주 행복해 한다.

짐승보다 못한 이름인 노예 됨을 바울은 왜 자랑스럽고 행복해 하는가? 노예는 노예이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노예이기에, 바울은 이것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으로 여기고 자랑하고 있다.

우리 인생이 사는 모습을 가만 보면, 우리는 자유인인 것 같지만 엄밀히 들여다보면 자유인이 아니라 다들 뭔가의 종으로 산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뭔가의 노예로 사는 거다. 어떤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평생 돈을 섬기며 산다. 어떤 이는 가문의 자랑이나 명예나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산다. 많은 여인네들은 남편의 종이 되어 평생 얽매어 살기도 하고, 요즈음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자식이 우상이 되어 부모가 자식의 종노릇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세상 쾌락이나 음욕의 종이 되어 살기도 하고, 여하튼지 인생은 뭔가 자기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얽매어 살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바울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종이 아니다. 죄의 종도 아니다. 탐욕의 종도 아니고 자아의 종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 예수님만 섬기며 살려 한다.

3) 그런데 여러분! 바울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일이다. 세상의 노예 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되는 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로마 시대 노예의 삶은 한 마디로 비참했다. 보상도 없고 자유도 없고 아무런 삶의 의미나 기쁨도 없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고 누구 한 사람 위로할 자도 없었다. 오직 주인을 두려워하고 주인의 말에 맹종하는 일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노예는 그 생명조차도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노예는 그렇지 않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대신에 우리를 ‘노예’삼겠다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요15:15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신다. 주님이 바울을 노예 삼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은 죄의 종이던 바울을 구원하사 친구로 삼겠다 하셨다. 형제로 여기겠다 하셨다. 그런데 다만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구속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 아들 되신 영광과 존귀를 알고 스스로 나는 예수님의 노예 되겠다 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는 강제가 아니라 자원해서 될 뿐 아니라, 우리가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노예 되어도 주님은 세상의 주인들이 노예를 학대하고 이용하고 자기 잘 살기 위해 노예는 비참하게 만들듯이 그렇게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주인 되신 주님 앞에 우리가 노예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상급을 주신다. 고후1:3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주인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종 된 우리를 가장 자비하게 대하신다. 모든 영육 간에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 마28장에서는 이렇게 약속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 되어 주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종들을 주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 나아가 세상의 노예는 평생 주인을 위해 살아도 마지막에 그 손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의 노예로 살 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의 기업이 예비 돼 있다. 딤후4:8이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뿐만 아니다. 더 정직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아무리 노예가 되어 주님을 섬긴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종이 되어 섬겨주신 그 은혜에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주님이 우리를 죄의 종노릇한데서 구원하시기에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그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좀 더 엄밀하게 우리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노예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주님이 나의 종인 것처럼 나를 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수고하시고 참으시고 도우시면서, 나를 위해 종노릇해주시는 것이 더 많은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영광스러운 길이요, 예수님을 주로 받은 성도라면 누구라도 걸어가야 할 길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4. 그러면 바울은 어떤 마음의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했겠는가?

사실 이 로마서 안에 ‘노예의 선언’이 있다. 그리스도의 노예로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맹세가 로마서 안에 있다. 어디 인가? 14:7-8이다. 같이 읽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러분 ‘아멘’이신가? 네 아멘이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노예,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평생 이 노예의 선언, 노예의 고백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라.

손동희 권사님이 계신다. 손양원 목사님 큰 딸이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내신 간증집이 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가능하면 꼭 한 번 사 보라. 손양원 목사님이 여순 반란 사건 때 공산주의자에게 두 아들을 잃었다. 두 아들의 장례를 치룬 지 한 일주일 쯤 지나서 살인자 강철민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때 마침 손 목사님은 어느 교회 부흥회를 와 달라고 초청을 받고 급히 가셔야 했다. 그래서는 큰딸을 불러 순천으로 심부름을 보낸다. “네 오빠를 죽인 학생이 잡혔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네가 얼른 나 목사님께 가서 그 학생에게 한 대도 매를 때리지 말게 하고 사형장에서 빼내 달라고 부탁을 해라. 그를 내 아들로 삼을 것이니 그 뜻도 잊지 말고 전해야 한다” 한다. 큰딸이 그 말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때려 죽여도 원이 안 풀릴 원수를 아들로 삼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반항을 한다. 그럴 수 없다고, 자기는 절대 못한다고 항변하고 대들었다. 아버지와 딸이 한참을 다투었다. 시간이 가면서 아버지가 지금까지 당신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감옥살이하고 나병환자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죽 이야기하면서 딸을 설득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에게 져서 딸이 아버지 심부름을 간다. 가면서도 딸은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아버지 말씀을 전한다. ‘손 하나 대지 말래요. 죽이지 말래요. 성경에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데요’. 그렇게 울면서 자기 말로 하지 못하고 아버지 말만 인용해서 전했다. 그 덕분에 강철민이 정말 풀려났다. 집회에서 돌아온 손 목사님이 며칠 후 강철민의 집을 찾아간다.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 내가 너를 용서했고 하나님도 너를 용서하실 줄 믿는다. 이제 예수 잘 믿어 주님의 일군이 되어 달라’ 부탁했다. 나중에 강철민이 신학을 했고 목회자가 되었다.

여러분! 만약 손 목사님 안에 예수님이 살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인가? 100%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니고, 단 1%라도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능했겠는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100% 그리스도의 노예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랑스럽게 자기를 소개하는 바울을 볼 때 목사인 저 자신부터 사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사도 바울만 아니라 또 손양원 목사님과 그 외 수많은 믿음의 귀한 선배들이 이 노예의 길을 걸어갔는데, 오늘 저 자신부터 우리는 노예의 길이 아니라 상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도 주님이 먼저 우리의 노예가 되어 자기 목숨까지 우리 위해 내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할 때 이 바울의 이름이 있는 자리에 우리의 이름을 두자. ‘기장교회 (아무개)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백이요 자기 소개서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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