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롬1:24ff 설교
마음에 하나님 꼭 모시고 삽시다 롬1:28-32
서론. 벌써 2014년 마지막 주일이다. 이렇게 세월가면 머지않아 우리 인생도 역사도 마지막 순간이 올 것인데, 그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은혜와 평강으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
오늘 로마서 1장 마지막 부분을 살필 차례다. 지난 석 주 동안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만물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영화롭게도 하지를 않는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죄악은 가장 먼저 ‘영적 타락’으로 나타났다.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의 생각과 이론을 믿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더 섬기고 경배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는 인간의 죄악은 또 온갖 추악한 ‘성적 타락’에 빠지게 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제도를 만드신 모든 순리와 질서를 버리고, 역리와 역주행을 거듭하면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 그 외에도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버리고 온갖 음란한 일들에 빠져 들었다.
1. 이제 오늘 로마서 1장 끝 부분인 v.28-32은 ‘영적 타락’ ‘성적 타락’을 넘어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버린 인생들은 어느 한 부분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다 타락하고 만 것이다.
생명이 떠난 시체를 보라. 생명이 떠나는 그 순간부터 바로 부패가 시작된다. 위치에 따라 빨리 부패하는 부분도 있고 조금 더디게 부패하는 부분도 있기는 한데, 그러나 부패하지 않는 신체나 장기는 없다. 짐승의 시체든 물고기의 시체든 생명이 떠나면 부패하되, 모든 곳이 다 부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3주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며 또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을 버리면 인간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부패해 질 수밖에 없다. 영혼도 부패하지만 몸도 부패하고, 생각도 부패하지만 말과 행실도 부패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부패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도 부패해진다. 생명이 떠나는 순간 모든 시체가 썩기 시작하듯, 모든 선의 근원인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내쫓아 버린 그 순간부터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오늘 말씀 v.2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같이 읽자. ‘①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②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 두사 ③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제가 번호와 색깔로 구분해 놓았듯이 v.28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 인생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신다. 인생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내쫓아 버렸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생각도 말도 행동도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싫다. 그래서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을 내쫓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시는가? 예수 안에서 이제 다시 하나님을 모셔 들였는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하루하루 살고 계시는가? 혹 주일날 교회에 예배하러 올 때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부터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 때는 다시 하나님을 마음 밖으로 나가시라 하고 그렇게 살지는 않으시는가? 그렇게 살지 않는 줄 믿는다.
이렇게 인생들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를 싫어하여 내쫓아 버리므로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 두사’ 한다. 여기 ‘상실한 마음’이라 했다. 상실했다는 것은 뭔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고 원래는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래는 있었던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원래는 있었는데 이제 없어진 것이 뭔가? 하나님이시다. 원래는 인간 속에 하나님이 계셨다. 창2:7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처럼 아름답고 거룩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다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셔야 한다. 하나님 모시고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찬송 불렀다.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 헛된 교만 버리고 우리 구주 모시어....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주님을 다시 마음속에 모실 때 우리는 온갖 죄악의 사슬을 끊고 다시 생명길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이렇게 인생들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 싫어하므로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진 결과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한다.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내좇아 버린 결과는 온갖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거다. ‘합당하지 못한 일’이라는 게 뭔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사람답지 못한 일이다. 여러분! 짐승을 보고 ‘사람답게 살아라’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당연히 사람답게 살 것을 기대하고 사람답게 살라 한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버림으로 상실한 마음이 된 인생들은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대로 사람답게 살아가지를 못한다. 도리어 사람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행하고 산다.
이렇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 => 상실한 마음 => 합당하지 못한 일’로 이어진 것인데,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부패’라 한다.
2. 그러면 ‘영적 타락’ ‘성적 타락’을 넘어 ‘전적 타락’에 빠진 인생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같이 v.29-31을 읽자.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 여기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내쫓아 버린 결과 인생들이 행하고 사는 온갖 합당하지 못한 죄악의 목록이 총 21가지가 나열돼 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죄의 목록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인간의 죄의 전부인가? 그렇지도 않다. 이 21가지 마저 사실 인간의 죄의 일부만 지적해 놓았을 뿐이다. 대표적인 죄들만 지적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일부만 지적해 좋은 이 죄의 목록들 중에 나는 전혀 그런 죄는 짓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또 하나님의 계명은 몸으로 실행한 것만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생각까지 규정하시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여기 21가지 죄의 목록 중에 나와 상관없는 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이 모든 죄들과 상관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 죄악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이나 ‘가득한 자요’ 하신다. 이런 죄악들이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다. 충만한 것이다. 그래서 ‘전적 타락’이다.
2) 나열된 21가지 죄악들을 하나하나 다 살피자면 오늘 밤을 새워야 할 것이고, 몇 가지만 짚어보자. ① 먼저 ‘모든 불의’ 그랬다. 불의 앞에 ‘모든’이 붙어 ‘모든 불의’다. 불의는 의롭지 못한 것 아닌가? 그래서 ‘모든 불의’는 의를 행하지 않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을 총 망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적극적인 불의도 포함 되지만, 남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소극적인 불의도 다 포함된다. 미워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만 죄가 아니라 도와야할 때 돕지 않는 것도 죄다. 의를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불의다.
② 그 다음 추악 그랬고 또 ‘탐욕’ 그랬다. 탐욕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에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탐욕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아실 것이다. 만족할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끝이 없는 탐욕에 허덕이며 사는 인생 아닌가?
③ 그 다음 ‘악의가 가득한 자요’ 그랬고 또 ‘시기’ 그랬다. 대개 세상은 ‘시기심’은 특별히 무슨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기심 없이는 세상을 살 수도 없는 당연한 걸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의 원래 모습은 시기하며 살도록 짓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시기심, 남이 나보다 더 가지는 것을 못 보는 시기심이 들어온 것은 죄의 결과다. 그리고 이 시기심은 탐욕과 더불어 다른 여러 죄를 낳는 범죄의 요람이 되기도 한다. 탐욕 때문에 강도와 도둑질을 하고 시기심 때문에 살인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탐욕과 시기는 범죄의 요람’인 것이다. 이 시기심은 아주 어린 아이부터 해서 80이 넘은 어르신들까지 도대체 벗어나질 못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는가?
유대인들의 지혜서라고 하는 탈무드에 보면 이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천사가 두 여행객을 만났다. 한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질투와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서 천사가 그들에게 선물을 주겠다. 한다. 두 사람 중에 먼저 소원을 말하는 사람은 그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첫 번째 사람이 받은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탐욕스러운 사람은 두 배를 받을 욕심에 도저히 먼저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저 사람이 자기 보다 더 가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먼저 말을 안 한다. 한참을 서로 눈치만 보다가 욕심쟁이가 참다못해서 시기쟁이의 멱살을 잡고 먼저 말을 안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러자 남에게 지는 것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시기쟁이가 ‘내 소원은 눈 하나가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외쳤다 한다. 시기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성경에도 시기심 때문에 망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누구인가? 사울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을 듣고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평생 다윗을 죽이는 일에 몰두하다가 인생을 다 망쳐 버렸지 않는가? 시기는 우리 영혼도 인생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주님 마음을 닮은 참 사랑은 어떠하다 했는가?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 다음이 뭔가? ‘시기하지 아니하며’. 그렇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늘 영과 버리고 세상에 오신 주님 마음을 본받아서 우리 성도님들 시기하지 않는 참 사랑 안에 자라가시기를 축원한다.
④ 그 다음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했고, 이어서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그랬다.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데 차이점은 수군수군은 그 사람이 없을 때 하는 것이요 비방은 그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를 떠나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오늘 롬1장에 열거된 아주 심각한 죄악도 많지만 그 중에 골라서 ‘수군수군하는 것’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것은, 교회 생활 우리 신앙생활에서 이 수군수군하는 것이 사실 많은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제가 정확하게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반복해서 날아오는 잽에 무너진다’고. 권투에서 잽은 사실 한 두 번 맞는다고 바로 케오를 당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계속해서 잽을 허용하다보면 나중에는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거다. 마찬가치다. 수군수군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별 것 아닌 것 같이 여길지 몰라도, 사실 이게 교회 공동체를 조금씩 조금씩 허무는 잽과 같다. 그 성도가 없는데서 수군수군하는 일들이 자꾸 생기면, 서로 보이지 않는 불신의 장벽이 생기고 결국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사실 다 간사해서 그 사람이 없는 데서 흉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보통 재미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잠18:8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하신다. 없는데서 남 흉보는 재미가 마치 별식을 먹는 것 같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한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을 그렇게 즐긴다는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지적하는 말이다. 여러분! 수군수군하는 별식을 좋아하면 공동체도 무너지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귀한 영혼을 또 실족하게 만든다. 나아가 결국에는 수군수군하는 그 별식이 자신에게도 독이 된다. 그러니 이제 없는 데서 이 성도 저 성도에 대해 수군수군하는 일을 그치라. 제가 부탁하고 또 권면한다. 남녀 전도회가 기관실에서 모일 때 더 이상 쑥떡 만들어 드시지 말라. 쑥떡거리는 죄를 이제 그치라.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입에서 수군수군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신자의 입에서 수군수군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는 일임을 잊지 말라.
엡4:29 같이 보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수군수군하는 말을 비롯해서 모든 더러운 말은 입에 담지도 말라. 정말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⑤ 그 다음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요’ 하시고 또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하신다. 여기 능욕 교만 자랑 세 가지는 사실 서로 사촌들이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어찌하는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한다. 그게 뭔가? ‘능욕’이다. 이번 모 항공회사의 땅콩리턴에서 우리는 잘 보고 있지 않는가? 오너의 지위와 권세 때문에 그 마음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니까, 자기 회사에서 월급 받는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오너라고 회사 직원에게 욕설을 하고 별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무릎까지 꿇게 해서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심지어 그 이국땅에서 내리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전형적인 능욕하는 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교만하면 남을 능욕하는가 하면 또 자랑한다. 어디 자랑할 데가 좀 없나 그런다. 능욕과 교만과 자랑은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삼총사인 것이다.
여러분! 주 예수를 믿는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지 아시죠? 뭔가? ‘겸손’이다. 어거스틴은 우리 신자가 꼭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첫째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 그랬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뭐가 있는가? 다 하나님이 주셨다. 지금 가지고 있지만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이 뭔가? 아무 것도 없다. 때가 되면 다 놓고 가야 한다. 다 하나님이 주셨고 다 놓고 가야하는 것이 인생인데, 그런데 무엇을 자랑하고 교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주 배운 말씀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보라. 하나님이 주시요 창조주시다. 오늘도 만민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 겸손 또 겸손하라. 벧전5:5이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⑥ 그 다음 악을 도모하는 자가 나오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도 나오고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가 죽 이어진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청사진들 아닌가? 부모와 웃어른을 공경함이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기기 위해서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약속을 해도 도대체 처음부터 믿음이 안 간다. 부부 간에도 그렇게 엄숙하게 행한 서약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 하는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무자비한 일들이 하루에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지난 주 뉴스에서는 이슬람 국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잡아다가 군인들과 결혼을 하라 하는데, 결혼을 거부한 여성 150명을 한 자리에서 다 죽여 버린 일을 보았다. 이렇게 그 예를 찾자면 우리가 밤새 이야기해도 끝이 안 난다. 뭔가? 그야말로 ‘전적 타락’이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타락했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타락했고 다 타락했다. 어린 아이도 타락했고 나이 많은 어른들도 타락했고 다 타락했음을 오늘 로마서는 지적한다.
⑦ 그런데 v.32을 보시면 더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신다. ‘①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②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③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먼저 이 같이 죄악된 일들을 행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사형이다 하는 것을 인생들이 본능적으로 안다고 하신다. v.20에서 만물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 알게 하신 것처럼, 인간의 양심 속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두려움을 갖도록 심판에 대한 지식을 새겨 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까지도 과감하게 내던져 버렸다. 이런 일 행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을 계속하면 마음 놓고 죄를 못 지으니까,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새겨진 심판에 대한 생각을 아예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또 자기만 죄 지으면 뭔가 찜찜하니까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가 문제겠어 하면서 다른 사람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서로 도와준다는 것이다. 서로 마음 놓고 죄짓도록 돕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찌 되겠는가? v.18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결론. 오늘 마치기 전에,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찌해야 하는가? 오늘 살펴본 말씀 v.28-32의 말씀을 반대로 살면 된다. v.28-32을 반대로 바꾸어 읽어보자.
‘28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좋아하매 하나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계셔서 거룩하고 합당한 일들을 행하게 하시나니 29 곧 모든 의와 깨끗함 자족함 선의가 가득한 성도요 시기하지 않고 남을 위해 헌신하며 한 마음으로 돕고 진실 사랑이 가득한 자요 30 남이 있거나 없거나 칭찬하는 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요 어떤 사람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자요 겸손한 자요 자기를 감추는 자요 부모를 공경하는 자요 31 지혜롭고 신실하고 자비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라 32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영생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알기에 예수 안에서 그와 같이 살려고 애쓸 뿐 아니라 이웃과 형제들도 함께 그같이 살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느니라’.
바꾸니까 너무 아름다운 말씀이 되죠?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 딱 모시고 정말 거룩하고 의로운 길을 걸어서 영생의 축복에 다 이르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