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11월 마지막 주 '기도'에 관한 설교 전문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눅11:5-13, 13-11주일오전
서론.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온 우리 모두에게 하늘 아버지의 위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소원한다.
2년 전 쯤, 그러니까 2011년 11월 제가 기장교회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몇 차례 기도에 관해 설교했었다. 그 중에 한 편이 눅11:1-4의 주기도문이었다. 오늘은 2년 전에 살핀 v.1-4에 이어 v.5-13을 살피면서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한다.
1. 먼저 2년 전에 살핀 11:1-4의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1)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시매,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다. 주님이 기도를 마치도록 기다렸다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하는 것을 보면, 이 제자는 기도하는 주님 모습에 큰 감화를 입은 것 같다. 자기도 예수님처럼 기도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면서 살고 싶은 거룩한 소원이 생긴 거다.
사실 우리 주님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생애를 사셨다. 막1:35이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눅6:12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주님은 산에서든지 집에서든지, 낮이든지 밤이든지, 평안할 때든지 어려움이 있을 때든지를 무론하고 기도하셨다.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못 박히고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일도 무엇인가? 기도이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 중에 첫째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하신 기도이셨다. 마지막 일곱째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하시며 기도이셨다. 기도 없는 예수님의 생애는 상상할 수가 없다. 하나님 아들이신 우리 주님도 그렇게 평생 기도하며 사셨다면,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스펄젼 목사님이 그랬다.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레이엄 목사님은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이다’ 하셨다. 5만 번 기도응답을 받으셨다는 죠지 뮬러 목사님은 ‘늙어 갈수록 더 많이 기도하라 그리해야 신령한 일에 냉랭해 지지 않는다’ 하였다. 우리가 항상 은혜 가운데 주님 뜻을 따라 살다가 은혜 가운데 저 천성문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평생 기도해야 한다.
2) 기도하시는 주님의 숭고한 모습을 보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교훈하신다. 하나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하는 기도의 내용이다. 두 번째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기도의 자세다. v.2-4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내용에 관한 대답이고, 오늘 본문 v.5-13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자세에 대한 교훈이다.
우리가 잘 알지만 한 번 더 정리해보자. 주님께서 무엇을 기도하라 하셨는가?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구하라 하시고, 이어서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 영광을 위해 먼저 구한 다음 우리의 필요를 구하되, 우리의 부패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라 하신다. 그래서 일평생 양식을 한 방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셨다. 하루하루 하나님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라는 뜻이다.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악한 마귀의 시험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주시기를 구하라 하셨다.
2. 이렇게 먼저는 무엇을 구해야할 지 가르치신 다음, 이제 어떻게 구해야할 지 가르치지 위해서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찾아와서,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줄 떡이 없는데, 떡 세 덩이만 달라 한다. 이에 그 사람은 처음에는 ‘귀찮게 하지 말라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이미 깊이 잠들었으니 줄 수 없노라’고 한다. 그런데 찾아간 이 친구가 염치도 없이 계속 졸라댄다. 그래서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친구의 우정 때문이 아니라 그 강청함을 인하여서 들어준다 하였다. 이것이 비유의 요지다.
이 비유에 이어 주님은 이 비유의 뜻을 친히 해석해 주신다.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하신다. 말하자면 강청하는 친구 비유는 ‘기도응답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비유라는 말씀이다.
기도응답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이 비유를 주님이 왜 하신 것인가? 한 마디로 우리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 의심하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도 여러분! 평생 기도하며 사시되, 믿음으로 기도하라. 믿음 없이 드리는 기도는 무의미하며 하나님께 응답을 기대할 수도 없다. 약1:6-7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3.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신자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우리가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선 오늘 강청하는 친구 비유를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끈질긴 기도의 노력이 하나님을 움직여서 응답하게 만든다고 오해할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말씀을 어떻게들 해석하나 여러 책을 보았는데,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해석하셨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응답받는 비결이라면서 첫째 ‘귀찮게 졸라대라’ 둘째 ‘부끄러움을 잊고 염치불구하고 떼를 쓰라’ 그렇게 해석하는 분도 계셨다. 한 마디로 끈질기게 악착같이 졸라대면 하나님이 결국 우리의 집념에 항복하셔서 들으신다는 식의 해석이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이 정말 그런 뜻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귀찮도록 졸래대면 견디다 못해서라도 응답하신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요 망령되기까지 한 생각이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고집스럽게 졸라도 옳지 않는 것은 응답하시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귀찮게 할 정도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겨우 들어주시는 그런 인색한 분도 아니시다. 우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듯 기도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생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패한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 비유는 들어줄 때까지 집요하게 졸라서 하나님의 의지를 꺾으라는 교훈이 아니다.
4.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비유의 결론인 v.11-13을 보면 우리가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진짜 이유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이 읽자.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다. 강청하는 친구 비유에서도 v.13 설명에서도 주님은 의도적으로 밤중에 떡을 달라는 친구를 맞은 사람이나 인간 아버지에 대해서는 악한 면이 있음을 강조하신다. 그래서 비유의 친구는 처음에는 떡을 달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나중에 들어주지만 친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계속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가 귀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유에 나타나는 사람이 떡을 달라는 요청을 들어준 이유는 자기가 편하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였다. 또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셨다. 인간인 아버지는 악하여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준다.
왜 주님이 비유의 친구나 인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악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대조하기 위해서다. 친구가 악해도 자기가 귀찮아서라도 떡을 주고, 인간 아버지 역지 악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데 그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 성도의 진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겠느냐 그런 뜻이다.
여러분!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인하여서 담대히 그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 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도 긍휼히 여기셔서 나를 받아주시고 내 기도도 들어주실 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수요일마다 살피고 있는 욥을 보라. 욥23:6이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여기 욥의 고백을 보면 욥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한이 없는 분이시라, 나같이 고난을 당하여 아무 소망이 없고 모든 인생들이 멸시하고 손가락질하는 형편에 놓여있는 자라도 ‘감히 여기가 누구 안전이라고 이렇게 왔느냐 썩 물렀거라’ 하시면서 다투시고 내쫓아 버리시는 분이 아니시라, 도리어 나같이 파산한 것 같은 인생의 말도 들으시리라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도 보라. 귀신들린 딸을 위해 주님을 찾아와서 강청할 때,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뭐라 했는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였다. 이 이방 여인 역시 주님의 자비하심을 믿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었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 가면, 유대인들이 개처럼 멸시하는 이방인이라도 반드시 은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거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는 긍휼의 보좌다. 하나님은 영원히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제가 즐겨 암송하는 성구 중의 하나인 시84:3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하찮은 미물인 참새나 제비에게라도 그 제단에서 보금자리를 주시는 선하고 자비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분명히 느낄 때 하나님이 반드시 나의 기도를 들으시리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나아가 어떤 때는 응답이 속히 되지 않고 지체될지라도, 선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외면하시지 않을 줄을 알고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수도 있다.
5.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이 기도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라면,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다시 v.11-13을 보자.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 여러분! 부패하고 연약한 육신의 아버지도 그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준다면, 하늘에 계신 선하신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그 자녀에게 응당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그 해와 비를 풍성히 내려 주시는 무한한 자비의 아버지신데, 그런 하늘 아버지가 그 자녀된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풀지 않겠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시는 것은 그 분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그런 하늘 아버지가 겸손하고 간절하게 부르짖는 자녀들의 기도를 응답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롬8:32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하나님이 바로 내 아버지이심을 아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고 나도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없이, 그저 내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무의미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어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자녀다,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라 내 평생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신다 하는 확신이 있어야 ‘아버지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하지를 못한다면 ‘아버지여!’하고 부를 수도 없고, 그 분이 내 아버지시라는 확신이 없으니 당연히 들으실 줄을 믿고 기도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늘의 하나님을 보고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하면서, 아버지시기에 은혜 주실 줄 믿고 구할 수 있다.
저는 요즈음 집에 애들을 보면서 자녀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을 한다. 저희 애들은 저희 부부에게 뭔가 맡겨 놓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자기들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어야 하도록 우리 부부가 무슨 약점 잡히거나 신세 진 것도 없다. 그런데 애들 보면, 특히 아직 철이 들든 둘째를 보면 너무 당당하게 이것저것 요구한다. 부모님께 부탁한다기보다 당당하게 자기 권리인 것처럼 시킨다. 점심은 뭐 해 달라, 학교 가는데 늦었으니 태워 달라, 용돈 달라, 옷 사 달라 오만 것 다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미안한 마음을 안 갖는다. 이게 뭔가? 자녀이니까 가능한 거다.
옆집 아주머니와 아저씨 보고 이런 것 요구하는 사람 있는가? 자녀이기에 요구한다. 바로 이런 거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담대히 그 앞에서 나가서 우리의 구할 것을 아뢸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어색한 삼촌이나 나와 별 관계없는 아저씨 보듯 하지 말라. 우리 아버지시다.
2)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사실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구하는 바를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예측되던 상관없이 구하는 대로 다 주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시기에 안 들어주시는 것이 있는 거다.
인간 부모도 자식에게 유익하다는 확신이 들어야 주지, 그것이 나중에 자식을 망치는 일이라 생각되면 거절한다. 하물며 선하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도 유익한 것이라야 주시지 나중에 우리 영혼을 망치게 되는 것은 주시지를 않는다. 지금은 약인 듯해도 결국에는 독이 되는 것은 안 주신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주는 아버지도 없지만, 자식이 철없이 뱀을 달란다고 해서 진짜 뱀을 줘서 물려 죽게 하는 아버지도 없지 않는가?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한대로 주시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의 지혜가 짧아서, 또 우리는 사실 미련해서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유익한 줄 알고 구하지만 실제로는 독이 되는 것을 구할 때가 너무 많은 거다.
어떤 분이 설교 중에 그런 말씀 하시는 것을 들어 보았다. 만약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자기가 구한대로 다 주셨다면, 자신의 지금 모습은 하나님 떠나서 마음은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망가진 인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어리석고 마음이 부패해서 사실 마땅히 빌 바를 제대로 모르고 엉뚱한 것을 얼마나 많이 구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간구하는 바를 들으시되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도록 역사하신다.
그래서 이런 기도문이 있다. ‘어느 병사의 기도’다. 우리 성도님들도 들어 보셨을 거다.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구하였지만,
겸손히 순종하기를 배울 수 있도록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건강을 구하였지만,
더 좋은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질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를 구하였지만,
현명해질 수 있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였지만,
하나님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구하였지만,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도록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구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지만,
제가 소원했던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의 무언의 기도들을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까지 우리에게 축복인 줄 믿는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평생에 기도하며 사셨다. 하루의 삶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셨고, 전 생애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셨다.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기도하며 살라 하신다. 기도함으로 하나님 주시는 사랑과 위로 은혜를 누리며 살라 하신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거룩하게 살라 하신다. 기도함으로 연약한 인생길 가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구하며 살라 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자녀 삼으신 하늘 아버지시기에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되, 우리가 구할 때 반드시 성령을 주신다. 성령을 보내 주셔서, 시험을 이기게 하시고, 의의 길 가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 소망으로 살게 하신다. 위로받게 하신다.
선하신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기도 들으시되 선하고 좋은 것 주시는 줄 알고 평생에 믿음으로 기도하며 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