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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y 31, 2014
  • 5010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살전4:16-18,14-4오전(211)

서론.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 평생 별세신앙을 외치셨던 고 이중표 목사님의 임종 직전 마지막 책 제목이다. 4번에 걸쳐 암 치료를 받으시고 마지막에도 암으로 하나님 부르심을 받으셨는데, 4번째 암이 발병했을 때는 하나님이 데려가시겠다는 것을 마음으로 아셨다. 그래서 발병하고부터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몇 개월간 천국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묵상하신 것을 책으로 내셨다.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

저는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종종 들여다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제 마음도 행복해진다. “나도 목사님처럼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겸손히 충성하다가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하면서 주님 나라 가야지” 그런 소망이 제 가슴에도 솟아난다.

오늘 함께 부른 찬송 211장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 중의 하나다. 특히 4절을 좋아한다.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저는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런 모습으로 살다가 이런 모습으로 주님 나라 갔으면 좋겠다.

1. 설교 준비를 위해 읽은 책 가운데, 어떤 분이 죽음의 특징에 대해 10가지로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를 해 둔 것을 보았다.

첫째 죽음은 보편적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는다는 말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다 죽는다.

둘째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떤 묘약도 묘안도 없다.

셋째 죽음은 어느 때라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실 죽음과 우리의 삶 사이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 되지를 않는다. 그야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늘 우리 곁에 있다.

넷째 죽음은 예측 불가능합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닥칠지 몰라 대비할 수도 없다.

다섯째 죽음은 태어날 때 이미 선고되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을 산다는 말이다. 살아온 세월만큼 죽음이 가까운 것이다.

여섯째 죽음은 허무한 것입니다. 산 자의 모든 업적도 희망도 의욕도 꺾어 버린다.

일곱째 죽음은 불안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안의 지하실에는 죽음이 공포스럽게 도사리고 있다.

여덟째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한다.

아홉째 죽음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막을 수가 없다.

열째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원래 인간은 죽기 위해 지음을 받지 않았다. 죽음은 다만 범죄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다.

어떻는가? 공감이 가시죠? 일반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지만 또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손님인데, 그런데 죽으면서 분명히 행복해 한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죽음조차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죽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우리 성도의 소망을 오늘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부활을 믿는데, 특별히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만 아니라 우리 몸도 다시 살 것을 믿는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실제 있으면 좋고,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도박이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 몸을 다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우리는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살 뿐 아니라, 우리 몸도 다시 사는 영원한 부활생명을 확신하기에 죽어도 행복한 사람이다.

2. 그러면 죽음 저 너머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가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아도,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 죽음의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죽음이 뭔가, 죽음 너머에 뭐가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면,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영원한 진리 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죽음 너머에 뭐가 있는 지 지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우리에게 알려 주셔서, 우리 신자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게 하셨다.

1)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일에 대해,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7문에 이렇게 고백한다.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① 나의 영혼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② 또한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키심을 받아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그랬다. ‘이 생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저 생명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 속한 생명 말고 저 하늘에 속한 생명도 있다. 그래서 여기 이 땅에 속한 생명이 끝나는 즉시, 신자의 영혼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려지게 된다.

제가 종종 장례예배를 인도할 때 그런 말씀드렸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어도 죽음의 요단강을 함께 건너 줄 사람은 없다. 대신 건너 줄 사람도 없다. 그러기에 죽는다는 것도 두렵지만, 저 죽음의 길을 혼자 가야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을 더 두렵게 하고 더 허무하고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간혹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보면 혼자 죽는 것을 본능적으로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주님 안에 있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우리 주님은, 이 땅의 생명이 끝나서 우리가 죽음의 길을 갈 때도 함께 하신다.

사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우리 믿음이 약해서 주님이 함께 계시지만 불안해 할 때도 있다. 우리 영안이 어두워서 내 옆에 계신 주님을 못 보고 의심할 때도 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아 답답하여 울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땅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는 믿음 안에서 바라만 보던 많은 것들이 분명히 보인다. 죽음의 요단강을 건널 때는 우리 믿음이 약해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걷지 않는다.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에는 주님이 은혜로 나를 이끄시는 것을 환하게 보면서 걷는 거다. 그래서 이 땅에 속한 생명이 끝나는 즉시 우리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리어지되, 밝은 빛 안에서 올리어지는 것이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하는 가스펠송 아시죠?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죽음의 길을 건너는 그 순간 우리는 정말로 주님께서 매일 매일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셨구나 너무나 밝히 보고서 고백하는 것이다.

2) 이처럼 신자는 이 땅의 삶은 물론이요 죽음의 길도 주님 인도하심 따라 걸어서 우리 영혼이 낙원에 들어간다. 죽는 바로 그 날 낙원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긍휼을 구하는 한 강도에게 주님이 대답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

낙원에서 우리 영혼은 어떤 모습으로 지내게 되는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가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까지, 우리 영혼만 낙원에 머무는 것을 가리켜 ‘중간상태’라 한다.

이 중간상태는 천주교가 말하는 연옥과 다르다. 천주교에서는 세상 살면서 천국 갈 만큼 믿음과 선행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다시 한 번 모자라는 믿음과 선행을 준비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거짓이다.

그러면 중간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부자도 죽어 음부의 고통을 받다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 간청한다.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자기 혀를 좀 서늘하게 해 달라 한다.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눅16:25)”. 여기 보면 우선 죽은 성도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중간상태인 낙원은 특별한 위로가 있는 곳이다. 그 위로의 따뜻함, 그 위로의 풍성함은 머지않아 우리가 경험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특별한 위로의 근원이 무엇인가?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바울은 우리 영혼이 이 육신의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히 고백한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렇다. 부활의 날까지 우리 영혼이 머무는 낙원의 삶에 특별한 위로가 가득한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던 주님, 성령을 보내사 이 세상 살 때 신실하게 동행하시고 인도하셨던 주님, 죽음의 요단강을 건널 때도 친히 내 영혼을 이끌어 주셨던 그 주님과 우리는 낙원에서 함께 할 것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참 중요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을 여행해도 원수와 같이 가면 행복하는가? 좋은 사람과 함께 하면 그게 행복이지 않는가? 사실 성경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증거하는 말씀이 제법 있는데, 낙원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그 곳은 이미 영광을 얻으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주님 계신 낙원으로 인도되기에 바울은 담대하게 또 고백한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빌1:23)”.

제가 기장교회 와서 가장 많이 말씀드린 것 중의 하나다.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는 즉시 우리 영혼이 주님 계신 낙원에 간다. 그래서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임을 믿는다. 이 믿음 위에 견고히 서서,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3) 그런가하면 우리 영혼만 낙원에서 특별한 위로 가운데 거하는 중간상태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부활 때까지 임시적으로 잠시 지내는 기간이다.

계6:9-11을 한 번 찾아보자. 자막에 안 나온다. 찾아서 읽자. “다섯째 인을 때실 때에 ........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v.9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 신자는 세상 살 때 하나님 말씀에 목숨 거는 사람이요,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거룩한 하늘 성소에 이른다는 말이다. 거룩한 하늘 제단 아래서 이 영혼들이 무얼 하는가? 그 피를 갚아 주시기를, 즉 세상에 온전한 공의의 심판을 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랬더니 하늘 성소에 있는 그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아직 잠시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신다. 이 말씀을 보고 우리 성도님들이 신자의 영혼은 죽은 후에 낙원에서도 세상에서처럼 기도하며 지내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계시록은 상징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지금 무얼 보여주느냐 하면, 최후심판의 날이 되기까지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낙원에서 머무는 기간은 임시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 하시는 거다. 그리고 낙원의 영혼들에게는 아직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 대신에 흰 두루마기를 주신다. 흰 두루마기를 주신 것은 머지않아 순교자들의 수만 다 차면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이요 약속인 것이다.

3. 죽음 직후와 중간상태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어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 조금 살펴보겠다.

1)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죽은 신자는 영혼만 낙원에 임시적으로 머물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는다. 이 약속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또한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키심을 받아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한다.

그렇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영혼은 새로운 몸을 입는다. 그래서 ‘결합’이라 한다. 새로운 부활의 몸과 우리 영혼이 다시 결합된다. 우리는 감각이 없는 영혼으로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선하고 좋은 것을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고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 신비롭고 놀라운 역사를 빌3:21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의 권세가 이 땅의 낮은 몸을 저 하늘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게 하실 것이다.

롬8:11도 보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십자가에 죽은 우리 주님의 몸을 다시 살게 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 죽을 몸을 우리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 말씀에서 조금 주의할 것이 있다. 장차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사람은 오늘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랬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님을 모시고 있던 사람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의 은혜를 덧입는 거다.

이 땅에서 성령님을 모시고 살지 않던 사람들은 영광의 부활이 아니라 비참한 심판의 부활을 당한다. 요5:29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두 종류의 부활이 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다.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은 오늘 성령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사는 성도들만 얻는다.

2) 이렇게 우리는 주님 재림하실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을 것인데, 우리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새롭게 입어야하는 까닭은 그런 영광의 몸이어야만 장차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15:50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 혈과 육은 이 땅에 속한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땅에 속한 몸의 특징은 한 마디로 ‘썩는 것’이라 한다. 지금 우리가 입고 사는 이 몸은 썩어지는 몸, 연약한 몸, 죄의 유혹을 받는 몸, 늙고 병들기도 하는 몸이다. 이런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이런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산다면 그게 복이 되겠는가? 이런 몸은 영원히 살 수 없을뿐더러 이런 몸으로 영원히 산다면 그건 복이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몸을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밖에서 일을 하다가 땀을 많이 흘리고 옷이 더럽혀져서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면, 새 옷 입기 전에 먼저 목욕부터 하지 않는가? 그것처럼 죄악의 그림자 머물 수 없는 온전한 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바뀌게 하실 것이다.

이 부활의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영광을 누리고 사는 것을 ‘영생’이라 한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결론. 말씀을 정리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요일3:3 같이 보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고후5:9도 보자.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가? 이 소망 이 믿음 가지고 주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기를 힘쓰라.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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