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벧전1:22-25
서로 사랑하는 나그네 벧전1:22-25 16-2주일오전
서론.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같은 주님께 선택받은 하늘나라 가족이다. 위로는 하나님 경외하고 땅에서는 서로 사랑하면서 나그네 길 잘 걸어가자.
올해의 요절 외워보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오늘은 베드로전서 1장 마지막 부분을 살핀다. 오늘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큰 문맥부터 짚어 보겠다.
① v.13 : 그리스도가 오실 때 가져다 주실 선물을 바라라
② v.14-21 : 그리스도가 가져다주실 선물을 바라는 자로 하나님께 대해 거룩한 자가 되라
③ v.22-25 : 그리스도가 가져다주실 선물을 바라는 자로 다른 성도에 대해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가 가져다주실 선물을 기다리면서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제목도 ‘서로 사랑하는 나그네’다.
2. 서로 사랑하라는 오늘 본문 v.22-25말씀을 다시 좀 분석해 보겠다.
① v.22상(이유①) - 영혼이 깨끗해지고 형제를 사랑할 힘을 얻었으므로
② v.22하(권면) -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③ v.23-25(이유②) - 썩지 않는 씨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났으므로
오늘 말씀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시는가? 오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 앞과 뒤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 사랑할 힘이 없는 우리를 보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랑할 힘이 없는데 사랑하라고만 하면, 그렇지 않아도 약하디약한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만드셨다.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신다. 사랑할 힘을 주신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만드신 다음 우리 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목회를 하면서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하고 권면할 때, 우리 성도들로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 ‘목사님!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시지만,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목사님이 제 속을 다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목사님이 우리 남편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심정을 충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간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도 우리 성도님들과 똑 같이 연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저도 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지’ 하면서 정작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서 사랑할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 저도 안다. 사랑해야하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게 또 너무 괴로워 신음할 때가 많다는 것 저도 안다.
그래서 그런 분들 만나면 막무가내로 뭐라 할 마음은 없다. 저 역시 온전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인생이기에 전혀 이해 못하고 나무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말씀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는 어떤 힘도 동기도 주지 않은 채 사랑하고만 다그치는 분 아니시다.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시고 사랑할 힘도 주신 다음에 ‘서로 사랑하라’ 하신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서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할 수가 없어서 괴로울 때, 사랑할 수 없는 내 자신 자꾸 쳐다보면서 절망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 하나님은 먼저 사랑할 힘을 주셨다는데 나는 왜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저에게 주신은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하신 자비하신 하나님이 우리 심령을 바꾸어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조금씩 넓혀 가실 것이다.
3.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v.22a을 같이 보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①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② 거짓이 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먼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그랬다. 우리 신자는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오 내 인생과 만물의 주인이시오 심판자이심을 알고 경외하며 사는 것이 진리를 순종하는 일이다.
1)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그렇다. 여러분! 가짜로 믿지 않고 진짜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 말씀 배워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 영혼이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는데 여전히 영혼이 더럽고 부정한 상태로 머문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내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예수님 십자가 보혈과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감화로 내 영혼이 깨끗하게 된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영혼이 깨끗해진 사람들이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한다. 우리 영혼이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하여지면, 깨끗해진 영혼으로부터는 사랑이 나오는 법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혼은 깨끗한데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영혼이 깨끗해져서 사랑할 수 있다고 해야 맞다.
2) 그래서 진리에 순종할 때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둘째로 ‘거짓이 없이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셔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는 거다. 형제를 사랑하되 ‘거짓이 없이’ 그랬다.
주님께서 우리 신자로 하여금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역으로 세상에는 거짓된 사랑도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 심심찮게 그런 뉴스를 접한다. 사귀던 여자가 헤어지자는 말에 격분해서 살인을 한다거나 혹은 결혼에 반대하는 여자 친구 부모를 찾아가서 악행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뉴스다. 어떻는가? 이것도 사랑인가? 그것은 거짓된 사랑은 될지 몰라도 참된 사랑은 결코 아니다.
사실 타락한 우리 인생에게서는 ‘참된 사랑’을 기대치 못한다. 우리가 타고난 본성대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참된 것이 못 된다. 참된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사랑만이 참 사랑이다. 어떤 자격도 따지지 않고 무한한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참된 사랑이다.
인생은 죄로 타락해서 우리 힘으로는 참 사랑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참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버젓이 배우자 있는 사람을 만나면서 ‘사랑’이라고 한다. 성경은 그렇게 불의한 것을 결코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전13장에서 참 사랑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신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고전13:4-7)’.
요즈음 갈수록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내 소유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 여긴다.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고 내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상대방의 마음 행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여기면서 사랑이라 한다.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요 탐욕일 뿐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도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악을 행하거나 불의를 기뻐하지도 않는다. 나를 희생하여 상대를 복되게 하는 것이 참 사랑이다.
우리 구주께서 자기를 희생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사랑이 참 사랑이요, 그런 사랑으로 이제 우리 신자도 거짓이 없는 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4. 이처럼 주님은 먼저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짓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부어주신 다음 우리에게 권면한다. ‘① 마음으로 ② 뜨겁게 ③ 서로 사랑하라’.
1) 먼저 ‘마음으로 ... 사랑하라’ 하신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 못하실 분은 없으실 거다.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인가? 사랑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입술로만 사랑하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하라는 말이다. 다시 22절의 표현을 빌리면 거짓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하라신다.
오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려 한다.
마음으로 하는 사랑에는 첫째 반드시 행함이 따라 같다. 요일3:18 보자. ‘자녀들아 우리가 말로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사랑에는 반드시 행함 나눔 지지해 줌 위로함 격려함 도와줌과 같은 실천이 따르기 마련이다. 형제를 섬기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나는 마음으로 사랑해’ 그러면 아무도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고 굳게 움켜쥐었던 손을 펼쳐 내게 속한 일부를 나누게 한다.
마음으로 사랑함에는 둘째 관용, 곧 용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우리가 마음이 참 넓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신다. 가장 가까이는 가족들에게 또 교회 안에서 함께 주를 섬기는 믿음의 지체들에게 더 나아가서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 분은 예수 믿어서 그런지 마음이 참 넓다’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고 조금만 자기 기준에 안 맞거나 실수를 해도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렇게 하는가? 그러지 않는다. 벧전4:8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실수하는 허물을 덮어주지, 따지고 소문내고 그러지 않는 법이다. 마음으로 진실 되게 사랑함에는 관용이 필요하다. 저는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 성도님들! 넓은 마음 품으시라.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3)’.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용량이 곧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넓히는 용량과 비례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도 마음이 넓어지는 거다.
이렇게 마음으로의 사랑에는 관용이 필요한데,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잘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서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생활을 할 때 우리 성도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서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관점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것인데,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은 자꾸 틀렸다고 하니까 소리가 커지고 끝까지 자기 고집을 세우게 된다. 진리 문제는 다르면 안 된다.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면 나와 다른 것에 대해 마음을 넓혀야 한다. 작년 가을에 십계명 강해 제구계명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 반드시 ‘제 생각에는’하고 자기 견해를 말하라고 했었다. 두 분의 성도님이 그 설교를 듣고 자기는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그 후로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는데 너무 감사하다.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제 생각에는’ 하고 말을 하시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해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란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 관용하는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둘째는 나와 다르거나 혹은 아직도 여러 모로 부족함과 실수가 많은 성도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는 공통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 때로 나하고는 말도 잘 안 통하는 것 같고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다른 성도라도, 그 성도 역시 내가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을 사랑한다. 내가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듯 그도 교회를 사랑한다. 주님 사랑함에 하나요 교회를 아끼는 마음이 하나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충분히 용납할 수 있지 않는가? 흔히 ‘우리가 남이가’ 그러는데, 우리 성도는 서로 아군이지 적군 아니다. 서로 용납하자.
2) 이어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다.
여기 ‘뜨겁게’ 그랬는데 우리 한국어 성경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의미 그래서 열정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사랑의 강도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시간에 초점을 맞추어 ‘끝까지’ 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은 열정적으로 사랑하되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라는 뜻이다. 요13장에서 주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후 세상을 떠나실 시간이 다가온 줄 아시고, 세상에 좀 더 남아 있어야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래서 대야의 물과 수건을 준비해서 깊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주님의 그런 모습이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이다. 지체를 향해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되 ‘서로’ 사랑하라신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서로 사랑’이 가능하다. 상대방이 하는 것 봐서 하겠다고 하면 평생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의 맛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성도가 교회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부부로 살면서 애틋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인가? 마찬가지다. 성도가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 다른 지체들과 뜨거운 사랑 섬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한다면 비극 중의 비극이다. 신앙생활의 맛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는 데 있는 것인데,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 해야 한다.
저는 참 가난한 집에서 자라서 저희 집은 대학을 시켜줄 형편이 못 되었다. 제 형편을 알고 대학 시절 다니던 교회의 여 집사님 7분이 월 5만원을 모아서 4년 동안 저에게 책값과 용돈으로 주셨다. 22-23년 전이니까 그때 5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저는 교회서 그런 사랑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을 갔는데, 감사하게도 섬기던 교회서 학비를 모두 주셨다. 그런데 한 번은 성적이 잘 나와서 학교에서 다시 전액 장학금이 나왔다. 담임목사님께 가져갔더니, 성적장학금과 상관없이 우리 교회는 학비 드린다고 장학금은 저보고 쓰라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런데 학우들 중에는 저처럼 참 가난한 신학생이 많았다. 그때 제 마음에 대학 시절 은혜 받은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저도 장학금으로 받은 돈을 다른 학우에게 등록금으로 주었다. 후에 강도사로 고신대학원에서 편목할 때도 또 가나한 학생을 만나서 등록금을 도와 준 일이 있다. 그리고 저는 잊고 살았다.
시간이 좀 지나서 제가 부민교회서 사역하다가 연말까지 사역지를 옮겨야 하는데 도대체 길이 열리지를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고신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학비를 도와주었던 후배가 울산교회에 부목사로 있던 자기 자형에게, 자기에게 등록금 도와준 형이니까 꼭 제가 울산교회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게 끈이 되어서 울산교회에 갈 수 있었고, 울산교회에 갔기 때문에 오늘 사실 기장교회에도 올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오늘 제가 기장교회서 이렇게 하나님 은혜로 목회할 수 있게 된 데는, 대학 시절 4년간이나 저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던 작은 교회의 성도들 때문에 가능했고, 저도 받은 그 사랑을 못 잊어 받은 사랑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을 실천한 일이 열매가 되어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우리 모습을 기뻐하시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이루어 가신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다.’
5. 설교를 준비하다 ‘큰일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23-25절 말씀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미 너무 길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v.23-25는 간단히 말씀드리겠다.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되지 않고 썩지 않을 씨로 되었는데, 그 썩지 않는 씨는 바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신다.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저와 여러분이 거듭나서 영생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 말씀 때문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거듭나게 한 하나님 말씀은 ‘썩지 않는 씨’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났다. 그런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한 다음에는 썩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거듭난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살아서 역사를 한다. 썩지 않는 씨인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신자 속에 살아 역사를 하기 때문에, 썩지 않는 씨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사모하고 사는 성도는 그 말씀의 능력을 힘입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신자 속에는 썩지 않는 씨인 하나님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우리 본성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거짓이 없는 사랑 행함이 있는 사랑 끝까지 변하지 않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말자. 저와 여러분은 썩지 않는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 썩지 않는 하나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 신자 속에 살아서 우리 영혼에 빛이 되고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내고 우리 믿음이 자라게 한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처럼 우리도 사랑하며 사는 사람 되게 만든다. 썩지 않는 하나님 말씀 붙잡고 거짓이 없는 사랑을 주님 오실 때까지 실천하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