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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Apr 09, 2015
  • 1492

‘더 좋은 부활’을 바라봅시다 히11:35-38, 15-4부활주일(천국에서 만나보자, 하늘소망)

서론.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의인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사망 권세를 깨고 주님이 부활하셨다.

1년 중에 제가 제일 신나게 설교할 수 있는 날이 사실 오늘이다. 주의님 부활을 증거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주님의 부활은 울다가도 춤을 출 일이다. 고달픈 세상살이 한숨 쉬다가도 다시 소망으로 일어서게 하는 능력이다.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우리 성도님들 심령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1.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이 있다. 미국의 어느 교수가 불치병으로 죽어 가는데, 그를 존경한 한 제자가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나눈 인생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정말 그렇다.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수긍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면서도 그 언젠가가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죽음의 문제를 이처럼 남의 일로만 여기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어도 그렇게 감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 귀를 번쩍 열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소식이 된다.

우리나라 한 해 사망자가 어느 정돈지 아시는가? 해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략 26만 명 전후다. 기장읍이 5만 조금 넘기에, 해마다 기장읍 5개에 해당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모든 사망자를 다 알지 못해서 못 느낄 뿐이지, 사실 홍수가 쓸어가듯이 날마다 죽음이 사람들을 쓸어가고 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의 책에 보면,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에 대해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어느 한 해에 너무 좋아했던 친구 셋이 죽게 되었다. 한 친구는 어느 날 부부가 외식을 즐겁게 하고 차를 타려는데, 차 문 앞에서 쓰러져서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한 친구는 믿음이 참 좋아서 어떤 선교회에 속해서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선교회 정기모임에 참석하러 가다가 뒤에서 대형 트럭이 덮쳐서 현장에서 죽었다. 또 한 친구는 스쿠버 다이빙이 취미였는데, 어느 날 호수에 들어갔다 심방마비로 죽었다.

한 해 만에 사랑했던 세 친구를 떠나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저 친구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는 설교를 들어도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그 후로는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부황하셨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더 반가운 소식, 더 소망이 되는 메시지는 없는 거다.

2.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믿으라. 예수님의 부활 생명 안에서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1) 고전15:20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잘 보라. ‘그러나 이제’ 그랬다. 전날에는 죽음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죽는다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아직 연약한 인생이라 본능적인 두려움은 있겠지만, 죽음 앞에 두려워서 벌벌 떨지는 않는다. 도리어 죽음 앞에서 믿음으로 외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사망에게 보고 큰 소리를 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무슨 말인가? 사망은 끝장났다는 말이다. 믿음 안에서 바울은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망을 보고 되레 까불지 말라고 호통을 치고 있다.

바울이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사망을 보고 너는 끝장이라고 큰 소리를 치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셨는데,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로 끝이 아니고 우리 부활의 근거도 된다. 그래서 ‘첫 열매’라 한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고, 우리는 두 번째 세 번째 부활의 열매 열 번째 백 번째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한다. 믿으라.

2)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부활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은 ‘이제가면 언제 오나 어~이야 에야~ 북망산천 머다더니 내집 앞이 북망산이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진다 서러마라 명년삼월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라’ 슬피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같은 죽음 앞에서 부르는 노래가 전혀 다르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보자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여러분 얼마나 다른가? 우리에게 죽음은 만남의 약속이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불과하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이 그랬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 궁전 문을 여는 열쇠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신 말씀 들어 보셨는가? ‘여러분! 어느 날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 뿐입니다’. 그렇다. 성도에게 죽음은 다만 주소를 옮긴 것뿐이다.

신자는 죽음을 더 이상 절망으로 여기지 않는다. 허무하게 생각지도 않는다. 저주로는 더더욱 생각지 않는다. 예수님 부활 권세로 우리도 부활할 줄 알기에 성도는 죽음조차도 복으로 여긴다. 죽음으로 이 땅의 생애는 종지부를 찍지만, 우리 존재의 마침표는 결코 아니다.

그래서 성도는 땅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죽는 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고, 장차 우리도 부활할 소망을 굳게 한다. 하늘 소망이라는 찬양 아시죠?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난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진대 나도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줄 알고, 오늘 아직 이 땅을 살지만 저 하늘을 기대어 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3.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시니 부활했지만, 우리네 연약한 인생이 어떻게 다시 사나 그런 의심을 못하도록 많은 증거를 주셨다. 본문 히11:35 보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①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②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을 잘 보시면 두 종류의 부활이 나온다. 첫째는 어떤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았다 할 때의 부활이고, 둘째는 또 어떤 사람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할 때의 부활이다. 앞의 ‘부활’은 뭐며 뒤의 ‘더 좋은 부활’은 또 뭔가? 이 둘은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1) 먼저 앞의 ‘부활’은 엄밀히는 온전한 부활이 아니라 ‘임시적인 부활’이다. 어떤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았다 하는데, 이 여자들은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의 한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수넴의 한 여인이다.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와 엘리사 시대 수넴 여인의 공통점이 뭔가? 두 여인 모두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믿음으로 잘 섬기고 살다가, 어느 날 두 여인 모두 하나 뿐인 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는 기막힌 아픔을 겪는다. 그런데 두 여인 모두 아들이 죽었을 때 믿음으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찾았고, 그 결과 두 여인 모두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누렸다. 이 두 여인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여자들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라고 하는 거다.

왕국 시대의 이 두 여인만 아니라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들이 더 있다. 우리 주님도 나사로는 비롯해서 죽은 자를 셋이나 다시 살려 주셨다. 베드로도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여인 도르가를 기도로 다시 살게 하였다. 바울도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서 죽었는데 기도로 다시 그 숨이 돌아오는 표적을 나타냈다. 또 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무덤이 열리면서 성도들의 시신이 많이 일어나 무덤에서 나와 주님 십자가 죽음이 온 세상을 죽음에서 구할 특별한 죽음임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이렇듯이 분명히 죽어다가 다시 살아난 표적이 성경에는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가리켜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았다’고 하시는 거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온전한 부활은 아니다. 저들은 다시 살아났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온전한 부활이 아닌 거다. 다만 우리네 인생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에는 충분한 부활이다. 그래서 이 부활은 ‘임시적인 부활’이요 ‘증거로서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신구약의 인물들은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다시 산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다시 살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부활사건인 것이다.

2) 하나님 아들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도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증거하는 사람은 또 있다. 모세와 엘리야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얼마 전에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가셨다. 기도하시던 중에 홀연히 주님의 얼굴과 옷이 너무나 희고 영광스럽게 변화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수천 년 전에 이 땅을 살다 이미 죽은 모세, 그리고 죽음을 보지 않고 신령한 바람을 타고 하늘에 승천했던 엘리야가 나타났다. 뭔가? 수천 년 전에 이 땅을 살다 이 땅을 떠난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지금도 분명히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렇듯이 죽었다가 살아난 ‘증거로서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나, 변화산에서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장차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히11:35을 좀 더 보자. 임시적인 부활 증거로서의 부활과 구별하여 또 하나의 부활이 나온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렇다. 여러분! ‘더 좋은 부활’ 이 있다. 임시적인 부활은 살아났지만 다시 죽는다. 그러나 ‘더 좋은 부활’은 또다시 죽는 일이 없다. ‘더 좋은 부활’은 다시 죽지 않을 부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부활, 주님과 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또 임시적인 증거로서의 여러 부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더 좋은 부활’에 눈을 뜨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시고 이루어주실 ‘더 좋은 부활’이 있음을 소망하고 믿으시기 바란다.

본문 v.35b-38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씀한다. v.35b이다.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핍박의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잡혀 고문 받을 때 ‘나는 하나님 모른다’ 한 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 지키려하지 않았다. ‘더 좋은 부활’이 저들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 선배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도 다 그랬다.

v.36-37은 뭐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물론 이 말은 예수 믿으면 다 이렇게 쫓겨 다니고 돌에 맞아 죽고 감옥 간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핍박의 시대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럴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참 편하게 예수 믿지만, 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의 나라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오늘도 극심한 핍박과 고문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다. 우리도 환난의 시대가 오면 이런 일도 각오를 해야 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믿음을 지키는가? 우리는 ‘더 좋은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는 이 땅의 생명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다. 더 좋은 부활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깝지 않고 포기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을 v.38에서 뭐라 하는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렇다. 세상이 그 무엇을 가지고 핍박해도, 그 무엇을 가지고 유혹해도 ‘더 좋은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는 v.38은 조금 다르게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들에게 세상은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 ‘더 좋은 부활’을 약속받은 성도에게 사실 세상은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 ‘더 좋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내가 꼭 지켜야하는 보물이 세상에 없는 거다. ‘더 좋은 부활’ 만이 내 목숨을 바꾸어서라도 지켜야하는 유일한 보배인 것이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부활하셨다. 사망 권세 이기고 부활하셨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는 ‘더 좋은 부활’의 소망이 생겼다. ‘더 좋은 부활’의 소망 안에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세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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