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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Feb 12, 2016
  • 711

구원의 큰 기쁨을 아는 나그네 벧전1:6-12

 

 

서론.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위해 선택받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함을 감사하다. 혹 처음 교회를 찾아오신 분 계시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올해의 요절 같이 외워보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주일오전에 베드로전서 말씀을 살피고 있다. ‘선택받은 하늘 나그네’ ‘찬송하는 나그네’에 이어 오늘은 세 번째로 ‘구원의 큰 기쁨을 아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려 한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 정리해 보겠다.

①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근심할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한다(6-7절).

② 성도는 지금 예수님을 보지 못해도 사랑하고 기뻐한다(8-9절).

③ (그 이유는) 성도가 받은 구원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10-12절).

그렇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우리 성도는 실로 엄청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그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비록 이 땅을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시련이 있어도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넉넉히 이긴다. 내가 받은 구원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나에게 이 구원의 축복을 주시려고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대신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 많이 사랑한다. 주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런데 엄청난 구원을 받고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른다면 우리는 그 구원으로 인한 기쁨과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지 않는가? 서구 열강이 아메리카로 아프리카로 세력을 뻗어나갈 때,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냥 유리구슬이 아니고 다이아몬드였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맛있는 과자를 듬뿍 주면서 계속해서 다이아몬드를 구해오게 했다는 이야기다. 실화인지 어떤지는 잘 몰라도 교훈은 분명하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 가치를 모르면 누리지를 못한다.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2. 우리가 받을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가르치는 v.10-12을 묵상하면서 저는 ‘Gold rush 골드 러쉬’를 생각했다. ‘골드 러쉬’가 뭔지 아시죠? 19세기 중엽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엄청난 금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소문이 나자 미국에서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금을 찾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없었던 동네가 생기고 학교도 생기고 문화까지 생겨났다.

사람들이 금을 찾아 몰려들듯이 오늘 말씀 10-12절에는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보물인지를 알고 그것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또 그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세 부류가 소개된다.

1) 첫째는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다. 같이 보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 문장이 좀 복잡한데, 우선 동사들을 보라. 사람들이 모두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빠져 살면서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구약의 선지자들은 ‘구원’의 가치가 어떠한지를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영원한 보배는 ‘구원’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저들은 먼저 자신들이 이 구원의 축복을 받기 원했고 나아가 구원의 축복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고 미리 증언하고 상고했다’ 하신다. ‘골드러쉬’가 생각나지 않는가? 금을 찾는 사람들이 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피곤함도 견디고 외로움과도 싸우고 수많은 위험도 용감히 맞서듯이, 구원이라는 최고의 보물을 얻기 위해 선지자들은 연구하고 살피되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고 상고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쉽게 생각하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데, 구원에 대해 그렇게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피고 상고할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렇다. 여러분! 단순하게는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 맞다. 그런데 구원이 또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몇 가지만 물어 보겠다. 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 하는가?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 구원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구원을 받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어찌되는가? 구원받으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이렇게 사실 ‘구원’은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평생 연구하고 살펴도 그 영광과 비밀을 다 알지 못하는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는데,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핀 결과 깨달은 구원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이었다. 하나님이 죄로 죽은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 대신 고난 받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죽으신 그리스도를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의와 생명으로 옮기셨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으로 이루시는 이 구원을 알고 얻고 누리고 전하기 위해 저들 평생을 이 구원을 상고하는 데 바쳤던 것이다.

2) 구원을 알고 얻고 전하기 위해 자기를 내어 던진 또 한 부류는 신약 시대의 복음 증거자들이다. 12절 중반이다. ‘...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 그렇다. 구원의 비밀 구원의 영광 구원의 축복 구원받은 자의 사명과 고난에 대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알리셨고, 오늘날도 복음전하는 자들을 불러내셔서 알리시되 성령을 힘입어 하게 하신다.

여러분! ‘구원’의 비밀은 알려야 한다. 이 비밀을 온 세상에 알려서 온 세상이 구원받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는 선지자들을 세우셨고 신약 시대는 복음 증거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이 구원의 비밀을 널리 알려서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도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구원의 영광을 알리는 반열에 서야 한다.

3) 신약 성도인 우리는 구원을 받고서도 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데,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12절 끝에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하신다. ‘구원’에 대한 입장이 우리 성도와 천사는 서로 많이 다르다. 우리 성도는 정작 구원의 축복을 받는 당사자인면서도 구원의 가치는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 반면에 천사는 직접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천사는 구원을 받는 우리를 위해 섬기는 위치일 뿐이다. 이렇게 천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닌데도 구원의 가치는 우리보다 훨씬 잘 안다. 그래서 천사는 이 구원의 영광을 자신이 누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살펴보기를 원한다.

간혹 우리 옆에 누군가가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면,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지 않는가? 그와 같이 천사는 우리 신자가 받을 구원의 영광과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받을 구원의 복이 너무 좋아서 살펴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4) 이렇게 ‘구원’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폈고 신약의 복음증거자들이 목숨 걸고 전했고 너무 부러워하면서 천사들이 고개를 내밀어 살펴라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가치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극적으로 죄와 죽음 결핍과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게 하는 구원, 적극적으로 의와 생명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될 구원의 가치를 알면, 우리는 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할 것이다.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니 여전히 세상에서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며 살지 구원의 가치만 제대로 알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마13:44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렇다. 구원의 가치를 발견하면 무슨 수를 써도 무슨 희생을 치러도 구원을 받기 까지는 가만있지 않는다. 반드시 구원을 얻고야 말리라 하고 달려들게 된다. 골드러시가 아니라 ‘구원러시’하게 되는 거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신 여러분! 이 구원을 얻으셨는가? 그러면 감사하시고, 아직 나는 구원을 얻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분 계시면 이제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구약 선지자들처럼 정말로 부지런히 구원에 대해 연구하고 살피고 상고하라. 그래서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구원의 영광과 가치를 알고 소유하게 되기를 바란다.

 

3. 이제 v.6-7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설교 초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v.6-7의 핵심은 우리 성도는 실로 엄청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기뻐한다는 말씀이다.

마치 이런 것이다. 내 오른 손에는 1억 원이 있고 왼손에는 10,000원이 있다. 그런데 어쩌다 실수로 왼손의 만원을 잃어 버렸다. 너무 아깝고 억울해서 통곡을 하겠는가? 아니면 조금 아깝긴 해도 오른 손의 1억 원을 보면서 무덤덤하게 지나가겠는가?

바로 그런 거다. 구원의 가치를 아는 성도는 이 땅에서 비록 이런 저런 어려움이나 시련이 와도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낙망하고 주저앉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하신다. 믿음으로 사는 길에 시련이 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한다. 좌절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하는가? 7절에 이유가 나온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여러 가지 시련이 우리 믿음을 불로 연단된 금보다도 더 귀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이 올 때 도리어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축복은 실로 엄청나다. 그래서 사실 아직도 우리는 이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앞으로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많이 배우면 조금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다 알지 못한다. 저 천국 가서 비로소 그 가치에 눈을 좀 제대로 뜨고서는 세상 살 때 왜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서 누리지를 못하고 살았나 많이들 후회할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구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데, 하나님은 그런 엄청난 구원의 축복을 받은 우리 성도의 모습이 그 구원에 어울리는 사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모습이 어울려서 구원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우리 모습이 그 구원의 영광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빚어져 가기를 원하신다.

쉽게 생각해 보자. 너무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돼지 목에 걸어주는 것이 어울리는가? 아니면 맑은 눈과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소녀에게 걸어주는 것이 어울리는가? 돼지 목에 보석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 신자의 모습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같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비록 구원의 축복은 은혜로 선물로 받았지만, 이제는 그 구원의 축복에 어울리는 믿음이 사람으로 연단되고 성숙하고 다듬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하시는 거다. 불로서 10번 20번 연단되고 또 연단되어서 불순물이 다 제거된 순금처럼 우리 성도의 모습이 성도의 내면과 영혼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과 욕심의 불순물이 다 제거되어 정금 같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시험)’을 반드시 주신다. 용광로가 아니면 금을 단련할 수 없듯이 시련이 아니면 우리 내면과 영혼의 불순물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에게 있어서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은 필수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데 여러 가지 시험이 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기나?’ ‘내가 하나님 안 믿고도 잘 살았는데 괜히 예수 믿겠다고 나섰나? 지금이라도 옛날로 돌아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제대로 믿음의 길에 들어섰기에 시련이 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시련을 통해서 정말로 정금같이 순수한 믿음을 갖추게 하려 하신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사람은 누구나 정말 갖고 싶은 것이 있다. 아직 결혼 안 한 청년들은 가정을 가져 보고 싶을 거다. 미술가는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을 거다. 운동선수는 신기록을 한 번 세워보고 싶을 거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도 너무나 소유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을 아시는가? 아니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요 역사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인데 뭐가 부족해서 갖고 싶은 게 있는가? 우리 하나님은 사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분 맞다. 그것을 ‘자충족성’이라 한다. 이렇게 스스로 모든 것이 충족하신 하나님이 놀랍게도 너무나 갖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정금같이 연단된 성도들의 믿음’이다. 엄청난 구원의 선물을 받아 누릴 우리 성도들의 모습에서 정금같이 순전하게 빚어진 그 믿음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순금같은 믿음의 사람을 얻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시련이 찾아오면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시련을 통해 나를 더 귀하게 더 존귀하게 만들려 하시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여러 가지 시련으로 정금보다 귀하게 단련하신 후에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절)’.

 

4. 이렇게 구원의 엄청난 가치를 조금이라도 알면 믿음으로 사는 동안 시련이 와도 기뻐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두 번째로는 구원의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구원의 축복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무엇보다 구원의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v.8-9 같이 보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여기에도 역설이 있다. v.6-7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 오는데도 기뻐한다고 하였는데, 8-9절도 역설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사랑한다고, 지금도 보지 못하는데 우리 눈에 보이지를 않는데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하신다.

그렇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눈으로 필요할 때마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믿음으로 살다가 억울한 일 만날 때 주님이 친히 내 귀에 ‘나를 위해 너가 핍박 받는 것 내가 다 보았다. 고생이 많다. 고맙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힘을 내라.’ 그렇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면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그런데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승천하신 주님은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는 육신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신다. 육신의 음성으로 들려주시지도 않으시고 육신의 모습으로 와서 우리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지도 않으신다. 그러면서 우리를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믿음을 위해 핍박 받는 자리에서 살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향해 인간적으로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겠는가? 서운한 마음 야속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음성을 들려주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한 번도 들려주시지를 않으니 야속한 것 같다. 엠마오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주님은 당신의 모습 보여주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신데 오늘이라도 얼마든지 나타나실 수 있는데, 그런데도 나타나주시지를 않으신다. 얼마나 섭섭한 일인가?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지도 않아 우리는 주님께 서운한 마음 야속한 마음 가져야 할 것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께 그렇게 서운하고 야속하게 생각지를 않는다. 도리어 오늘 말씀은 분명히 증거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어떻게 한 번도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또 기뻐하는가? 주님이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차 주님 먼저 가 계신 거 하늘나라에 우리도 들어가서 영광의 주님을 영광 가운데 우리가 친히 만날 확실한 소망과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의 얼굴을 지금 보지 못하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우리 영혼을 인도하시고 우리와 은혜 가운데 함께 하심을 너무나 밝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 줄을 아는 성도는 오늘 비록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누구보다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결론. 오늘 설교 제목이 ‘구원의 큰 기쁨을 아는 나그네’이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내가 예수 믿어 받은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달아서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여러 가지 믿음의 시련까지 넉넉히 이겨내고 시험이 오면 도리어 정금같이 빚어주실 하나님의 손을 기대하고 감사하고, 나아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면서 남은 생애 살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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