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고난의주일설교전문-그가찔림은우리의허물때문이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 마17:1-4/사52:13-53:9, 13-3고난주일
서론. 교회력으로 오늘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의 주일’이라 한다. 종려주일이라 함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맞이했던 것을 기념하는 말이요, 고난의 주일이라 함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일이란 말이다. 오늘 ‘고난의 주일’을 시작으로 해서 이 번 한 주는 ‘고난 주간’으로 지킨다. 오늘 주일만 아니라 한 주간 전체를 주님 고난을 묵상하며 보내기 위함이다.
우리 교회도 이런 교회의 전통을 따라 오늘은 ‘고난의 주일’로, 이번 한 주는 ‘고난 주간’으로, 그리고 다가오는 주일은 ‘부활주일’로 지킨다. 그래서 내일부터 한 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며, 금요일 저녁에는 십자가 묵상 예배로 모인다. 다음 주일 새벽은 부활절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인다. 365일 우리가 주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고 의지하고 살아야 마땅하지만, 고난주간에는 더욱더 주님 바라보고 교제하는 일에 우리 성도님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하시면 우리 영혼에 큰 위로가 될 줄 믿는다.
오늘은 ‘고난의 주일’을 맞아 흔히 ‘고난의 종의 노래’로 불리는 사52장 53장 말씀을 통해 왜 주님이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셨는지 생각코자 한다.
1. 사52,53장 말씀과 더불어 오늘 먼저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17:1-4을 읽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고백한 후 엿새가 지나,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누가는 기도하기 위해 올라가셨다고 기록한다. 기도하던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홀연히 예수님의 용모가 달라지고 그 옷이 번개같이 빛나기 시작한다. 제자들 앞에서 그 모습이 변하여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다. 막9:3에서는 희게 빛나는 주님 옷의 광채는 빨래하는 사람이 도저히 그렇게 만들 수 없는 것, 곧 사람의 재주로는 만들 수 없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하던 중에 주님의 모습이 변화된 이 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원래의 신적인 영광이 어떠함을 보여주신 거다. 참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참사람이 되어 종의 형체를 입으시므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인생들이 예수님의 영광과 존귀하심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본래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 것을 변화산 사건으로 제자들에게 보여 알게 하신 거다.
우리가 오늘 함께 부른 87장 찬송에 ‘시온 성 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그랬는데, 주님은 찬란한 저 하늘을 떠나신 것만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견주어 비교할 수도 없는 영광스러운 당신의 하나님되신 그 존귀하심을 내려 놓으셨던 것이다.
2. 그러면 해보다 더 빛나고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광의 빛이신 주님이 얼마나 낮아지고 비천해 지셨는가?
1) 함께 읽은 사52:14을 다시 보자.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무슨 말인가? 우리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의 모습, 우리 때문에 온 몸이 상하신 그 모습은 한 마디로 너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지경이었다는 말씀이다(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보여줄 것). 원래의 예수님의 모습, 변화산에서 드러내신 것 같은 그런 하나님되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눈에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비참하게 될 수 있나 너무 놀라워서 눈을 감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하나님 되신 본래의 영광이 어떤 줄을 알고 그 모습을 본다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모습이겠는가?
2)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신 줄을 모르고 그냥 사람이라고만 생각을 해도 저럴 수는 없다고 여겨질 만큼 비천해지고 낮아지신 모습을 53:2-3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마17장 변화산에서 잠시 보이신 예수님의 본래 영광이 어떠하였는가? 그야말로 잠시 경험했고 그것도 본래 영광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경험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황홀하고 기뻤든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을 짓되’ 하면서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 산 위에서 그 찬란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주님의 영광의 한 조각만 보았을 뿐인데도,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끝난 것 같고 마치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뭔가? 본래 참하나님이신 예수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흠모하지 않을 수가 없으신 분이시다. 너무 거룩하여서 사모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낮아지신 모습, 고난 받는 모습에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 첫 날을 누울 곳이 없어 구유에 오신 그 분의 모습을 흠모하는 인생은 없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두루 다니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천국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대제사장 무리에게 붙잡혀 벌레처럼 멸시를 당하며 심문을 받고, 버러지 같은 빌라도의 군인들에게 뺨을 맞고 채찍질을 당하며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누가 귀하게 여겨 사모하였는가?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양손에 못 박히고 허리에 창을 찔리실 때 누가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흠모하였는가?
우리 위해 하늘 영광을 내려놓으신 우리 주님의 모습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었고 풍채도 없으셨으며, 심지어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모든 아픔을 친히 체휼하시고 대신 담당하시려고 온갖 간고를 겪으셨고 온갖 질고를 당하셨다. 그 모습이 인생의 눈에 보기에 얼마나 흉측하고 비참했으면 차마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면서 그에게서 얼굴을 가렸다고 하시는 거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이 왜 그렇게 낮아지고 고난 당하셔야 했는지 자기 죄를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도 아무런 감동 없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는가?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 말씀이 부담되고 회피하고 싶지 않는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3. 그러면 여러분! 본래의 모습이 세상에서는 그 유를 찾아볼 수 없도록 영광스러운 빛이신 예수님이 왜 이렇게 아무 흠모할만한 것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고 멸시하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는가? 왜 참하나님이신 그 분이 비천한 인생이 되셔야 했는가?
1) 다시 52:15을 같이 보자.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이번에 개역개정역이 v.15을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한다고 번역을 했는데, 이전의 한글개역 번역은 ‘후에는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며’ 라고 번역했다. 지금 개역개정역은 왜 이렇게 번역했느냐 하면, v.14에서 예수님의 비참해진 모습에 사람들이 놀랄 것이라는 말씀을 의식해서 v.15은 이번에는 예수님이 열방을 놀라게 하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번역을 했다. 그래서 결국 의미는 어느 정도 통하지만, 그러나 정확한 번역과 의미는 이전처럼 ‘후에는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며’ 하고 번역하는 게 더 낫다.
그러면 ‘후에는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며’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아무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록 그렇게 낮아지고 비천해진 고난의 종 예수님이 열방을 위해 뿌려진다는 말이다. 고난의 종 예수님의 피가 열방을 위해 뿌려짐으로, 그 피를 의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열방이 정결함을 덧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물을 뿌려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듯이, 우리 하나님은 고난의 종 예수님의 거룩한 피를 뿌려 열방을 정결하게 씻으시는 거다. 주님은 열방을 위해서 뿌려지기 위해 하늘 영광을 내려놓고 흠모할 것 없는 인생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히9:14에 말씀하신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흠없는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에 있는 성소에 우리를 위해 들어가신 대제사장 예수님의 피는 우리 양심 속에 역사하여 능히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의 죽은 행실을 정결하게 씻어서, 이제는 거룩하게 회복된 심령으로 죄인인 우리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참하나님이신 분이 참사람이 되어 열방을 위해 자기 몸을 제물로 뿌려지게 함으로 죄로 망할 인생에게 생명의 소망과 의를 회복시키신다.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예비하신 일이요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래서 52:15에서는 이 기이한 일에 대해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신다.
53:1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신다. 무슨 말인가? 하늘보다 높고 영화로우신 분이 미물보다 낮고 비참하게 되셔서 열방을 위한 제물로 뿌려짐으로 열방을 정결하게 씻어 구원하시는 이 일이 너무 신비로워서 인간이 그 이성을 가지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인생들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인생들은 스스로 의를 행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심령이 깨끗해지고 구원도 받아야 한다고 여기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고난의 종이 뿌린 피로서 정결해진다고 믿을 수가 없는 거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서 나온 이 구원의 신비를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심령에 권능의 팔로 역사하는 사람은 자신은 아무 소망 없는 죄인인 줄을 알고 고난의 종이 뿌린 이 피를 믿고 의지함으로 죄사함을 얻고 그 양심이 깨끗해지고 그 영혼이 순결함을 덧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의 종의 피를 의지하고 성령 안에 순종함으로 비로소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2) 이처럼 하늘보다 높고 해보다 영광스러운 참하나님이 참사람이 되어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은 죄악으로 망할 열방을 위해 뿌려지시기 위함이셨는데, 오늘 사53:4-6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① 먼저 v.4 같이 읽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 보면 ‘실로’ 하는 말과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는 말이 대조되고 있다. 실제 이유 곧 진실과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다르다는 거다. ‘실로’ 곧 진실은 무엇인가? 고난의 종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질고를 겪으시며 슬픔을 당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때문이다. 우리가 져야할 짐을 대신 지셨다.
그런데 이런 진실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며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인생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예수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다 여긴다. 내가 예수님더러 죽으라고 한 적 없는데, 대신 십자가 져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게 왜 나와 상관이 있냐고 하는 거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와 상관없이 여기는 인생들의 생각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요 완고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요, 죄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여 멸망길로 치닫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고난의 종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임을 고백하게 되고,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② v.5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다. 예수님이 가시관 쓰시고 창에 찔리신 것은 우리 허물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드는 시간까지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는 부패하고 더러운 생각과 욕망에 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허물 때문이다. 예수님이 만신창이 되도록 상하시고 고통 받으신 것도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죄악으로 인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원수된 우리를 다시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죄악으로 마음이 병들어서 선한 것을 사랑할 줄 모르고 이웃을 섬길 줄 모르는 우리 영혼의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신 것이다.
③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눈 어둡고 고집스럽고 미련하기가 비할 데 없는 양이 목자를 버리고 제멋대로 가면 어찌 되는가?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에서 마음껏 누리고 쉬게 되는가? 오히려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고, 위험한 낭떠러지를 헤매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다. 피조물인 인생이 지혜와 사랑과 의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나면 어찌되는가? 인생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선한 길에서 벗어나게 될 뿐이다. 의로운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들, 하나님 없는 세상 나라를 보라. 거기에 평화가 있는가? 의가 지배하는가? 인간이 만든 세상 나라의 바탕에 사랑이 역사하는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그래서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는 영원한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 하나님 떠난 세상 나라에서 우리는 평화가 아니라 날마다 다툼과 갈등과 살인과 두려운 소식들만 듣게 된다. 의가 아니라 불의가 판을 치고 있어서 힘없는 백성들의 억울한 눈물이 강을 이루고 있다. 사랑이 아니라 서로 미워하고 상처주고 할퀴고 물어뜯으며 피투성이가 되어 있지 않는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여 소망 중에 담대하기는커녕,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애써 외면하고 그저 오늘을 사는 일에 마음을 쏟아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의롭고 생명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오늘의 주소이다. 이런 우리 모두의 죄악을 하나님은 고난의 종에게 담당시키심으로, 이제는 그릇 행하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법을 따로 바로 행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다. 각기 제 길로만 가려하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을 걸어가는 순종의 사람 겸손한 사람을 만드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생의 길로 돌아서는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4. 이어지는 v.7-9은 하늘 영관 내려놓고 낮아지신 고난의 종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어떤 자세로 가셨는지 말씀하신다.
v.7이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먼저 주님은 우리 대신 고난 당할 때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악을 쓰면서 하신 게 아니다. 당신을 그 모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우리 죄인들 생각하며 분을 내시면서 하신 게 아니다. 고난 중에 괴로울 때도 이 길만이 우리를 죄에서 살려 의와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길인 줄 알고,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감당하셨다. ② 이렇게 사랑으로 감당하셨을 뿐 아니라, 또 주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그 고난을 마땅히 여기셨다. 주님 당신은 아무 죄가 없으시기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하시는 그 고난에 대해 변명하실 수 있었다. 억울하다 항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도 주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당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아무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신은 죄가 없으나 당신이 대신 짊어지신 그 백성의 죄와 허물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당신의 백성의 죄악과 허물을 당신 자신의 것처럼 받으셨기에, 자기를 욕하고 저주하고 못 박는 자들 앞에서 내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는 것이라 하시는 뜻으로 그 입을 열지 않으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마땅히 받을 자기 백성의 허물을 인해 항변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는데,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버러지 같은 인생들은 ‘그가 스스로 죄인인 줄 알기에 할 말이 없구나’하고 조롱하기까지 한다고 v.8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이 침묵하신 것은 그 백성의 허물 때문이지 당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셨다. 그래서 v.9에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하신다. 주님은 그 연혼도 마음도 입술의 말도 행실도 온전히 거룩하고 순결하신 분이셨던 것이다. 간악한 인생들은 그런 주님을 어떻게든 죄인의 죽음으로 만들어 보려고 그 무덤을 악인들과 같이 만들었다. 주님 십자가 지실 때 의도적으로 유명한 죄인 둘을 좌우에 함께 못 박은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 가운데 계신 죄인 중의 죄인으로 만들려 하였지만, 그럼에도 주님 당신은 아무런 강포도 거짓도 없는 의인이셨다. 육신으로 세상에 온 사람 가운데 유일한 의인이셨다.
옛날 가스펠송 중에 ‘왜 날 사랑하나’ 하는 찬양이 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1절만 같이 불러보자.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여러분! 왜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죽으셨는가? 왜 주님이 갈보리 가야 했는가? 마땅히 형벌 받을 저와 여러분을 대신해서 형벌 받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참 생명과 의와 하늘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다.
결론. 이제 여러분 마음을 모아서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라. 우리가 주님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갈보리 그 고난의 언덕에서 피 흘리시고 살 찢으시고 내 다신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믿고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갈보기 십자가 사랑을 믿고 의지할 때 주님은 오늘 당신이 열방을 위해 뿌린 그 피로서 우리 양심과 영혼을 정결하게 씻어 의와 생명을 주실 것이다. 갈보기 십자가를 믿어 의로운 하늘 백성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