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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Apr 09, 2015
  • 140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5-46, 15-4십자가묵상예배(265)

서론. 이 시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기념하여 예배하고자 모였다. 온전한 감사의 제사가 드려지고 우리 하나님 기뻐 받아주시는 예배되기를 소원한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 시간으로 제3시,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3시간 정도가 지나 제6시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 즈음에 해가 빛을 잃어 제9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경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더듬을만한 깊은 어둠이 임했다. 그리고 제9시 곧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주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는 마지막 기도를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하셨던 거룩한 말씀들 가운데 성경은 일곱 마디를 기록해 놓았다. 십자가의 일곱 마디 주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도리와 구원받은 하늘 백성의 삶의 도리를 잘 깨우쳐 주는 보배 같은 말씀들인데, 해마다 십자가묵상예배 시간에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는 기도이셨다.

두 번째 말씀은 긍휼을 구하는 한 강도에게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세 번째 말씀이 뭔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셨다. 사랑하던 제자 요한을 보고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2. 이렇게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한 강도를 돌아보시며, 어머니와 제자를 생각하는 사랑의 권면을 하는 가운데 여섯 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래서 제9시 곧 오후3시경에 주님은 큰 소리로 네 번째 말씀을 하신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주님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하늘 아버지를 원망하신 것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주님께서 하늘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원망하실 리는 없다. 십자가를 인해 주님 마음에 한 올이라도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끝까지 이 잔을 옮겨주셔야만 한다고 했을 거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을 거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로 나아가신 것은 한 치의 원망도 없이 십자가를 감당할 신령한 힘을 얻으셨기 때문이었다.

1) 이 기도가 조금도 원망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러면 이 기도는 도대체 어떤 기도인가?

겉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신 주님의 기도는 사실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과 멸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소망 신뢰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기도이셨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극심한 고통에 던져지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싹트기 쉽다. 욥의 아내가 그랬다. 욥과 더불어 하나님 주신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았다. 그랬기에 욥기 1장에서 모든 소유를 다 잃는 시험을 당할 때까지만 해도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욥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욥기 2장에 가서 거기에 더하여 욥의 온 몸에 성한 곳이 없이 종기가 날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면서 거친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다.

어떤 의미에서 욥의 아내가 1장의 시험에서 무너지지 않은 것만 해도 사실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비교해보라.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직접 경험했는가? 유월절날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는데 자기들의 집안은 평안함을 누렸다. 홍해 바닷물이 벽처럼 서고 바다 가운데 열려진 길을 통해 애굽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은 후 마실 물을 찾지 못할 때 저들의 입에서는 거친 원망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지 않는가? 조금만 불편하고 조금만 배고프고 조금만 아프고 괴로우면 원망을 밥 먹듯 하는 것이 간사한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진 그 십자가 위에서도 조금도 원망함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기도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 그러면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기도가 원망이 아니라 도리어 온전한 믿음과 신뢰의 기도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주님이 드린 이 기도가 시편 22편을 인용하여 드린 기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하는 탄식으로 시작되는 시편22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보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시인이 마치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를 눈으로 보고 있는 듯이 주님이 당한 고통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렇게 구체적인 고통을 토로한 이후에 시편22편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간구로 나아간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원하소서(19-20절)’.

그것만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게 구원을 간구한 이후에 시편22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아직 고통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진 것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4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확고하든지, 앞으로 들어주실 것이다가 아니고 이미 들어주신 것처럼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지 않으실 줄 확신하고 있다.

그것만 아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고백한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신실하게 들어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 은혜를 여러 형제들에게 전하겠다 한다. 그래서 자기만 아니라 누구든지 주의 은혜를 바라고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에게서 은혜를 덧입어 찬송하게 될 것이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너희들도 다 가지라고 그렇게 권면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확신의 기도와 결단이 아직 고통 중에 있는 때에 행하여졌다. 아직 시인은 고통 가운데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고통 중에 있다.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반드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지금 현재 고통 중에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로 그런 신뢰와 믿음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주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다 받아 짐승처럼 조롱받고 벌레처럼 고통받고 계시지만,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건져주실 줄을 믿는 믿음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하고 역설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 현재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심히 큰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건져주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의 기도가 이 네 번째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기도인 것이다.

3) 그러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십자가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도 하나님의 전대적인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때로 어떤 고통과 시험과 환난의 날이 와도 결단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은혜의 하나님이 임하실 것이다. 마침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마침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사실 다소 부족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욥이 그 모진 시험을 이긴 것도 이런 믿음 때문이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욥16:20)’. 그렇다. 극심한 재앙을 만난 욥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고 아내도 저주하고 친구마저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욥이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단 한 가지 끈이 무엇이었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하며 하나님을 붙들었던 욥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2. 이처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신 기도는 처절한 십자가에서도 주님이 붙들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둘째로는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죄로 인해 쏟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고통의 깊이를 보여준다.

1) 여러분! 주님이 지금 왜 십자가에서 이 고통을 당하고 계신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은 지금 온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 십자가 위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인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온 몸과 영혼으로 받고 계신다. 합1:13을 보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하신다.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다. 그래서 온 세상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신 아들 예수님께 모든 진노를 쏟아 붓고 계신 것이다.

2) 이렇게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이 지신 십자가는 온 세상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은 사실 세상의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될 수가 없는 고통이었다.

주님이 겪으신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가? 먼저 극심한 육체의 고통이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서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양손은 큰 못으로 박혀 있어서 살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어그러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온 몸은 채찍을 맞았지만 전혀 싸맴을 받지 못하여서 고통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다.

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마음의 고통이셨다. 십자가를 지실 때 무리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것을 부인하면서 마음껏 조롱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심지어 주님 좌우에 달린 행악자들까지도 머리를 흔들면서 모욕하기를 ‘너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였다. 오죽 했으면 시편 22편은 주님의 고난을 예언하면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하였겠는가?

그것만 아니다. 온 몸을 지어 짜는 육체의 고통과 차마 사람이라 할 수가 없는 멸시보다 더 주님을 아프게 한 것은 영적 고통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엄청난 육적인 고통과 멸시 조롱에 대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무 언급을 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통을 다 모아서 한 마디로 하신 절규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이다. 지금 주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그러기에 이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죄인으로 취급을 받으신다. 그래서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이 조롱한 것처럼 얼마든지 하늘 아버지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그러시지를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는 철저히 세상 죄를 짊어지신 죄인이기 때문이다. 세상 죄를 담당한 죄인으로 죄 값을 지불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 죄를 짊어진 죄인이기에 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 적이 없었던 성부 하나님과 사이에 단절을 경험하신다. 죄의 중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버리시는 영적 고통을 당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이 당한 이 영적 고통의 깊이는 사실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보다는 죄와 짝하고 살 때가 많아서, 세상 것을 잃을 때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질 때는 고통을 깊이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하나됨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고통보다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임을 안다.

이렇게 영적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사실 십자가에서의 육적인 고통과 멸시와 조롱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도 엄청났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를 않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이 고통을 장차 죄사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신령한 은혜와 축복이 단절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하신 주님의 기도를 들으면서, 아직 하나님 모르는 영혼들에게 복음 전할 거룩한 사명감을 일깨워야 한다.

3. 오늘 세 번째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 대신 세상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산 소망의 문을 여셨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기도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주님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게 된 것이다.

계6:15-17을 같이 읽자.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함께 읽은 계6장의 이 말씀은 여섯 번째 인재앙에 대한 말씀인데, 그 내용은 최후 심판 날이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것이다.

주님이 오시고 최후 심판 날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세상에서 큰 소리 치고 살았던 임금이나 왕족 장군 부자와 같은 자들은 물론이고, 또 세상에서 종으로 살았던 자들까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숨을 곳을 찾고 있다. 왜 저들이 숨을 곳을 찾는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 살 동안에는 자기들이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인 줄을 몰랐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자기의 죄를 알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런 죄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 머리 위해 쏟아 부어질 줄을 또 알게 되었다. 자기 죄를 알게 되고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되니까 얼마나 두려운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높은 산과 저 단단한 바위가 내 위에 무너져서 거기 깔려 죽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다.

이렇게 계6장은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v.17에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다시 같이 읽자.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모든 인생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를 때 놀랍게도 그 앞에 서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서는 자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오히려 영광으로 인도되는 복된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누가 능히 서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계시록 7장에 나온다. 계7:14을 같이 읽자.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서는 자는) ①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②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렇다. 여러분! 진노의 날에 두려움 없이 설 자는 갈보리 언덕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다. 하나님 아들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아 주신 것을 믿는 사람이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에게 외면당하고 버림을 받으시면서 까지 그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 위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함이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니까’ 하신 주님 기도는 우리를 영원한 진노에서 건지시는 메시야의 간구이셨던 것이다.

찬송가 265장에 뭐라 하는가?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 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 가리라’. 오늘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은 주님의 십자가 고통이 나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고통임을 믿어서, 진노의 날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기를 축원한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기도하신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씻고 하나님의 진노를 이기게 하는 십자가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고통의 절정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다.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때로 하나님이 내 기도 듣지 않는 것 같고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 날에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를 향한 변함없는 믿음과 신뢰로 기도하신 주님을 본받아서, 인생의 어두운 시간도 하나님 향한 믿음의 기도로 이겨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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