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벧전1:3-5
찬송하는 나그네 벧전1:3-5 16-1주일오전
서론. 하나님 나라 유업을 함께 받을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살아계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배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도 먼저 올해의 요절 말씀 마5:13-16을 외워보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지난 주는 ‘선택받은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다. 오늘은 ‘찬송하는 나그네’다. 그렇다. 선택받은 하늘 나그네는 찬송하면서 나그네 길을 걷는다. 서러워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으로 부르는 찬송이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넘치는 감사가 찬송하게 한다. 3절 앞부분을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 성경은 찬송이 뒤에 나오지만 원문은 ‘찬송’이 제일 먼저 나온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하는 감격의 외침이다.
선택받은 하늘 나그네에게는 진실로 찬송이 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숲속 옹달샘에서는 언제나 맑은 물이 솟아나듯 성도의 영혼에서는 자연스럽게 찬송이 흘러나온다. 선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합당하고 아름다운 형식이 찬송인 것이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의 마땅히 할 바로다(시33:1)’. 하나님 은혜로 구속받아 의인의 반열에 서게 되고 그래서 그 양심이 정직해진 성도에게 찬송은 지극히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고전14:26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할 때 제일 먼저 갖추어야할 요소가 바로 찬송이라 한다. ‘형제들아 ...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게시도 있으며 ....’. 말하자면 우리 신자에게는 일상의 삶에서도 찬송이 없을 수 없고 예배에 있어서도 찬송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보면 ‘내가 주를 찬송합니다.’하는 고백이 있는가 하면 ‘내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도 있고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하는 결단도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29:13)’.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146:1-2)’. 찬송한다는 고백만 아니라 찬송하라는 명령이나 찬송하겠다는 결단도 있는 것은 우리의 찬송이 다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서 자연스럽게 찬송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고난 중에 의지적으로 드리는 찬송도 있는 것이다. 기뻐서 저절로 부르는 찬송도 있지만 어려움 가운데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부르는 찬송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도 찬송하는 백성 되기를 원하신다.
장미는 참 아름다운 꽃이다. 흔히 장미 중에도 흑장미는 아름다움의 극치라 한다. 그런데 장미가 아름답다고 세상의 모든 꽃이 다 장미꽃라면, 또 모든 장미꽃이 다 흑장미라면 어찌되겠는가? 참으로 지루할 것이다.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과 색깔도 다양하기에 꽃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참으로 다양하게 지으셨다. 또 우리가 한 평생 살다보면 여러 다양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다양한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라. 어떤 날은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인해 감사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어떤 날은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신 사죄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 또 어떤 날은 환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눈물로 찬송하라.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게 하시는 것은 이런 찬송으로도 저런 찬송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증거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평탄할 때도 찬송하지만 역경 중에도 찬송하는 사람들, 그가 바로 ‘하나님 백성’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다 우리의 찬송의 재료들이다. 찬송하는 나그네임을 알고 하나님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2. 이처럼 신자는 ‘찬송하는 나그네’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찬송의 제목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찬송의 제목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 또 함께 불러야할 찬송의 제목도 있다. 오늘 말씀은 신자라면 누구나 한 마음으로 부를 세 가지 찬송의 제목을 가르쳐 준다.
첫째가 3절에 나온다. 같이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모든 성도의 공통된 첫 번째 찬송 제목은 구원의 은혜이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신 은혜 ‘거듭남의 은혜’이다.
흔히 그런 말 하지 않는가?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 정말 옳은 말이다. 죄가 왕노릇하는 이 세상에 육신으로 한 번만 태어난 사람은 이 땅의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과 그 후의 영원한 심판에 처해지는 죽음까지 두 번 죽게 된다. 그러나 육신으로 한 번 태어난 후에 다시 성령으로 두 번째 태어난 사람은 육신의 죽음 이후 다시 정죄 받는 영원한 심판이 없다. 두 번 태어나면 육신의 죽음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이렇게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①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②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하게 하셨다. 우리가 거듭나게 된 일에 있어 우리가 한 일이 없다. 우리의 자격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한다. 우리에게 뭔가 공로가 있거나 혹은 앞으로 특별하고 크게 될 만한 가능성이 보여서 거듭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흔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뭔가 될 것 같은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휼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뭔가 우리에게 앞으로 크게 될 가능성을 보시고 거듭나게 하셨다면,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중요한 자리 높은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을 거다. 대학에 가면 교수 자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 차지하고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회의원이나 힘 있는 자리도 다 우리 신자가 차지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그렇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하나님은 과거의 우리의 어떤 공로나 자격을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래의 어떤 가능성 같은 것도 보시지 않았다. 오직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처럼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하셨기에 방법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너가 이렇게하면 내가 너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겠다.’하고 조건을 달지 않았다.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오직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은혜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영원한 찬송이다. 하나님이 만약 과거든 미래든 어떤 조건을 달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면 우리 중 아무도 중생의 은혜 받을 자가 없다. 그저 하나님이 긍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거듭나게 하신 것이 우리의 영원한 찬송이다.
3. 모든 성도에게 공통되는 두 번째 찬송 제목은 v.3b-4에 나온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성도가 영원히 부를 또 하나의 찬송 제목은 ‘하늘의 유업’이다. ‘산 소망의 유업’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유업을 주시려고 하신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이란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최희준 씨가 불렀던 “하숙생”이다. 우리 청년들은 모를 수도 있겠는데 40대 중년 이상은 아마 잘 아시는 노래일 거다. 우리 성도들도 충분히 공감이 되는 노래인데, 그러나 이 노래에는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다. 인생이 나그네인 것까지는 맞는데 그 다음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너무 이 땅에 정 붙이지 말고 미련도 두지 말자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지가 없다. 말하자면 세상이 말하는 나그네는 ‘소망 없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라는 말을 똑 같이 쓰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렇다. 우리는 소망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다. ‘산 소망’ 그랬는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헛되지 않는 소망 거짓이 아닌 소망이다. 오늘 소망을 가졌는데 내일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얼마나 좌절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소망은 거짓이 아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나님 안에서 소망하는 바를 내일 우리는 눈으로 볼 것이다. 귀로 들을 것이다. 온 몸과 영혼으로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거짓이 아닌 산 소망이다. 둘째로 ‘산 소망’ 곧 소망이 살아있다는 말은 그 소망이 우리 속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망이기에 그 소망은 우리의 삶을 이끌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이 된다. 내 삶에 아무 힘도 기쁨도 변화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소망이 아니라,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소망이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소망은 ‘산 소망’ ‘살아있는 소망’이었기에 노아는 이 소망으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주를 예비했다. 아브라함은 이 산 소망을 붙잡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남은 평생을 거류자로 장막에 거하였다. 스데반이나 사도들은 기꺼이 육신의 생명을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산 소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렇다. 우리 성도의 삶과 영혼 속에 살아있는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도 않는 유업이다. 하늘에 간직된 유업이다. 제가 여러 번 우리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지만 이 영원한 하늘의 유업은 사실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썩지 않는다 더럽지도 않다 쇠하지도 않는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그렇게만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누렸을지라도,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그 유업을 받으면 ‘세상에서 내가 누렸던 가장 좋은 것조차 보잘 것 없는 것일 뿐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소망을 제대로 몰라서 지금은 하루라도 이 땅에 더 오래 살려 하는데, 일단 눈을 감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 무엇 때문에 저 죄 많은 세상 더 살아보려고 아등바등거렸나 후회할 것이다. 영원하면서도 하늘에 속한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유업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산 소망’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산 소망’을 붙드시기 바란다. 우리가 ‘산 소망’을 붙들고 산다면 우리는 정말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달라지게 된다. 믿음의 가족 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에는 다양한 맛이 있다. 건강할 때 누리는 은혜의 맛이 있고 아플 때 누리는 은혜의 맛이 있다. 성도들과 함께 모였을 때 누리는 은혜의 맛이 있고 혼자 고요하게 하나님을 바라볼 때의 은혜의 맛도 있다. 젊을 때 깨닫는 은혜의 맛이 있는가 하면, 이제 인생을 살 만큼 살았을 때 깨닫게 되는 은혜의 맛도 있다.
그랬을 때 죽음 앞에서 우리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는 특별하다. 인생을 정리하고 그야말로 하늘나라 문 앞에서 서는 순간은 세상 어느 때에도 받지 못할 특별한 은혜를 받는 시간이다. 죽음 앞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산 소망’을 붙들고 사는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순간은 소망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요 정말로 전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충만히 맛보는 귀한 시간이다.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우리 믿음이 온전하지를 못해서 하나님께 맡긴다 하면서도 100% 맡기지를 못하여 우리 믿음에 여전히 염려와 의심과 같은 불순물이 많았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오로지 자기 영혼을 100% 하나님께 맡기고 또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과 염려를 다 내려놓아 버리고 100%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의 순간이다.
그러기에 ‘산 소망’을 붙들고 죽음 앞에 설 때 소망의 절대적인 능력을 의지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산 소망’은 정말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함을 얻게 하는 소망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시들어 버린 소망 맥 빠진 소망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산 소망’을 붙듦으로 죽음 앞에 설 때 우리 영혼이 가장 순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마음이 가장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케 되기를 바란다. 정말로 죽음 앞에서 우리 영안이 활짝 열려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온전히 나타나 보여서 죽음을 기뻐하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4. 모든 성도에게 공통되는 세 번째 찬송 제목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5절 보자.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말세에 나타날 구원이 무엇인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온전한 구원이다. 따라서 5절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주님이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보호해 주신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러면 이 땅을 사는 동안만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에도 그리고 이 땅을 떠난 뒤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저 낙원에서도 계속된다.
먼저 이 땅에 머물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요10:28-29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저는 우리 성도들이 오늘까지 어떻게 믿음생활을 해 오셨는지 간증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여러 성도들 간증을 들어보면 사연이 없는 분이 없다. 다 사연이 있다. 우여곡절들이 많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고백하듯이, 우리 성도들 한 분 한 분도 다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낸 분도 계시고 가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섬기던 교회가 큰 시험을 당하여 극심한 영적 아픔을 겪은 분도 계시다. 사연 하나 하나 들어 보면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래서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지고 저래서 실족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모든 사연들 험악한 세월들 넘어 오히려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험악한 그 세월 뒤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셨던 것이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그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와 이 땅을 떠나 저 낙원에 머물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동안에도 계속된다. 여러분! 이 땅을 살 동안에는 우리가 육신 가운데 거하기에 사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작 우리 영혼이 이 땅을 떠날 때는 우리의 선하신 목자 주님이 친히 우리 영혼을 보호하사 인도해 주시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23편이 어떻게 노래하는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라고 노래를 시작한 다윗은 마칠 때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고 마무리한다. 무슨 뜻인가? 다윗은 이 땅에서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훨씬 멀리 바라보고 있다. 목자되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나를 인도하실 뿐 아니라 이 땅을 넘어설 때도 더 멀리 이 땅을 넘어선 이후에도 영원히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되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된 그 구원을 얻을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결론. 오늘 ‘찬송하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라.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은혜를 찬송하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유업의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그 능력으로 보호하시되 오늘만 아니라 내일 우리가 죽음의 요단강을 건널 때도 죽음의 요단 강 건넌 후 저 낙원에 거할 때도 영원히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는 나그네가 되어서 하나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