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사도신경강해8
다시 오실 예수님 계22:20, 14-3주일오전(주님고대가)
서론. 좋으신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풍성한 복과 은혜 베푸시기를 축원한다.
1. 오늘까지 해서 6주 동안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총 여섯 가지 신앙고백을 살피게 된다. ‘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②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③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며 ④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⑥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중에 첫 번째 고백은 전체 요약이다. 예수님은 메시아요 주님이시라는 거다.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과거의 사역이다. 이미 이루신 사역이다.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까지 고백한다.
다섯 번째는 주님의 현재 사역이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위해 대언하시고 성령을 보내신다.
이제 오늘 살필 여섯 번째 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고백인데, 우리의 주요 메시아 되신 주님의 마지막 사역이다. 시간적으로 미래에 있을 일이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오늘 살필 내용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중요이지만,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에 특별히 더 절실하다 생각된다. 최근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이 예수님 재림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교묘하게 속여 미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만 우리 성도들이 잘 이해하셔도 대부분의 이단을 분별해 낼 수 있을 줄 안다.
오늘 주님 재림과 관련해서 네 가지 내용을 살핀다. ① 첫째 재림의 모습이다. ② 둘째 재림의 시기다. ③ 셋째 재림의 목적이다. ④ 넷째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다.
2. 먼저 주님 재림의 모습이다. 계1:7을 보자.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행1:11도 본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1) 주님의 재림은 먼저 하늘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오신다. 부활하신 몸을 그대로 입고 오신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많은 이단들은 예수님이 이미 재림했다고 거짓말 한다. 신천지 이만희를 비롯해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속이는 자들이 많다. 어떻게 당신이 재림주냐 그러면, 예수님이 영으로 자기에게 재림 하셨다는 거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비스러운 분이셔서 더 이상 육신의 몸을 입고 재림하시는 게 아니고 영적으로 재림하신다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다.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신다. 하늘로 오르신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신다. 더 이상 예수님은 비밀스럽게 세상에 오시지 않는다. 주님이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구주가 오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명의 주님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영생에 목말라 하던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상황이 그렇지 않다. 계1:7이 분명히 말씀하죠?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산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주 되심을 거역하고 끝까지 불신하던 원수들도 다 보게 된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을 보면서, 모든 원수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신 줄 깨닫고 그제야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할 것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오신다.
3) 세 번째로 예수님은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오신다. 계1:8에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한다. 손오공도 아니신데 주님이 구름을 타셔야 오실 수 있으신가? 그래서 여기 주님이 타고 오신다는 구름은 그냥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아니다. 신령한 구름, 곧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다. 그래서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영광 가운데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직접 보지를 못했지만, 주님이 승천하신 모습도 심히 영광스러우셨다. 다시 오시는 모습 역시 그 영광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다시 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쳐다보는 그 순간, 이 땅에서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던 모든 일이 너무나 감사하고 가슴 터질 듯 벅찰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저렇게 영광스러운 분을 위해서 일하였구나, 내 선택이 정말로 맞았구나 하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은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오신다.
주님은 놀라운 영광만 아니라 세상을 압도하는 위엄 가운데 오신다. 살전4:16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여러분! 그 날을 마음속으로 한 번 그려 보라. 찬란한 영광 가운데 주님께서 하늘의 모든 천군천사를 좌우에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다. 그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떻겠는가? 이유는 다르겠지만 모든 인생이 그 위엄 앞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엎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감격해서 엎드리고, 거역하던 이들은 두려워서 엎드릴 것이다. 영광과 위엄 가운데 주님은 다시 오신다.
여러분! 기대되지 않는가? 기쁘지 않으신가? 저는 주님의 재림만 생각하면 신이 난다. 어렵고 힘들고 지치다가도 주님 재림의 영광을 생각하면 다시 용기가 난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감사가 샘솟는다. 영광의 주님 다시 오신다.
2. 오늘 둘째로 생각할 것은 주님 재림의 시기다. 언제 오시느냐는 거다.
주님이 다시 오실 줄 믿는 사람은 언제 오실까 하는 것에 자연스레 관심과 질문이 생긴다. 제자들도 그랬다. 주님이 승천하시는 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듣고서는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하고 물었다. 주님이 뭐라 하셨는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그렇다. 주님 재림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권한 아래 있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알려주시지 않으신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일로 두셨다. 마24:36도 본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리라(마24:36)’.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우리보다는 영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탁월한 천사들도 모른다. 심지어 아들도 모른다 하셨다. 이것은 참 신비한 말씀이다. 여러분! 아들 예수님이 모르시는 게 있으신가? 그런데 분명히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러분! 천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들도 모른다 하셨는데, 누가 안다는 말인가? 재림의 시기는 그야말로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주님은 수차례 반복해서 도둑같이 오시리라 하셨다. 도둑이 아무 예고 없이 그리고 아무도 생각지 않은 때에 오듯이, 주님도 그렇게 오신다. 계16:15이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이처럼 주님은 생각지 못한 때에 불현 듯 오실 것인데, 그렇다고 주님의 오심이 모든 사람에게 당황스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히 놀라고 당황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 누가 당황스럽지 않는가? 주님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살전5:4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5:4)’.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말씀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거짓으로 예언할 때 근거 구절로 사용한 말씀 중의 하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도둑같이 몰래 오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둑같이 오시지 않는다고 했지 않느냐 하면서, 영적으로 정말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히 재림의 날을 알려 주신다는 거다. 여러분! 이게 그런 뜻인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살전5:4에서 우리 성도는 주님을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재림의 날짜를 알기 때문이 아니고,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이 열 처녀 비유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가 생각보다 신랑이 더디 옴으로 잠이 든다. 갑자기 신랑이 왔다는 전갈이 온다. 그런데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다. 왜 그런가?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 줄 알았고 다섯 처녀는 몰라서인가? 열 처녀가 다 신랑이 언제 올 줄 몰랐다. 다만 다섯 처녀는 슬기로워서 신랑을 맞기 위해 등에 기름을 미리 준비해 놓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서야 급하게 기름을 준비하러 가다가 그만 문이 닫혀 버렸다. 모든 인생이 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 줄 모르지만, 맞이할 준비가 된 사람은 주님 오심이 전혀 당황스럽고 두려운 일이 아닌 거다.
주님 재림의 시기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기간이 생각보다 길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열 처녀 비유에서도 ‘더디 오므로’ 하신다. 그런데 이 ‘더니 오므로’하는 표현이 우리 믿음의 참과 거짓을 시험하는 좋은 시금석이 된다. 주님이 생각보다 더디 오시는 것에 대해 잘못된 반응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불신자의 반응이고 또 하나는 신자인 줄 알았는데 참 믿음이 없는 거짓 신자의 반응이다. ① 먼저 불신자들은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이 2,000년이 지났는데도 오시기는커녕 아무 오실 징조 하나 없다고 아예 무시한다. 벧후3:3-4이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세상은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똑 같이 역사는 흘러왔고 앞으로도 흘러갈 뿐인데, 종말은 무슨 종말이며 예수 재림은 무슨 예수 재림이냐 웃기지 마라 그러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 재림을 증거하며 최후심판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 복음에 대해 콧방귀를 낀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태도는 언젠가 정말 큰 코 다친다. 베드로 사도의 답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여러분! 주의 재림은 그렇게 더디지 않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 얻게 하시려고 좀 더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게다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 달라서 천년이 하루 같으시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하나님의 명만 떨어지면 우리 주님은 언제든지 오신다. ② 재림이 생각보다 더딘 것 같은 일은 불신자에게만 낭패가 아니고, 잘못된 믿음을 가진 거짓 신자에게도 낭패가 된다. 마24:48-51이다. ‘만일 그 악한 종이 ....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4:48-51)’. 여러분! 여기 ‘악한 종’은 불신자가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삶은 전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안 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동료들 곧 다른 참 신자를 괴롭히고, 교회 밖으로는 믿음 없는 세상 사람과 어울리면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산다. 그렇게 아무 준비 없이 살다가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해진다. 외식하는 자가 뭔가? 위선이라는 말 아닌가? 겉으로는 신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말이다. 무늬는 하나님의 종인 줄 알았는데 실제는 아니었다. 거짓 신자요 거짓 사역자다.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준비 없이 살다가는 그야말로 낭패를 당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한편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주님이 이미 왔다고 혹은 언제 온다고 속이는 말을 조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깨어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한다.
3. 오늘 셋째로 생각할 것은 재림의 목적이다. 사도신경은 재림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주님은 심판하러 오신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심판을 받는다. 주님 오실 때 이 땅에 살아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주님 오시기 전에 죽어 이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일어나서 심판을 받는다.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을 심판하지는 않는다. 과거 역사를 보면 간혹 부관참시라고 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분풀이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서 심판을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심판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는 날에는 죽었던 모든 자들도 다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가 일생 어떻게 살았는지 고하고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
계20:12-13 보겠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 뭐라 하시는가?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 있다. 큰 자든 작은 자든, 세상에서 권세를 누렸던 아니든 모든 죽었던 자들이 다 심판대 앞에 선다. 죽었던 자들이 어떻게 심판대 앞에 서는가? 심판의 날이 되면 바다는 바다대로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 놓고, 사망과 음부는 사망과 음부대로 또 죽은 자들을 내어 놓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죽었든지 간에 심판 날에는 다 일으킴을 받아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롬14:11-12도 보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으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여러분! 그렇다. 그 날 우리는 심판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서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 직고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허위 고백 거짓 자백들이 난무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서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 심판의 결과 모든 인생은 두 길로 나뉠 것이다. 한 부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한 부류는 ‘어린양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한다. 약2:12이다. ‘너희는 ...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왜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이 합당한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청지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지기지 주인이 아니다. 청지기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청지기 정신이 있다고 작년에 한 번 말씀드렸다. 기억하시는가? 3가지다. 여러분! 청지기 정신을 평생 잊지 말라. 아침마다 이 세 가지를 외치고 시작하라. 우리는 청지기다. 같이 외우자. ① 첫째, 내 인생에 주인이 있다. ② 둘째, 주인이 맡기신 일이 있다. ③ 셋째 주인이 결산할 때가 있다.
3. 오늘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합당한 자세다.
1) 첫째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해야 한다. 계22:20은 v.21의 축복을 제외하면 성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이 속히 오리라 하시니까 사도 요한이 뭐라 했죠? ‘아멘’ 그랬다. ‘예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처럼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사모하라.
2) 둘째 히10:25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유유상종이라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생각이 그리로 이끌리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자꾸 어울리고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 생각이 계속 하나님 나라로 향해야 한다.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서로를 권해야 한다.
3) 셋째 벧후3:11이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우리가 주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시한부종말론을 믿는 자들처럼 모든 일을 손에서 다 놓고 그저 세상 끝날 만 생각하고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태도는 우리의 행실을 거룩하게 하는 거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섬기기를 즐겨하면서 거짓이 없는 경건에 힘쓰며 사는 것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결론. 끝으로 눅21:34-36을 같이 읽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 이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여러분! 그 날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덫과 같이 임할 것이다.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세상살이가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덫에 걸려 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