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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Jul 03, 2015
  • 902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는 참신자가 됩시다. 롬2:5-11

서론. 신실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우리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의 신앙고백 중 하나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이다. 그렇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 중의 하나가 ‘종말과 심판’이다.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듯이, 세상과 역사도 시작할 때가 있었듯이 마무리할 때도 있다. 혹 어떤 분은 아침이 있으면 저녁도 오지만, 또 내일이면 새로운 아침이 오지 않는가? 하고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맞다. 그래서 세상 역사도 시작인 ‘창조’에 이어 마무리하는 ‘종말/심판’이 오지만, 그 후에는 ‘영생/영벌’이 또 있다.

오늘 롬2:5-10으로 ‘종말/심판’과 그 후에 있을 ‘영생/영벌’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이 본문 통해 종말의 최후 심판에 관한 몇 가지 진리를 살펴보겠다.

1. 오늘 첫째로 생각할 것은 ‘종말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사실이다.

v.5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라고 하여서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밝혔다. 이어지는 v.6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6절)’ 하신다. v.9에서는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9절)’ 하신다. v.10에서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곤귀와 평강이(10절)’ 하신다.

여기 v.6,9,10에 세 번 반복되는 표현이 뭔가? ‘각 사람’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1) 두 가지다. 첫째, 심판은 모든 사람이 받는 다는 것 곧 ‘보편적인 심판’이 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 심판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일단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종말강화인 마25:31-32에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하신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도 예외가 없다. 계20:12-13도 보자.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 계시록 말씀을 잘 보라.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때 바다도 사망과 음부도 죽은 자들을 내 준다고 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던 자들만 아니라, 재림하기 전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도 다시 일어나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은 지역과 민족, 살았던 시대와 마지막 죽은 모양까지 초월하여 이 땅을 살았던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보편적인 심판’이다.

2) ‘각 사람’이 뜻하는 바는 둘째, 종말의 심판은 ‘개별적인 심판’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심판을 받되, 단체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 단위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다. 혹은 가족 단위로 하나님 앞에 서지도 않는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는 우리 모두가 다 개별적으로 서야 한다. 롬14:12이다. ‘이르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아무도 종말의 심판대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 말해 줄 수 없다. 대신 책임질 수도 없다. 대신 상을 받는 것도 없다. 모든 인생은 종말의 심판대 앞에서 각자 자기 삶에 대해 하나님께 직고하게 돼 있고, 그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이 ‘개별적인 심판’에 대해 가장 많이 오해한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들이었다. 세례요한도 우리 주님도 복음을 처음 전하실 때 그러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렸듯이, 천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열쇠가 ‘회개’다. 아무도 회개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천국에 초대하시려고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많은 유대인들은 그 외침을 우습게 여겼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당연히 천국 들어가지 우리가 왜 회개를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했다.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생각을 잘 알고서 세례요한이 그랬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3:8-9)’. 종말의 심판 날 의인으로 인정받아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종말의 최후 심판은 누구도 대신 받아줄 수도 없고 누구도 함께 해 주지도 못하는 ‘개별적인 심판’이기에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14:20)’. 이 말씀을 읽고 노아 다니엘 욥의 자녀들은 구원받지 못했나 그렇게 생각 하면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원칙을 예로 든 것이다. 구약 시대를 살았던 신앙 인물 가운데 가장 경건하고 의로웠던 대표적인 사람들인 노아 다니엘 욥 같은 사람도, 그 부모가 경건했다고 자녀들까지 덤으로 구원받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노아 욥 다니엘의 자녀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 각자의 회개의 열매가 필요하지, 부모의 의로움으로 구원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1+1’이 눈길을 끈다. 그러데 구원에는 ‘1+1’이 없다. 구원에는 덤이 없는 거다.

2. 이처럼 종말의 최후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이 보편적이면서도 철저히 개별적인 심판인데, 그러면 그 날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1) 다시 v.6을 읽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자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뭐라 하시는가? ‘행한대로’다. 다른 기준이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대로 판단하시고 행한대로 갚아주신다.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게 ‘행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v.5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라고 하셨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게 ‘행한대로’가 아니고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면 의로운 심판이 될 수 없다. 부자라고 봐 주시거나, 누구네 자손이라도 눈 감아 주시거나, 세상 살 때 고관대작이나 왕족이었다고 체면을 생각해 주신다면 불의한 심판이 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다. 우리 하나님이 온전히 의로우시기에 하나님의 심판 역시 온전히 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 ‘행한대로 보응’하신다. 조금 전에 읽었던 계20:12을 다시 보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신다. 조금의 착오도 없도록 각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의 생명책에 정확하게 기록 되어서, 기록된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2) 이렇게 말하면 오래 믿은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혹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행위대로 심판 받는다 했는데, 그러면 구원도 믿음이 아니고 행위로 받는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성급하게 그렇게 질문하지 않아도 된다.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v.7-10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우리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런데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린 것처럼 구원받는 믿음이라는 것은 말로만 믿는 거짓 믿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참 믿음’이다. 조금 전에 읽은 마3:8에서 뭐라 했는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렇다. 구원 얻는 참 믿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법이지, 아무 열매가 없는 믿음을 참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 신자 역시도 회개에 합당한 믿음의 열매를 자기고 그 행위대로 심판대에 서게 된다. 회개에 합당한 믿음의 열매를 맺은 신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임하는 날에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하시고 건져 주신다. 지난 주에도 잠시 말씀드렸지 않는가? 천국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하려다가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 우리 신자는 회개에 합당한 믿음의 열매라는 예복을 갖추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이처럼 종말의 심판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심판’이요 ‘심판의 기준은 행한대로’인데,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 모든 인생은 두 편으로 구분 될 것이다. 영생의 판결을 받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롬1:18에서 그랬죠?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행하여지는 날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과, 그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대신에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는 사람으로 온 인류는 뚜렷하게 나뉜다. 그러면 누가 영생을 받고 누가 진노를 받는가?

1) 먼저 영생 얻을 사람이다. v.7, 10을 같이 읽자. ‘7 ① 참고 선을 행하며 ② 영광과 ③ 존귀와 ④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 자 누가 영생을 얻는가? 누가 하나님의 진노 대신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얻는가? 첫째 참고 선을 행하는 자, 둘째 영광을 구하는 자, 셋째 존귀를 구하는 자, 넷째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 했다. 예수님을 믿기에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다.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하며 산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고 사는 것이다. 바로 그런 믿음의 행위 믿음의 열매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

① 그러면 영광을 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일컫는다. 그래서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영광으로 내 삶과 인격이 채워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날에는 하나님을 몰라 죄의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니,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이 시간을 내어 기독교 위인전들을 많이 읽어보라.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 인물들도 그러했고 교회사에서 귀한 생애를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같이 간절히 바란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다. 저들 심령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재하기를 바랬다.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의 강물 속에 잠겨서 살아가기를 바랬다. 저들의 온 마음과 영혼과 생각까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저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닮고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것이 ‘영광’을 구하는 삶이다.

② 종말의 심판 날에 영생을 얻는 사람은 또 ‘존귀’를 구한다 했다. 존귀를 구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존귀한 자가 되고 싶어 한다, 곧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지난 2월에 석 주 동안 살핀 마18장 말씀을 기억해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였는가? 스스로 자기를 어린 아이처럼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작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였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사는 작은 자를 우리 주님이 너무나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 했다. 바로 이거다. 영생을 얻을 자가 구하는 존귀는 사람의 눈에 보기에 존귀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심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이나 영광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인정하시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5:44에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사람에게서 얻는 영광과 존귀에 마음이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주시는 존귀를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산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이다.

③ 심판 날에 영생을 얻는 사람은 셋째로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 했다.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니 무슨 말인가? 썩어 없어질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썩어지고 사라질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벧전1:3-4)’.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저 하늘에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도 않는 기업도 마련해 놓으셨다. 영생을 얻는 의인은 마음은 한 순간도 저 하늘의 썩지 않는 기업을 잊지 않는다. 의인의 눈은 항상 하늘의 썩지 않는 기업을 바라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이 썩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구하였기에, 저들은 전날에 속했던 이 땅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 살던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기꺼이 하늘 본향을 향해 나그네로 살았다.

④ 심판 날에 영생을 얻을 의인은 또 ‘참고 선을 행하여’ 하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신자의 삶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이 땅의 우리 모습은 완전한 영화로움이 아니라 성화 되는 과정이기에, 때로 넘어지고 실수도 하고 부족한 모습도 나타난다. 그러나 신자의 삶의 방향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힘쓴다. 하나님 앞에 좀 더 많은 선한 일 하지 못해 죄송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선한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한다고 한다.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도 만나지만 참고 한다. 선을 행하며 살려고 애쓰다가 때로 잠시 낙심하기도 하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선한 싸움을 시작한다. 참고 선을 행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 유명한 로마서 강해자인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연약하나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서 끝까지 주님 걸어가신 의의 길 선한 길을 따라는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작고 미미했던 의의 열매가 주님 앞에 서는 날이 다가올수록 더 분명하고 확실해지게 되는 것이다.

⑤ 이렇게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고 살 때, 우리 하나님이 심판 날에 주실 영생의 선물이 무엇인가? 우리가 ‘영생’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크게 두 가지 의미다. 첫째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만 가지고 영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로 영생은 내용 면에서 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충만히 받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영생의 질적인 면은 사실 이 땅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조차 없다. 영생에 이르는 날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 질 것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봄으로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같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생의 질적인 차원에 대해 오늘 v.10에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시는 거다.

2) 그런가하면 종말의 심판 날 영벌을 받는 사람도 있다. v.8, 9을 같이 읽자. ‘오직 ① 당을 지어 ②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③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④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누가 영벌을 받는가?

① 첫째 ‘당을 지어’ 그랬다.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가담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와 우리네 인생도 지으시며 때를 따라 햇빛과 비도 주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모든 인생의 본분은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거다. 그런데 심판 날에 영벌을 받는 무리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편에 서지를 않는다. 사는 동안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무시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리는 마귀의 당에 속한 자들이었다.

② 둘째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신다. 롬1장을 배울 때 진리가 뭔지 말씀 드렸다. 기억나시는가? 쉽게 말해 하나님 계신 것이 진리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선한 삶이라는 것이 진리다.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 진리다. 인생은 피조물이라는 것이 진리다. 이 모든 진리를 따라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창조주요 주인이요 심판장이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내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말이다.

③ 셋째 ‘불의를 따르는 자’라 했다. 이것도 1장에서 배웠다. 인생들이 그 마음에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을 몰아내 버린 결과 영적으로 온갖 더러운 귀신을 섬기고, 성적으로 온갖 음란에 빠지고, 그 마음과 생각 말과 행실이 모두 더러워져서 온갖 탐욕 시기 거짓 교만 자랑 미움 부정 배약함에 빠졌다 했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불의를 따르는 것이다.

④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당을 지어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라 살면 영벌을 받는데, 영벌은 뭔가? 역시 두 가지다. 하나는 영벌도 시간적으로는 영원한다. 영벌 역시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질적으로 내용 면에서 영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에서 끊어진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인자하신 음성도 다시 듣지 못하는 것이 영벌이다. 그래서 ‘바깥 어두운 데 좇아내어 이를 갈게 하라’신 것이다.

이 영벌의 질적인 차원에 대해 오늘 로마서 2장은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하신다. 환난은 모든 외적인 고통을, 곤고는 모든 내면적이고 영적인 고통을 일컫는데, 한 마디로 영광이 아니라 ‘진노의 자리’이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말의 심판과 그 후에 있을 영생과 영벌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서, 부디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참된 믿음으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며 참고 선을 행하여 회개의 열매 맺고 살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광의 자리 영생의 복에 이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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