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벧전1장1-2절 설교
선택받은 하늘 나그네 벧전1:1-2, 16-1주일오전
서론. 주를 믿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셔서 잘 하셨고 감사하다. 온 마음으로 크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높여 경배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심령이 새로워지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란다.
올해 표어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다. 요절인 마5:13-16을 매주 반복해서 암송하자고 말씀드렸다. 기억나시죠? 한 번 읽고 외워보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올 한 해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것을 반복해서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자.
1. 오늘부터 서너 달 동안은 주일 오전에 베드로전서 말씀을 살피려 한다.
1) 베드로전서를 택한 것은 오늘 세상의 분위기가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기가 참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일부 대형교회나 목회자의 비리나 실수로 기독교에 대한 시선이 나빠져서도 그렇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상과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어서도 그렇다(동성애). 또 주님 말씀처럼 빛이 어둠에 비칠 때 어둠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감추인 죄를 드러내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베드로전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고난’이다. 무려 15번 나온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기록한 목적이 이 ‘고난’과 관련돼 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핍박 속에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 받았고, 야고보 사도나 스데반 그리고 버가모교회의 일군 안디바는 순교의 길을 갔다.
이때까지 핍박은 부분적이고 개별적이었다. 아직 로마의 권력에 의한 대대적이고 본격적인 핍박은 아니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두 편의 편지를 쓸 때는 로마에 의한 대대적인 핍박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다. 특별히 AD 64년에는 로마의 미치광이 황제인 네로가 도시계획을 위해 일부러 불을 질러 로마 시 절반을 태워 버렸다. 로마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니까, 네로는 이 불을 지른 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누명을 씌운다. 저 기독교인들이 장차 세상은 불로 심판받는다고 하지 않더냐 하면서 애꿎은 기독교인들에게 혐의를 돌려, 수많은 성도들을 잡아다가 어떤 이는 산 채로 짐승의 밥으로 던져주고 어떤 이는 십자가에 매달아서 불을 질러 화형 시켰다. 이 네로 황제의 박해를 시작해서 이후 약 250년간 로마 제국에서는 10명의 황제에 의해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나게 된다.
베드로는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일어나는 이런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혹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친히 장차 도래할 큰 환란의 날에 대해 계시해 주심으로 안 것인지, 아무튼 박해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깨닫고 성도들의 믿음을 굳세게 격려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기록한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이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한국사회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심상치 않는 박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도 베드로전후서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2) 핍박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 말씀을 한 구절 더 나누고 싶다. 2년 전 수요일 계시록 강해 때도 작년 성경대학 계시록 반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오늘 다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계20:7-10이다.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우황 못에 던져지니 ...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냥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우리 성도님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뜻이다. 먼저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한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으셨다. 그래서 그 후로 사탄은 직접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고 다른 악의 대행자들 가령 적그리스도인 세상 나라 권세나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죄에 빠뜨려 지옥 백성 만드는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천년이 찰 때 곧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아주 가까워질 때 사탄이 잠시 옥에서 풀려나는 때가 온다고 한다. 사탄이 옥에서 나와 무엇을 하는가? ‘땅의 사방 백성을 ....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하신다. 땅의 사방 백성 곧 남녀노소 동서양을 무론하고 할 수 있는 한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미혹하여서 싸움을 붙인다고 한다. 누구와 싸움을 붙인가?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했다.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 곧 교회를 말한다. 우리 성도들을 말한다. 주님 재림하실 때가 아주 가까울 때 마귀가 잠시 풀려나서 온 세상 사람의 마음을 미혹해서 교회를 대적하고 우리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게 만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교회와 우리 성도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마치 베드로가 로마에 의한 대대적인 핍박의 시대가 일어날 것을 감지했듯이, 주님 오실 때 다시 한 번 대대적인 핍박의 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러면 이 환난의 결론이 어떠하는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우황 못에 던져지니’. 대대적인 환난의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우리 성도들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질까 하여 하나님은 그 날을 감하여 주신다. 그래서 약속대로 주님이 오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미혹한 마귀와 마귀에게 미혹되어 성도들을 핍박했던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핍박의 시대가 올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이 보자.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3:14-15)’. 여러분! 아무리 핍박의 시대가 와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핍박의 시대가 온다고 두려워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 대신 핍박의 시대가 올 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의’ ‘소망’ ‘선한 양심’이다. 핍박의 시대를 우리는 의를 행함으로 이겨야 한다. 소망으로 이겨야 한다. 선한 양심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 마음을 더욱 ‘의와 소망 선한 양심’으로 무장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영광과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다가오는 핍박의 시대를 의식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굳게 하려고 펜을 들면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니)’ 하는 말로 시작한다. v.1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를 누구로 인식하고 있는지, 또 성도들은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 하는지 듣게 된다.
1) 먼저 베드로는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라고 한다. 베드로가 자기를 가리켜 ‘나는 사도다’하고 말하는 것은 결단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사도니 너희들은 다 내 말 잘 들어야 돼’ 하면서 자기 권위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 첫 마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베드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분 소중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기를 소개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 한다. 자기 이름보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앞선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키신 일을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등에 업고 큰소리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자기는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며 살겠다는 뜻을 담은 고백이다.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 여러분! 우리도 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된다. 하나는 내 삶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 또 하나는 나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드려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그런 말 하지 않는가? ‘작은 예수가 되라’고. 맞다. 우리는 예수의 사람이다.
2) 이어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한다. 베드로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흩어진 나그네’라 부른다. 나그네가 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성도들이 잘 아신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 성도를 ‘나그네’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나그네’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 베드로가 우리 성도들을 나그네라 부르는 의미는 ‘대사’라는 말에 가깝다. 외교관을 지낸 어느 장로님이 책을 쓰시면서 ‘하나님의 대사’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오늘 베드로도 실은 ‘하늘나라 대사’라는 뜻으로 우리를 ‘나그네’라 한다.
하늘나라 대사로서의 나그네는 어떤 나그네인가?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① 첫째로 우리의 나그네됨은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되었다. 아무나 하늘의 나그네가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입어 선택을 받아야 하늘나라 나그네가 된다. 국가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에 외교사절 대사를 보낼 때 아무나 보내는가? 선택받은 사람만 갈 수 있다. 그와 같이 하늘나라 대사 나그네도 그냥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택함을 입어야 한다. ② 하늘나라 대사로서의 나그네는 둘째 지금 머무는 땅을 영원한 거처로 생각지 않는다. 늘 본향을 생각한다. 외국에 나간 대사들이 한시도 모국을 잊어버릴 수 없듯이 하늘나라 나그네 역시 날마다 본향을 생각하고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다. 시편137편은 하늘나라 나그네인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본향을 사모해야 하는지를 잘 노래한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시137:5-6)’. 포로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한 시도 잊을 수 없었고, 이방 땅에서 이방을 위해서는 노래할 수도 없었고, 거기서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지도 못했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한시도 하늘 본향을 잊을 수 없고, 세상의 노래를 부르며 살 수도 없고, 하늘 본향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찾을 수도 없는 본향을 찾는 나그네이다. ③ 하늘나라 대사로서의 나그네는 셋째 할 일이 있다. 사명이 있다. 나라가 외국에 대사를 보낼 때 이유 없이 보내지는 않는다. 가서 자기를 보낸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나그네로 부르신 데는 이유가 있다. 하늘 본향을 찾는 나그네의 사명은 앞으로 베드로전서를 살펴 가면서 자세히 알게 될 것인데, 벧전2:11-12이 가장 명확하게 밝혀 준다. ‘사랑하는 자여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늘 본향 찾는 나그네의 여정은 그저 의미 없이 빨리 지나가기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사명이 있는 나그네이다.
이렇게 보면 재미있게도 베드로가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부른 것이나,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르는 것이나 의미가 같아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가 나그네요 나그네가 곧 사도인 것이다. 사도인 베드로나 흩어진 나그네인 모든 성도들은 공히 우리를 부르신 하늘나라 우리를 택하신 하늘 아버지가 맡기신 소중한 사명을 위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늘나라 대사들인 것이다. 선택받은 하늘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본향에 이를 때까지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며 살아가시기 바란다.
3. 이제 2절을 같이 보자.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문장이 좀 복잡한데, ‘선택’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나타나난다. 먼저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여졌다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것은 무슨 복권 당첨되듯 우연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택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택했다는 말은 우리가 남달리 뭔가 뛰어나고 의로워서 택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실수 많은 모습까지 아시고 택했다는 말씀이다. 내가 온전해서 나를 보고 만족하게 여겨 택하신 것이 아니라, 허물 많은 인생이지만 그저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겨서 택하셨다.
이어서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신다. 이미 거룩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면서 택하신 것이다. 순서가 중요하다. 거룩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고, 선택을 받음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덧입는 것이다.
성령님이 거룩하게 하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하는가?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지는가를 잘 보라. 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과 순종’ 둘이다. 마음의 근본이 더러워지고 영혼이 어두워지며 양심이 부패해진 인생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이 더러워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기적이고 악한 인생, 영혼이 어두워서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찾지도 겸손히 섬기지도 못하는 존재, 양심이 부패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로 물들어 있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의 허물만 비난하는 우리 인생은 물로 씻어도 불로 태워도 그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신비롭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신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다. 그런데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순종함과’ 그랬다. 그 양심이 피 뿌림을 받은 성도는 이제 성령이 그 속에서 거룩한 소원을 갖게 하신다. 바로 순종의 소원이다. 거룩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이 나타나서 변화된 삶을 보이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 변하구나 하는 열매가 나오는 거다. 그래서 계14:4에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은 여자(세상)과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14:4)’. 그렇다. 하늘 시온산에서 영생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은 이 땅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고 또 어린 양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 감으로 순종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4. 이렇게 성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피 뿌림을 통해 우리가 택함을 입었는데, 오늘 베드로는 택함을 받은 하늘 나그네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하고 인사한다.
성도들이 만나면 서로 은혜와 평강의 인사를 하는 것은 초대교회 보편적인 일이었고 바울도 편지마다 그렇게 인사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 조금 특별한 것은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하는 것이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가 아니고, 더욱 많기를 축복한다.
2016년 새해를 시작했다. 베드로의 인사처럼 우리 기장교회 모든 성도들 심령과 가정 우리 교회 위에 작년보다 올해가 그리고 남은 생애 동안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베드로가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축복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는 무궁한 은혜와 평강의 보고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은혜와 평강도 귀하지만, 사실 하나님께는 아직 우리가 전혀 맛보지 못한 은혜와 평강이 무한정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은혜 더 큰 평강을 사모해야 한다.
설교의 황태자라 부르는 스펄젼 목사님의 일화다. 어느 날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마음에 크게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때 스펄젼의 마음속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작은 일에 지쳐 낙심하는 자기 모습이 마치 큰 탬즈강에 살면서 강물이 다 말라 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작은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큰 강에 살면서 강물이 다 마르면 어쩌나 걱정하는 작은 물고기를 보고 탬즈강이 속삭인다. ‘작은 물고기야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마셔라. 내 강물은 너가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도 부족하게 되지도 않을 거란다’.
스펄젼이 계속해서 상상을 한다. 이번에는 자기가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등산가가 산을 오르면서 산소를 모두 마셔 버려서 숨이 막히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한다. 그 때 하늘에서 창조자의 음성이 들린다. ‘마음껏 숨을 쉬라. 작은 인생아. 마음껏 들이키고 허파를 채워도 내가 창조한 공기는 너가 마시기에 충분하고 모자람이 없다’.
결론. 여러분 그렇다.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은 다함이 없다. 고갈됨이 없다. 모자람도 없다. 받고 누리고 또 받아도 늘 새로운 은혜 더욱 넘치는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택함을 받아 하늘나라 나그네 된 성도 여러분! 늘 은혜를 사모하고 주와 동행함으로 우리 성도들 인생길에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고 풍족해지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