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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구원론) 성령내주와 성령충만 | 평신도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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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과 성령세례
한때 빈야드라는 집회가 유행처럼 번졌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쓰러짐을 강조하는 집회는 계속 존재한다. 또 특별한 안수와 쓰러짐을 강조하는 어느 부흥집회에서 목사는 “안수로 성령을 받으면 쓰러지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쓰러진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점은 과연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반복적으로 받을 수가 있을까?
성령의 내주는 반복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반복적인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 일회만 성령이 충만되면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술도 단 한번만 취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닌 만큼, 성령의 충만함도 계속 받아야만 한다. 즉 단회적인 성령세례와 달리, 성령충만은 지속적이며 반복적임을 의미한다.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고 베드로의 경우를 통하여 성령충만이 반복적인가를 살펴 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행2:4를 보면 제자들과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이 다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모든 제자들과 베드로도 함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것은 당연하다.
후에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다시 한번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행4:8)
그리고 얼마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공회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이 함께 기도하였는데 기도 후에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되어있다.(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즉 성경적으로 보면 성령충만은 분명히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행6:3-5), 그가 돌에 맞으면서 순교할 때에는 더욱 큰 능력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행7:55)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행6:5)
이미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은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다시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 주님을 본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행7:55)
성령충만은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께 능력을 받는 현상을 의미하든지, 혹은 개인적인 삶 속에 나타나는 어떤 현상 혹은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단회적인 성령세례. 즉 성령의 내주와는 다르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성령충만이 성령세례와 동일하여 단회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눅4:1의 사건에서 성령을 처음 받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눅4:1)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내주는 단회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점진적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의 과정에서 어떤 체험이 그에게 큰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즉 어떤 계기나 어떤 체험이 그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의 상태 혹은 그 특징은 반복적이며 지속적이 되는데, 이를 성령의 충만함이라고 우리는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제 2 혹은 제 3의 체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성령충만을 반드시 체험하여야만 하는 특별한 사건으로 부각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굳이 예를 들자면, 성령충만을 유리잔의 물을 붓는 것으로 비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번 채워진 물은 더 이상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헬라어 “플레도”는 to fill, to be filled 를 말한다. 즉 성령충만에 대해서 적합한 비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풍선 안의 공기로 비유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공기가 채워진 풍선은 더 공기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부어주시는 성령이 가득 차서 넘치는 상태, 그것이 곧 성령충만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령세례는 성령충만과 다르다.
바울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니....”(고전12:13)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의 의미가 계속 반복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미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이 성경구절은 오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증거하며, 다음 성경구절은 오순절 사건이 성령세례임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니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도다.“(행11:15-16)
이 성경구절은 오순절 사건이 곧 성령세례임을 의미한다.
성경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줄 때에, 성령이 임하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인데, 그것을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라고 설명한 구절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베드로는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던 사건과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며,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며,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그 말씀을 이 사건(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오순절)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임함과 아울러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였던 사건을 성령세례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임함이 과연 오순절 이전에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결론적으로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여야 한다.
요20:22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던 일이 있었다.
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이라고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요6:44)라고 말씀하셨다.
즉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부터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심은 무슨 의미인가?
오순절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성령사역의 전환점이 되어지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순절의 성령능력은 분명히 개인을 위한 성령체험이 아니었다.
구약에서도 성령의 임함과 거듭남은 있었다. 다만 구약에서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였다.
즉 구약에서는 선택적이었으며 국한적이었고, 강력하지 않았다.
구약에서는 오순절과 같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서의 전환점을 고대하여 왔으며, 더욱 효과적이며, 광범위하며, 언약적인, 즉 모든 육체에게 쏟아 부어주는 새 성령의 시대를 고대하였던 예언들이 기록되어 왔던 것이다. (렘31:31-33, 겔36:26-27, 욜2:28-29)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6-17)
구약에서는 선지자, 왕, 사사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위한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아마 오순절 사건이 구약과 다른 점은, 선택된 소수이고 제한적이 아닌 “만인”에게 쏟아 부어주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체험되는 계기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국한된 선지자가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신을 주어 다 선지자가 되게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현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서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그 두가지 대표적인 견해는 오순절파로 불려지는 견해와 보수적인 교단의 견해가 있다.
오순절교회에서는 믿음이 있는 기독교인을 성령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과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기독교인의 두 그룹으로 나눈다. 그리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거의 동일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믿는 기독교인들도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보수적 입장에서는 물론 기독교인 중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과 믿음이 성숙된 사람의 정도적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진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에게는 이미 성령이 거하고 있다고 보며, 또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특히 성령세례의 증거를 방언과 같은 가시적인 형태로만 제시하는 곳도 있으며, 보수적 교단에서는 성령체험이 언제나 반드시 가시적인 방언의 형태로 오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성경은 성령체험이 반드시 방언의 형태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은사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전12:7-10)
즉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은사는 다양하다(고전12:11).
특별히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을 방언을 하는 그룹(성령세례를 받는 그룹)과 방언을 하지 못한 그룹(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그룹)으로 명확히 분류하는 단체와 교회가 있는데, 그러한 견해는 비성경적이 분명하며, 그러한 곳은 이단시 되어지기도 한다.
본인의 견해로서는 성령이 거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성령충만의 체험과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그룹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성령세례시에 성령충만이 함께 체험될 수는 있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며, 분명히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충만의 체험은 제3의 체험이며,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기독교인은 존재한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동일하게 성령이 거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물론 형식적인 믿음과 거짓 믿음은 구별하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성경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이 거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방언의 은사와 같은 가시적인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성경은 매우 여러 곳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다.
또 당연히 성령세례의 경우나 성령충만의 경우에 방언과 같은 가시적인 은사는 나타날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체험은 신앙의 성숙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불과 같은 뜨거운 이러한 체험을 간구하고 소망하여야만 하지만, 그러나 성령충만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성경구절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그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님은 성령을 주신다. 진리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인치심을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확증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16)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3:5-7)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며 그 차별은 없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