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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상주소
    http://gijangc.iptime.org/vod/0318_09시19분_HDMI.mp4
    성경구절
    마태복음 11장 1~11절 (신16)
    설교일
    2018-03-18
    설교자
    권재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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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8일 오전 예배 설교는 음향 문제로 인하여 음성 녹음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이에 설교 원고를 올려드립니다.

현재 페이지 또는 첨부파일 다운로드로 받아 보시길 바랍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의심이 찾아올 때 11:1-11, 18-3주일오전

 

서론. 복된 주일이다. 오늘도 성령 안에 예배함으로 세상을 이길 힘과 지혜를 얻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1. 우리가 세상에서 추수할 일꾼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하기를 마친 주님은 다시 제자들과 함께 친히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길을 떠나신다.

마침 그때 손님들이 찾아온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다. 저들은 감옥에 있는 요한의 심부름으로 뭔가 묻기 위해 왔다. 어떤 질문인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이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과 수많은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약속해온 세상의 구주 메시아가 맞는지 분명하게 말해 달라고 질문한다.

어쩌면 요한은 앞으로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머지않아 죽을 수도 있음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과연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확실히 하려 묻는다. 감옥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세례 요한의 관심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에게 있었다.

그런데 요한의 질문은 우리를 좀 당황하게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례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의심할 수 있는가? 사실 누구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참 신분과 영광을 알아보지 못할 때, 하나님의 계시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제일 먼저 예수님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임을 증거했던 이가 요한이다. 자기는 단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이제 곧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실 이도 예수님임을 증거했다. 주님은 참 구원자요 심판장이셔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두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도 증거했다. 예수님의 신분 능력 사역 영광을 누구보다 확신 있게 증거했던 사람이 요한이다. 이런 요한의 증거를 듣고 안드레를 비롯해서 두 사람이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 제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요한이 어떻게 주님에 대해 의심을 품는가? 그래서 어떤 이는 요한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의심해서 요한은 단지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려 했다고 보하기도 한다. 또 어떤 분은 요한이 감옥에서 너무 가혹하게 시달리다 보니 약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v.2은 뭐라고 하는가?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 의심을 품은 것은 지금 예수님이 하고 계신 일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난 1년간 배운 대로 예수님이 무얼 하셨나? 산상보훈을 통해 천국 백성의 삶을 가르치셨고, 10가지 표적에서는 온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셨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 사역들이 요한에게는 뜻밖에 의심을 일으키게 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전날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 증거했던 것과 예수님 하신 일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며,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 했다. 그런데 요한의 이 모든 메시지는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계시 받아 전한 것이니 틀린 것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요한은 자기가 계시 받아 전한대로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성령과 불로 강력한 세례를 주실 줄 알았다. 또 알곡들은 천국 곳간에 들이시고 세상의 악인들과 쭉정이들은 심판받아 망함으로 세상에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날 줄 알았다. 요한의 기대대로는 세상이 뒤집어져야 했다.

그런데 어떻는가? 요한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은 지금 친히 두 발로 여러 마을들을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 만나서 위로하고 고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섬기고 계신다. 주님이 하시는 일 속에는 도대체 세상의 악인들과 악한 권세자들과 쭉정이들을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성령과 불로 베풀어지는 눈에 보일만한 놀라운 세례의 역사들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셔서 영적인 눈이 없는 사람은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행했어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령의 불로 사람의 근본을 뒤집어버리는 역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요한은 의심이 들게 되었다. 자기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로만 전했기에 틀릴 수가 없는데, 왜 예수님은 내가 계시 받아 전한 메시아 사역을 하시지 않는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문제가 무엇인가? 분명히 요한은 잘못된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다. 메시아에 대해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만 올바로 증거했다. 문제는 오늘 v.9에서 주님도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평가하실 만큼 뛰어난 선지자지만, 그러나 요한은 구약 시대에 속한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눈으로 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요한은 자기가 하나님께 받아서 증거하면서도 자기가 증거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다.

이런 예는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많이 발견된다. 다니엘도 장차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될 것인지 정말 놀라운 계시를 받아 기록까지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 계시들이 무슨 뜻인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였었다. 그래서 천사에게 자기가 본 환상의 의미를 좀 알려 달라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12:4, 13)’고만 하신다. 다니엘 시대 사람은 그 계시를 다 이해할 수 없기에 더 이상 자세히 풀어주지 않고 그냥 봉함해서 마지막 때 사람들에게 넘겨주라 했던 것이다.

오늘 요한도 이런 딜레마에 빠졌다. 자기가 계시 받아 전하면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없어 오해했고, 그 오해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자기가 계시 받아 전한 예수님은 이러이러해야 하는데, 정작 주님이 하시는 일은 그렇지를 않은 것 같아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의 이 딜레마는 오늘 우리에게도 많이 나타나는 시험인 것 아시는가? 요한이 메시아이신 주님이 당장 악인들을 불로 심판하기를 기대했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살면서 악한 사람을 만나거나 완고한 자들의 핍박을 받으면, 주님이 당장 불로 심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한 시간에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악인들을 다 심판하시지 않는다.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저 사람 한 번만 손 봐 주면 좋겠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내 아픔과 마음고생을 아시는지 어떤지 그냥 가만 계시기만 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성도는 내 남편이 좀 속히 바뀌어서 믿음생활도 하고 가정에서도 따뜻하고 좀 다정다감한 사람 되면 좋겠는데, 도대체 이 남편이 바뀔 조짐이 안 보인다. 하나님이 너무 느리고 답답해 보인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도대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나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시지를 않아서, 어떤 때는 과연 하나님 계신 것 맞는지, 내가 이렇게 예수 믿고 사는 것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의 싹이 고개를 내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v.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모르면 주님 때문에 실족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주님이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주지시를 않아 내 마음이 낙심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알고 보면 주님이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주님이 성질은 급하고 마음은 한 없이 좁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사람은 이래서 쳐버리고 저 사람은 저래서 잘라 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주님이 움직이시면 세상이 남아 남겠는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때가 되면 쭉정이들을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시는 심판도 분명 하시지만, 그러나 주님은 최대한 인내와 사랑을 모든 인생에게 나타내려 하신다. 은혜의 시대를 충분히 주려 하신다. 그렇게 주님이 인내와 사랑을 베푸시기에 사실 저와 여러분도 구원받고 은혜 받을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우리가 은혜 받은 것처럼 온 세상 사람이 은혜의 자리로 올 수 있도록 주님은 먼저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주려 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깨달으면, 십자가 복음은 사람들이 결코 좋아하는 것 아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과 멸시를 당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는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 십자가의 원리로 원수도 사랑하라 하신다. 그러니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십자가의 원리로 살라시는 십자가 복음은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르기 싫어서 실족하면 참으로 불행한 일인 것이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마저 지지 말라고 말리던 그 십자가를 주님은 지셨다. 그렇지만 주님은 결국 승리하셨다. 진실로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주를 따르는 우리의 길이 승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임을 알고, 주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주님 의지하고 신뢰하며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특별히 하나님이 정한 때에 하나님 방식으로 하시는 일이 가장 선하고 옳은 길임을 알고,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한다.

 

2. 이렇게 세례요한마저 지혜가 온전하지 않아서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아상이 있는데, 주님이 그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의심에 빠진다. 이런 요한에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v.4-5에서 선지자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 다시 알려주신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주님의 이 대답에는 사실 두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먼저 성경을 자세히 주의해서 살피라는 뜻이다. 구약 선지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어떻게 예언했는지, 그 예언대로 주님이 지금 말씀을 어떻게 성취하는지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주의깊게 살피면, 의심 구름은 사라지고 광명한 진리의 빛을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도이다. 또 하나는 그렇게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또 깊이 살피라는 뜻이 있다. 주님이 모든 마을을 두루 다니며 전도하고 다니시는 것은 단순히 육신적으로 병들고 상처받고 죽은 자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일만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실 영적으로 못 듣는 자를 고쳐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고, 심지어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을 위해 죽음의 권세를 허무사 영원한 생명을 심어주고, 나아가 나병환자처럼 부정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정결하게 하여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일, 곧 영육 간에 우리 구원을 온전하게 하는 일,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는 일임을 똑똑히 깨달으라는 의도이다. 이렇게 주님이 하시는 일의 영적인 의미를 제대로 깨달으면, 아무도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임을 의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핍박이 와도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님이 요한에게 하신 대답처럼 우리 성도님들 부디 성경 말씀과 예수님이 하신 일들에 마음을 기울여 깊이 깨달으시기 바란다. 그래서 어떤 의심 구름도 없이 은혜와 진리의 그 풍성함과 생명의 능력을 맛보고 누리고 증거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3. 이어서 v.7-11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요한이 어떤 인물인지 말씀하신다.

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사실 창조주로서 또 심판장으로서 하시는 평가로 보아도 된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공의로 평가하시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도 요한은 그와 같이 평가받을 것이다. 따라서 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 다음에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평가받고 인정받고 칭찬 들어야 하구나 좋은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1) 우선 요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고 한다. 오늘 말씀을 잘 보면 요한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말하기 위해서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질문을 한다. 헤롯의 잘못을 담대하게 지적하다가 지금 옥에 갇혀 있지만, 그 전에는 사실 평생 광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준비하였고 또 광야에서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증거하며 살았다. 요한이 본격적으로 천국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지금까지 다른 서기관이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다른 영적 권위와 순결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광야로 몰려 들었었다. 그렇게 요한을 만나러 광야로 갈 때 사람들이 무슨 기대를 가지고 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을 만나러 갔느냐?’ 그렇게 묻는다.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저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얄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줏대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작은 바람만 불어도 좌우로 휘청거리는 갈대처럼 마음이 너무나 유약한 인물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자기를 좀 알아봐 준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천박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부도덕한 일을 할 때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 죄를 책망하였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군인같이 힘이 있고 잘 사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저들 앞에 조금도 아첨하는 일 없이 과감하게 저들에게 위선과 거짓을 버리라고 외쳤다.

그야말로 요한은 위로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진실하게 전할 뿐이지, 사람 눈치나 보고 인기나 얻으려 하는 갈대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으로 무장했기에 요한은 사실 그 심령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주님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도 감옥살이가 힘들어서 마음에 약해져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요한의 심지가 견고하기에, 요한은 자기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주님의 참 모습에 대해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제자들을 보냈던 것뿐이다.

 

2) 둘째는 요한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하고 묻는다. 요한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심령이 견고할 뿐 아니라, 또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에 마음 빼앗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겉치레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기를 과시하는 천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례요한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살면서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옷은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세련됨이나 화려함에 마음 주지 않고, 오직 그 내면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가꾸면서,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3) 이렇게 부정적으로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도 아니고 헛된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는 사람도 아니면서, 요한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갔는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여러분! 주님이 요한의 인생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귀히 여기시는지 보라. 구약 시대를 살았던 왠만한 선지자들보다 더 귀하고 훌륭하게 요한은 이 땅을 살았다고 칭찬하신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이 어떻게 살았기에 주님이 요한의 인생을 이렇게 귀하게 보시는가? 요한의 인생의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v.10b이다. 같이 보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이 말씀에서 우선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특별하게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을 기록한 말라기는 예언하기를 장차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한 특별한 사자를 먼저 보내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요한이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메시아보다 앞서 요한을 하늘나라의 사자로 먼저 보내셨는가?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바로 메시아의 사역과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마치 옛날에 왕이 어느 지방을 행차하려 하면 먼저 사신을 보내서 왕이 오신다하고 외침으로 백성들이 왕을 맞을 준비도 하게하고, 또 왕이 걸어오실 길을 평탄하게 준비하기도 하는 것과 동일하다.

세례요한은 우리 주님보다 앞서 와서, 주님이 걸어가실 메시아의 길을 정말로 겸손함과 진실함과 충성됨으로 준비하였다. 이 일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해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사명을 잘 보라. 요한이 증거하는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의 요한의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을 믿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한다. 오늘 마태는 그것을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한다.

여러분! 요한만 아니라 사실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사명도 여기에 있다. 요한은 주님보다 앞서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기에 참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 위해 행하신 모든 사역들 위에서 또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보면서 행하는 일이기에 사실 요한보다 훨씬 쉽다. 그 일이 뭔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는 만난다면, 그 자리는 바로 우리 때문에 그 분들이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 아닌가?

새가족이나 혹은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이나 어떤 경우든지, 우리 성도님들을 심방하려고 약속이 잡히면 제가 그런 기도를 드린다. 이 심방하는 걸음이 제가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저를 통해서 주님이 찾아가시고 만나시는 그런 심방되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마찬가지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말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세상을 살면서 감당해야할 가장 귀한 사명이 바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우리가 세상 살면서 처신하는 하나하나 모습들은 사실 모두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다. 주님이 우리 성도의 입에서 나온 말을 가지고 아픈 마음 가진 사람을 위로하시도록 준비하고, 주님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그런 기회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결론. 이렇게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주님의 보냄을 받은 사명자임을 기억하고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그런 삶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요한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참으로 귀하게 여기시고 높이 평가해 주실 것이다. v.11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처럼 헛된 세상의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마음 중심에 주님이 충만히 거하게 하여 늘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아감으로, 우리 성도님들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생애라고 칭찬듣는 생애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