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사도신경강해11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몬1:6-7, 14-3주일오전
서론. 오늘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기쁨이 충만케 하시기를 소원한다. 사도신경 강해 11번째다.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는 고백을 살핀다.
어떤 목사님이 성도의 교제에 대한 설교제목을 ‘식사만 같이해도 신앙이 자랍니다’하고 붙인 것을 보았다. 그렇다. 성도는 함께 모여 교제함으로 많은 영적 유익을 얻게 된다. 어떤 분은 성도의 교제는 예배와 더불어서 신앙생활의 두 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보았다. 수레가 잘 굴러가려면 좌우의 두 바퀴가 다 잘 돌아야 하듯이,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우리 영혼의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다는 거다.
오늘 말씀 몬1:6에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게 하느니라’ 하신다. ‘믿음의 교제’ 그랬다. 성도의 교제는 믿음으로 한다는 뜻도 되고, 참된 믿음은 우리 성도들을 교제하는 자리로 이끈다는 의미도 된다. 구원을 얻게 하는 참 믿음은 위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순종하게 하고, 아래로는 같은 믿음을 가진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케 하는 거다.
‘성도의 교제’ 그러면 대개 믿는 성도들 사이의 교제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을 유심히 보면 성도의 교제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교제다. 둘째는 우리 신자와 주님의 교제다. 그리고 셋째가 신자들 간의 교제다.
1. 오늘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교제부터 살핀다.
성부 성자 성령 우리 성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온전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신다. 요17:5이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21도 본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그렇다. 성부 성자 성령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 전 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온전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셨다. 서로 다른 분이면서도 하나가 되시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는 그런 교제를 나누시고 계신다.
이렇게 온전히 하나되는 교제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전적으로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신다.
요3:35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요5:20도 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님 곧 예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시므로 모든 것을 다 맡기시고 모든 것을 다 보여주셨다. 온전히 하나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무슨 감추인 비밀이나 불신이 전혀 없다.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의 성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요5:19이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행하느니라’. 빌2:8도 본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도 본래 성부 하나님과 근본 동등이신 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주님은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일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 외에는 자기 뜻대로 아무 것도 하지지 않으셨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이처럼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사 다 맡기시고 다 보여주시고, 성자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사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온전한 사랑의 관계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시고 온전히 하나되시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교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온전한 사랑의 교제는 성도의 교제의 근거이면서 모델도 된다 할 수 있는 거다.
2. 성도의 교제 두 번째 차원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이다. 주님과의 교제다.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부르시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천국 기업을 주시려는 목적도 있고, 우리가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시려는 뜻도 있다. 또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주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섬기게 하시려는 뜻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부르신 목적의 가장 기초가 되는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막3:14이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주님이 제자들을 택해 세운 첫 번째 목적이 다름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랬다.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게 하시려 부르신 거다. 이것은 열 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다. 고전1:9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게 하신 첫 번째 일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는 일이다. 신자는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주님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준다. 마음의 평안과 안식 위로를 준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인 시4:7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세상 사람들은 곡간에 곡식이 풍성하고 새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으면 행복하다 할 지 몰라도, 우리 신자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 신자는 거듭난 새생명이 그 영혼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이 있어야 사는 존재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찬양한다. 주께서 마음에 주시는 신령한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하다고 기뻐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하는 거다.
뿐만 아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우리 신자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느8:10이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그렇다. 주 하나님과 교제함에서 오는 신령한 기쁨은 우리로 죄를 이기게 하는 힘이 된다. 순종하게 하는 힘이 되고,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신자의 힘이다.
‘온 맘 다해’라는 찬양을 보면 주님과 교제하는 행복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나이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것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 다해’.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단 하루도 주님과의 교제를 놓지지 말라. 계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보라.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여 주님이 토하고 싶다고 책망한다. 영적으로 가난하고 곤고하고 벌거벗었다고 하신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계3:20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 영접하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믿는 신자들 중에 주님과 교제함이 없이 사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교제하며 살지를 않고, 늘 내 마음 문 밖에 세워두고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완전히 내 인생의 집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아예 보내 버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내 마음 내 인생 중심에 들어오시도록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문 밖에 서 계시게 하는 거다. 그 결과가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영적으로 눈이 어둡고 벌거벗은 것 같이 된 거다. 그래서 지금 주님이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고 계신데, 문 밖에 계속 세워두지 말고 주님을 마음 주임에 내 인생 중심에 모셔 들여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교제를 나누라 하시는 거다.
주님과 교제할 때 우리 가슴은 뜨겁고 우리 머리는 말씀으로 냉철해지는 신앙을 회복할 거다. 주님과 교제할 때 영적으로 부요해지고 벌거벗지 않고 의의 옷을 입게 되는 거다. 주님과의 교제는 신령한 기쁨과 힘의 원천이라 그 말이다.
삼상30:6이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있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때문에 블레셋 땅에 도피생활 하던 때 있었던 일이다. 블레셋 왕 아기스의 요청대로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도 전쟁에 나서는데, 그 틈을 타서 아말렉이 기습을 해서 모든 재산은 물론이고 처자까지 다 잡아가 버렸다. 그 형편을 보고 다윗과 함께하던 백성들 중에는 분에 차서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까지 하는 형국에 몰렸다. 다윗의 마음이 심히 다급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하는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있고 용기를 얻었더라.’ 여러분! 우리 인생도 별 수 없다. 살다보면 심히 다급하고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운 처지에 놓일 때가 있다. 바로 그때 내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내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힘을 얻고 용기를 얻는 이런 은혜가 여러분 인생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3.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교제, 신자와 주님과의 교제에 이어 세 번째 성도의 교제는 우리 성도들 사이의 교제이다.
성공회에 소속 토레이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한국 기독교가 실수한 것이 하나 있는데, 교회를 가르칠 교(敎)자를 쓰서 敎會라고 한 것이라 한다. 사귈 교(交)자를 쓰서 交會라고 했어야 맞다는 거다. 이 말이 맞다 안 맞다 제가 판단할 수는 없는데, 일리는 있는 말씀이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됨의 선택이나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필수요 본질인 것이다.
‘성도의 교제’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첫째는 성도는 어떻게 교제를 나누는가하는 문제고 둘째는 성도의 교제가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거다.
1) 성도는 어떻게 교제를 나누는가? 행2:42-47은 성도의 교제가 지향해야할 어떤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읽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여기 보면 성도가 무엇으로 교제하는지 잘 나와 있다. ① 저들은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침 받는 것이 성도의 교제의 시작이요 핵심이다. 우리 성도가 교제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어떤 뜻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침 받음으로 성도의 교제는 이루어져야 한다.
② 그런데 성도의 교제는 절대로 말씀을 배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만약 그러면 교회로 모일 필요가 없고 성경을 가르치는 학원을 하면 된다. 교회는 성경 가르치는 학원과 다르다. 그래서 두 번째 성도의 교제는 사랑으로 떡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 놀랍게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는 이 말씀에서 제일 많이 쓰인 단어가 ‘떡’과 ‘음식’이다. 다른 교제의 수단들은 한 번씩만 언급되는데 비해, 떡과 음식은 무려 세 번이나 언급된다. 여러분!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하고는 음식을 잘 안 먹지 않는가? 함께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는 것은 친밀함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함께 먹음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제가 울산교회 6년 있으면서 많은 설교를 했고 성경도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가끔씩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교제가 이어지는 성도는 저한테 성경을 배웠을 뿐 아니라, 종종 저랑 같이 식사를 했던 성도들이다. 우리는 가족을 ‘食口’ 혹은 ‘食率’이라 부르지 않는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중요한 성도의 교제다. 여러분! 구역과 기관에서 자주 식사의 교제를 나누라. 또 식사 대접하는 것을 즐기라. 너무 비싼 것 말고, 부담 없을 정도로 서로 대접하라.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같이 식사하면서 신앙이 자라는 거다.
③ 세 번째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서로 나눔으로 교제했다. 그래서 물건들을 서로 통용하고,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모든 소유를 똑 같이 나누는 완전한 공산사회를 이루었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다른 서신서들과 이후 사도행전 역사를 보면 교회 안에도 비교적 여유 있는 성도도 있고 가나난 성도도 있었다. 완전한 공산사회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령충만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함께 받아먹는 자들로 육신의 필요한 것도 함께 나누기를 정말로 힘썼다. 같은 교회 안에서 나누기를 힘쓴 것은 물론이고, 후에는 개교회를 넘어 이방인 교회들이 흉년으로 어려움 당하는 유대의 교회들을 위해 부조를 보내고 나누는 것을 보게 된다. ‘나눔’은 성도의 교제의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계속 우리는 고민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서로 기쁨으로 나누고, 우리 교회가 또 더 많은 것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위해 나누는 교회가 될까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다가오는 고난주간 전후해서 해마다 해 온 대로 한끼금식헌금을 통해서는 어려운 농어촌교회를 돕고, 사랑의 빵 저금통을 통해서는 또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고, 거기에 교회 경상비 일부도 나누는 일에 함께 썼으면 한다. 성도의 교제에는 나눔이 있다.
④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성도의 교제는 모임이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였고, 또 집에서도 모였다 그랬다. 성전에서도 집에서도 저들은 서로 모이는 것을 즐거워했고 또 많이 애를 썼다. 저들은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했겠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더 많이는 모여서 기도했다. 모여서 찬송했다. 모여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사도행전은 별명이 많은 성경이다. 어떤 분은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분은 ‘기도행전’ 그렇게도 부른다. 또 어떤 분은 ‘전도행전’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사도행전은 ‘모임행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모일 때 성령충만을 받았고, 모여서 기도했고, 모임을 통해서 전도할 힘을 얻었고,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역사를 함께 이루어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모여 교제하기를 힘써야 한다.
2) 그러면 성도의 교제가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성도의 교제가 주는 유익은 수도 없이 많지만, 오늘은 대표적인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① 다시 오늘 본문 몬1:6-7을 보자. ‘네 믿음의 교제가 ① 우리 가운데 선을 알게 하고 ②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게 하느니라 형제여 ③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v.6은 믿음의 교제라고 하고 v.7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같은 거다. 믿음의 교제는 당연히 사랑으로 되는 거다. 그런데 믿음의 교제가 무슨 유익을 가져 왔는가? 3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선을 알게 했다 한다. 믿음의 교제가 선을 알게 하다니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교제하면서 서로 선한 일에 힘쓰게 되었다는 말이다. 성도들이 참된 믿음의 교제를 나누면 선한 일에 서로 도전받게 한다. 간혹 혼자서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나름대로 선한 일에 힘쓰고 사는 분들이 계실 줄 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를 나누다보면, 함께 행할 선한 일들이 눈에 보이고, 그래서 서로 격려하면서 선한 일을 이루어갈 수 있다. ‘선을 알게 하고’. 둘째 믿음의 교제가 또 그리스도에게 자라게 한다 했다. 그렇다. 성도들이 만나 말씀과 성령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다보면, 우리 마음이 점점 예수님께 가까워진다. 우리 삶도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간다. 믿음의 교제는 우리 마음과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준다. 셋째 믿음의 교제를 통해 평안함과 기쁨 위로를 받았다 하신다. 그렇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 정말 우리 마음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위로받을 때가 어디 있는가? 믿음의 공동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위로와 기쁨 평안을 얻게 되는 거다.
② 성도의 교제가 주는 유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히3:13을 보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여러분! 하나님 없는 세상에 한 주일 살다보면 죄의 유혹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보다는 직장생활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더 잘 아시지 않는가? 그것만 아니라 연약하고 부패한 우리의 본성 또한 끝없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라고 우리 마음을 유혹하지 않는가?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매일 서로 피차 권면함으로 소극적으로는 죄의 유혹으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드러운 마음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라고 권면하는 거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없는 삶과 죄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
창38장을 보면 야곱의 아들 중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서 이방 아둘람에 가서 산다. 요셉을 죽이는 일을 반대했던 유다는 아마도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고 형제들이 작당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동생인 요셉을 팔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떠나기로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가 형제들을 떠난 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믿음의 공동체를 더난 유다는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다의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인 엘과 오난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 죽임을 당한다. 게다가 유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큰 며느리 다말에게 거짓말을 하고서는 도리어 다말에게 속는 일까지 겪게 된다. 뭔가?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가 없다. 좀 부조함이 있어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조금씩 자라가게 되고 또 죄의 유혹을 이기는 힘도 얻게 되는 것이다.
결론. 잠27:17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고 했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통해 우리 믿음이 자라고,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가 같은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풍성한 우리 교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