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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Apr 09, 2015
  • 1437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자리에서 벗어나라 롬1:18, 14-12주일오전(265)

서론. 올해 여름 7월 8월 두 달 동안 주일오전에 롬1:1-17을 살폈다. 그러다 가을이 되어 여러 교회 일정도 있고 또 교리 설교를 계속 듣는 것이 다소 힘든 면도 있어서 로마서 강해를 멈추었는데, 오늘부터 얼마 동안 다시 로마서를 살피려 한다.

1:16-17이 로마서 전체 요절과 같은데,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했다. 왜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무슨 능력인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왜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라 했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 이제 오늘 말씀 1:18부터 3:20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총 긍휼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은 하기도 부담되고 듣기도 부담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진리일 뿐 아니라 또 반드시 들어야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듯이, 듣기가 부담스러워도 왜 성경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가르치는지 그 의도를 알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교훈은 우리 영혼에 양약이 된다.

1) 성경은 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여러 곳에서 가르치는가? 오늘 설교제목을 보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자리에서 벗어나라’. 그렇다. 성경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은 빨리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나면서 많이 잊혀 가지만, 여전히 올 봄 세월호 사건의 충격이 남아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 뭐였는가?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이미 배가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여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빨리 배에서 탈출하십시오’하고 안내방송을 하지 않은 거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이 있는 것처럼 승객들을 속이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대기하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책임한 선장의 말만 듣고 가짜 희망을 붙들고 있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자신들이 직접 들어가서 구조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거기 있으면 죽습니다 빨리 탈출하세요’ 이 한 마디는 외쳐 주어야 하지 않았는가?

롬1:18은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들을 향해 ‘계속해서 하나님 등지고 죄 아래 거하면 죽습니다. 빨리 진노의 자리를 떠나십시오’ 하는 외침이다. 같이 읽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가라앉는 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괜찮다 괜찮다’ 하고 거짓 평안을 줄 일이 아니라, 지체하다가는 다 죽으니 어떻게든 도망가라고 사실을 바로 알려 주어야 하듯, 오늘 교회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빨리 떠나라고 외쳐야 하는 거다.

2) 오늘 댁에 가시면 예레미야 28장을 꼭 읽어보라. 거기 보면 두 선지자가 나온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 하나냐다. 예레미야는 왕과 백성이 듣기 싫어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했다.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될 것이라 했다. 반면에 하나냐는 왕과 백성이 듣기 좋은 말로만 예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더 이상 진노하지 않으실 거라 한다. 성전이 있는 한 예루살렘은 망할 수 없고, 이미 1차 2차 포로로 잡혀간 백성까지 하나님이 곧 돌아오게 하실 거라 했다. 뭔가? 하나냐는 우선 듣기 좋은 말로 ‘거짓 평안’을 외쳤고, 예레미야는 우선 듣기 부담스러워도 ‘하나님의 진노’를 진실하게 외쳤다. 그 결과가 뭔가? 하나님이 거짓 평안을 외친 하나냐가 그 해가 가기 전에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그 해 7월에 하나냐가 죽는다. 그래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듣기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오늘 교회가 외쳐야할 복음의 메시지다. 그래야 진노의 자리에서 속히 떠나야겠구나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살 길을 찾아야겠는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절대 진노하시는 분 아니라는 식의 ‘거짓 평안’만 추구하다가 후회할 건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바로 알고, 하나님께 바로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평안하리라고 믿는 거짓 평안만 추구하는 거짓 신앙은 이제 버려야 한다.

2.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 진노하시는가? v.18 다시 보자. ‘하나님의 진노가 ①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②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③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번호가 붙어 있죠? ①번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에게 진노하시는지 대상이다. ②번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는 왜 진노하시는지 이유다. ③번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는 어떻게 진노하시는지 방법이다.

1) 먼저 하나님이 누구에게 진노하시는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다. ‘불의로’ 진리를 막았다 했는데 ‘불의로’는 ‘악의로’하는 뜻이다. 악의 곧 ‘악한 의도’다. 같은 행동이라도 고의냐 실수냐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 도피성에 대한 율법을 보면, 아무런 의도 없이 우연한 행동으로 사람이 죽게 되면, 살인자가 도피성에 들어감으로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남을 죽인 경우는 아무리 도피성에 숨어도 끝까지 찾아내어 형벌을 받게 한다. 그와 같이 오늘 로마서 말씀도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의도’를 가지고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신다.

‘악한 의도’로 진리를 막는다 할 때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가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진리가 뭔가?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면 ‘모든 참된 것’이 진리다. 따라서 진리를 막는 것은 모든 참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리가 무엇인가? 로마서 1장의 문맥 속에서 찾으면 v.19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진리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다. 세상에 아무리 남자가 많고 여자가 많아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한 분 뿐이라는 것이 변치 않는 진리이듯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진리다. 또 뭐가 진리인가? 우리네 인생은 몸만 아니라 불멸의 영혼도 있다는 것이 진리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내세가 있음이 진리다. 우리 하나님은 조금의 불의함이나 더러움이 없고 온전히 거룩하시다는 것이 진리요, 그러기에 한 치의 착오가 없이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도 진리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이 진리다.

그런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 모든 진리를 막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도인가? 바로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한 의도이다. 생각해보라.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리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창조했기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신다. 그래서 사람이 부모를 공경함이 마땅하듯 하나님이 창조주시면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기가 싫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공경하기 싫은 악한 의도로 진리를 막아 버리는 거다. 또 하나님이 선악 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진리를 인정하면 어찌되는가? 절대 지금 이 땅에서 내 고집대로 못 산다.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진리를 막아 버려야 내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 내세가 있다는 진리도 부정해야, 그저 이 땅의 삶에 혈안이 되어 악착같이 돈만 바라보고 사는 내 모습이 정당화된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막아 버려야 내가 최고가 될 수 있고 죄를 지어도 담대할 수 있고 내 인생에 대해서는 내가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를 막아버리는 거다. 이것이 악한 의도로 진리는 막는 거다.

2) ‘하나님의 진노’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석연치 않는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 하셨는가? 분을 품지 말라, 성내지 말라 그러셨다. 이 말씀처럼 우리 성도님들 성령충만해서 성격을 잘 다스려 성내지 말고 사시라. 그런데 이렇게 분노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하시면서 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결과다. 거룩하심의 결과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상의 온갖 불의와 악행들을 보시면서도 진노하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의롭다하실 수 있으신가? 그럴 수 없다. 합1:13 같이 보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그 눈이 온전히 정결하신 분이시기에 악을 보시고 진노하신다. 시7:11도 보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이 매일 분노하신단다. 왜요? 이 땅 구석구석에 매일매일 온갖 죄악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우리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인생들이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성내는 것과 다르다. 자기도 불의하고 악하면서 다른 사람 불의에 대해 못 참고 비난하는 것과도 다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로우심 때문에 나타나고 또 세상에 의를 세우기 위해 나타내시는 거다.

3. 이렇게 하나님은 의로우심으로 악한 의도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인생들의 어떤 죄로 인해 진노하시는가?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그랬다. 여기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는 사실 악의로 진리를 막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가 가정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온다. 왜 물이 나오는가? 수도관을 통해 수원지와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 수도관을 막아 버리면 어찌되는가? 아무리 수도꼭지를 틀어도 수도꼭지를 새로 사 달아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경건한 삶 의로운 삶의 수원지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경건한 삶도 살 수 있고 의로운 삶도 살 수 있는데, 악의로 하나님 아는 진리를 막아 버렸으니 경건하게도 의롭게도 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시14편: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 말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이 딱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뭔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거다. 로마서 표현대로 하면 악한 의도로 진리를 막았다 그 말이다. 후반부는 뭔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한 결과 저들의 마음은 부패해지고 행실은 가증해지고 그래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게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오 또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워버리면 당연히 선한 생각과 선한 삶도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근원 선의 근원이시다.

이처럼 하나님 아는 진리를 막은 결과 인생들은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빠짐으로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불경건과 불의’가 하나님 진노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면 불경건은 뭐며 불의는 뭔가? 불경건은 하나님께 잘못하는 죄이고, 불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못하는 죄다. 하나님이 창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지으셨다. 위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땅에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존재였다. 그러기에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불경건이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불의이다.

우리는 매일 TV나 신문의 뉴스와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수준을 넘어 경멸하고, 사람의 탈을 썼지만 도저히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죄악의 모습들을 접하고 산다. 그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우리 하나님이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은 역으로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시편7편을 다시 보면,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 되셔서 매일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시편 기자는 두려운 일로가 아니라 도리어 소망으로 삼는다. 시편7:9-10이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이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에게 진노하시는 것은 경건한 사람에게는 소망이 된다.

욥을 보라. 하나님이 욥을 어떻게 칭찬하시는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 경외했다는 것은 경건했다는 말이다. 악에서 떠났다는 것은 의로웠다는 말이다. 그런 욥을 하나님이 어떤 눈으로 보셨는가? 진노하셨는가? 하나님은 한없이 욥을 사랑하셨고 기뻐하셨고, 잠시 연단은 허락했지만 결코 사탄이 해하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되시고 갑절의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경건한 자의 요새요 산성이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나타나는 줄 알고, 하나님 경외하고 하나님 잘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잘 청종하며 사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4. 오늘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성경에 ‘나타나나니’하신 말씀은 시제가 미완료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현재에도 나타나고 있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간이 둘이다. 하나는 현재고 하나는 미래다. 지금 현재도 하나님은 진노하시지만, 장차 또 특별하게 진노하는 날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오늘 현재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을 잘 믿지 않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악한데도 잘만 살고 어떤 사람은 참 착한 것 같은데도 힘겹게 산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은 지금도 진노하시고 장차에도 또 진노하실 것이다. 딤전5:24 보자.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말씀을 잘 보라. 어떤 죄는 속히 밝히 드러나서 먼저 심판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개월 혹은 수년 뒤에 범인이 잡히는 경우도 있다. 누구의 죄가 먼저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는가? 그건 우리가 잘 모른다. 재판장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죄를 먼저 드러내실 지는 우리가 알 수도 없거니와 우리가 관여할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씀이다. 이렇게 속히 드러나서 먼저 심판에 나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를 않고 우리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그 죄가 묻혀 버리는 일이 많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불의한 세상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돈 많은 사람은 큰 죄를 짓고도 혐의를 벗어 떵떵거리고 사는 울화통 터지는 일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여러분! 너무 분해하지 말라.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 왜요? 그 죄가 먼저 밝히 드러나서 먼저 심판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괜찮은 것이 아닌 거다. 그래서 이어서 뭐라 하시는가?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그렇다. 반드시 하나님이 때가 되면 심판하시지, 지금 드러나지 않고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았다고 영원히 괜찮은 게 아닌 거다.

사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죄가 먼저 드러나서 최후 심판 전에 징계의 성격으로서의 심판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더 복이다. 왜 그렇는가? 죄가 먼저 드러나서 징계의 성격의 심판이 이루어지면, 회개할 기회라도 얻게 된다. 그러나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죄가 없는 것처럼 교만하게 살다가는 머지않아 정말 큰 코 다치는 날이 온다. 내 몸에 암세포가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낭패 당하기보다는 알고 치료할 시간과 기회가 있는 것이 복인 것과 같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나타나고 장차에는 온전히 나타날 것이다. 하늘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사도행전의 헤롯 왕 보라. 사람들이 아부하여 신의 소리라는 말에 우쭐해하다가 그 교만을 하나님이 치실 때 충이 먹어 죽었지 않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임한 것이다. 구약의 사울 왕도 보라.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고 기회를 주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거스리다가 결국 아들들과 함께 한 전쟁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지 않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오늘도 임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사실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맛보기에 불과하다. 진짜 무서운 진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장차 나나탈 것이다. 이 진노의 두려움에 대해 주님이 경고하셨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① 죽인 후에 ②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할 것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결론. 오늘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씀드렸다. 하나님 사랑 은혜 위로와 같이 얼마든지 긍정적인 주제도 많은데, 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 평안에 속아 살다 망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각자의 영적 형편을 돌아보자. 내 영혼은 안전한가?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은 정말 안전한가? 이제 피난처 되신 예수님께 나아오라. 모든 죄 짐을 주님께 맡기라.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라.

오늘 우리가 함께 찬양했지 않는가?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 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온 몸을 피에 담글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날마나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님의 십자가 보혈에 담가서 주님의 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진노는 면하고 도리어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의 사랑 속에 거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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