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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r 23, 2014
  • 5072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요7:25-29, 14-2주일오전

서론. 사도신경 강해 네 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특별한 출생에 대한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고백을 살펴보겠다.

사로신경이 분명하게 고백하듯 예수님은 사람에 의해 잉태되지 않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셨다. 그것도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약혼자 요셉은 당연히 마리아가 부정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마리아에게 어떤 해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조용히 파혼하려 하였다. 이런 요셉의 고민을 하나님이 당연히 아셨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 말씀하신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마1:20)’. 처녀인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이 일은 모든 사람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듯 부정한 관계를 통해 된 일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고 전능하신 역사로 말미암았다 하셨다. 하나님의 사자가 친히 밝혀준 예수님 잉태의 이 신비로운 일을 듣고 의로운 사람 요셉은 한편 놀랍고 한편 감사했다. 그래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데려 왔으나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여느 인생들처럼 남편과 아내의 만남으로 잉태되지도 탄생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는가?

1. 먼저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요7:25-29을 살펴보자.

1)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중 2년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일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때를 기준으로 보면 죽으시기 6개월 정도 전이다.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셔서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면서 유대인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이다.

v.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이때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들이 이해하는 율법 해석과 다르고 안식일을 범하며 또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주장한다는 이유로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산헤드린 공회가 공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사람들을 보내서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잡아 죽이기로 결정이 된 마당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모인 가운데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런 장면이 어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해보라. 어떤 죄목이든지 공개수배가 내려진 사람은 어찌하는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은밀한 곳에 자취를 감추고 숨기 마련이다. 그런데 처형하려고 공개수배가 내려진 예수님은 떳떳하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이 너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v.26에 이런 말한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예수를 잡아 죽이도록 누구든지 반드시 신고하라더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데도 왜 당국자들은 잡을 생각도 안 하고 예수님 가르침에 대해선 아무 반론도 못하는가, 그 동안 예수가 전하는 말과 행하는 표적을 보고 당국자들조차 정말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게 돼 버린 것인가 하는 뜻의 말이다.

2) 이처럼 예루살렘 사람 중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면서, 자기들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v.27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당시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 사람들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작은 촌 동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알았다. 이것 때문에 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도 그리스도로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오실 메시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다 알 수는 없지만 오늘 말씀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여느 보통 사람과 똑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고 아무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도록 신비롭게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저 예수는 아버지는 목수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며 심지어 그에게는 동생들도 많이 있는 갈릴리 나사렛의 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저들은 어디서 왔는지를 누구나가 빤히 다 아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고 여긴 거다.

3) 이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v.28-29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①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②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예수님 말씀을 잘 들어 보라. 먼저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하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 곧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맞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들의 말이 맞다고 인정해 주시는가?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바로 예수님은 ‘참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맞다고 인정하신 말씀이었다.

이렇게 당시 유대인들이 육적인 차원에서 알고 경험한 예수님의 모습이 옳다고 인정하신 다음, 계속해서 육신의 눈과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근원에 대해서도 밝히신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고 왔다 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신 거다. 또 예수님은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 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사실도, 예수님을 보낸 성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있었던 거다. 말하자면 당시 유대인들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 출생에 대하여는 알았지만,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출생의 참된 신비와 비밀은 알지 못했던 거다. 만약 이것을 저들이 깨닫고 알았다면, 누구도 의심 없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저들은 세상의 지혜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예수님 출생의 진짜 비밀을 알지 못했다. 육신적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근원은 알았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근원은 몰랐던 거다.

4) 그러면 예수님의 진정한 근원,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근원은 무엇인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근원에 대해 옛 선지자들은 이렇게 예언하였다. 미5:2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은 예수님의 베들레헴에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 사실 미5:2은 예수님이 육적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만 말씀하시는 구절이 아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에 이어, 오실 그 분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다 한다. 상고라는 말은 그 기원을 인간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오랜 옛날이라는 말이지 않는가? 그래서 영원이라는 말과 같은 거다. 베들레헴에 탄생하는 그리스도의 근본은 바로 영원에 있었던 거다.

이사야도 이렇게 예언하였다. 사9:6이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 보면 한 아기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 한다. 아기로 세상에 오시는 것이니까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사람으로 오시는 그 분의 본래의 모습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한다. 그 분은 기묘자이셔서 우리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분이시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히 존재하시는 만유의 창조주 가 되시는 분이라 그랬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으되, 그 근본은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육적인 근원만 보고 단지 사람으로만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참 근본을 살펴보면 그 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오 만물을 있게 하신 창조주시다. 오늘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알고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참된 근본을 밝히심으로 당신은 참사람일 뿐 아니라 참하나님이시므로 당신이 바로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기다려온 메시아요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세상의 구주이심을 밝히 증거하고 계신 거다.

5) 이처럼 예수님은 그 근본이 영원에 있고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는 기묘자이시며 만물과의 관계에서는 전능하신 창조의 아버지가 되시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분이신데, 그런 분이 참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고 또한 참사람도 되신 것을 사도신경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기에 여느 인생들처럼 부부의 만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예수님은 또 참사람이시기에 하늘에서 어느 날 뚝 하고 떨어지신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몸을 통해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셨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의 몸에 나심을 통해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어 죄와는 아무 상관없이 세상에 오셨다. 시편51편에서 다윗이 고백한대로, 모든 인생은 조상들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 아이들 길러보면 가르치지 않아도 타고난 죄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거룩하고 전능하신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나시는 방식을 통해서 어떤 죄의 오염도 없이 세상에 오셨다. 참사람이 되셨으나 아무 죄가 없는 거룩하신 분으로 오신 거다.

그래서 눅1:35에서 말씀하신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여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덮음으로 나실 분이 어떤 분이라 하는가? ‘거룩한 이’라 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이 나셨다.

히4:15에서도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2. 오늘 크게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 되시되 아무 흠 없는 완전한 의인이 되신 사실이 우리에게 왜 그리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시되,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의인이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으시다. 완전한 의인되신 예수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1)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인생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냥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함께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단 1분도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나 우리는 먼지와 같은 존재다. 옛적에 인생의 약함을 깨달은 욥은 ‘흙집에 살고 티끌을 터로 삼고 하루살이에라도 눌려 죽을 자가 인생’이라고 고백했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무한한 간격이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 하였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어떻는가? 주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 하심같이, 우리 마음은 교만 시기 살의 이기심 음란 욕심 거짓 탐욕 미움 등 온갖 죄악이 가득한 죄악 덩어리다. 기독교 복음은 자기 죄를 깨닫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죄악 덩어리인 인생이기에 절대적으로 의로우셔서 한 치의 죄도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는 결코 나아갈 수가 없다. 마치 맨눈으로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우리 눈이 멀어버리듯이, 죄인이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영광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출33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보여 달라고 간구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뭐라 하시는가? 모세의 간구를 그대로 들어줄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간 흔적만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러기에 죄인인 인생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 땅 위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사는 인생이 거룩하신 하나님 계신 영원한 하늘 집에 가려해도 반드시 중보자가 계셔야 한다. 중보자, 곧 하나님과 죄인 양편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요구도 만족시켜 드리고 우리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런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 덩어리인 우리 사이에 서서 그 무한한 간격을 메워주심으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중보자가 계셔야 한다.

2)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사람 중에서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왜 그렇는가? 첫째 인생 가운데는 아무도 죄 없는 자가 없다. 다른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서 그 사람을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죄 문제조차도 어쩌지를 못해서 자신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은 결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중보 할 자격이 없다. 둘째로 우리 인생은 그저 인생일 뿐이므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알지를 못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성이 없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 요구도 어떻게 만족시켜 드려야하는지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중보자도 될 수가 없는 거다.

3) 그러면 누가 이 일을 담당할 것인가? 참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참사람이 되신 분, 그러나 죄는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로 합당하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참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만족시키실 수 있는 신성이 있으시다. 예수님은 또 참하나님이시지만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참사람이시기에 우리네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는 인성도 있으시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는 참사람이 되셨기에 능히 죄인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실 수도 있으시다.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온전한 중보자가 되어 우리 위해 흘리신 속죄의 피를 가지고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능히 이끌어 주실 수가 있으시다.

이 놀라운 진리를 히6:20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참하나님이신데 참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앞서서 영광스러운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혼자서는 절대로 하나님 계신 그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지만, 예수님이 우리 손을 잡아 이끌어주셔서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으로 하늘 길을 여신 것이다. 그렇게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 되사 하늘 길을 활짝 여신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우리가 온전한 중보자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 위에 섬으로 우리 영혼이 아버지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 위해 간구하신다.

이처럼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은 죄인 된 우리를 거룩하신 생명의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온전한 중보사역을 하시기 위함이셨기에 요12:32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신 후에는 우리 영혼을 이끌어 아버지께로 인도하겠노라 하셨다. 요14:6에도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든 짧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머지않다 이 땅을 떠날 것이다. 그 날 여러분은 어떻게 하늘 집에 가실 건가? 무얼 의지하고 아버지께로 가실 건가? 세상 살면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릴 정도의 천인 공로할 죄를 안 지어서 갈 수 있는가? 가끔씩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어서 가겠는가? 아니면 교회생활하면서 직분을 받아 일한 것으로 가는가?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 우리는 오직 완전하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의 손잡고 하나님께로 간다. 온전한 중보자 예수님 이끄심 받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뿐이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참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시다. 죄 없는 완전한 의인이 되사 우리를 위해 중보 하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세상의 구주시다. 참하나님이요 참사람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심을 믿고,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라고, 또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에는 이 중보자 예수님 손을 붙잡고 영원한 하늘 집에 들어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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