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십자가묵상예배설교전문-오늘네가나와함게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39-43), 13-3십자가묵상예배
서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십자가묵상예배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들 심령에 성부 성자 성령 우리 성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주님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3시,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온전한 의인으로 죄인들을 대신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증거로 제6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12시경부터 해가 빛을 잃어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하신다. 제9시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경까지 어둠이 임하였는데,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신 후에 숨을 거두셨다.
복음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참혹한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는 동안 하셨던 7마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더 있는지 7마디가 전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 위에서 주께서 하신 7마디를 들려주려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7마디 말씀은 짧지만 왜 주님이 죽으셔야 했는지,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어떤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중한 말씀들이다.
그래서 해마다 고난주간 십자가묵상예배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주님 말씀을 한 마디씩 살펴보는데, 올해는 두 번째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1. 작년 십자가묵상예배 때 살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는 기도이셨다. 주님은 전 생애 동안 기도하심으로 아버지와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며 사셨다. 기도하심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을 구하여 순종하셨다. 그런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를 바라보신다. 죽음의 고통이 온 몸과 영혼을 감싸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다.
더 놀라운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지하고도 완악한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일이다. 십자가 위에 달려서도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사 아버지께 저들을 위해 은혜를 구하셨다. 이것은 그야말로 주님의 죽으심이 어떤 죽음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님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으로 죄인을 대신하는 죽음, 의인으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한 죽음에 자신을 내 주신 것이다.
2.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완전하신 의인으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죽으시면서 자기를 못 박는 원수들까지 긍휼히 여겨 저들을 위해 간구하고 있는데, 그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주님 십자가 옆에서는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1) 의인을 죽게 하고도 한 치의 마음의 찔림이나 연민조차도 없이 군병들은 한 푼이라도 이득을 챙겨 보려고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는다. 그들에게는 몇 푼 안 되는 옷가지 하나보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무가치하고 의미가 없었던 거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도 세속적이며 또 냉정한지 십자가 아래 군병들은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만 아니다. 죄 없는 의인을 죽음에 넘겨준 유대인과 그 지도자들은 극한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예수님을 더욱 짓밟아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정신적 영적 고통을 주고자 조롱하고 천박하게 비웃는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끝까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고자 의도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조롱하는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다.
한편 옷가지 하나 얻는데 혈안이 되어 주님 십자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던 군병들도, 제비뽑기를 마친 후에는 느닷없이 악랄한 유대인들에게 합세하여 주님을 조롱하기 시작한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군병들은 마치 예수님 조롱하는 일이 지루한 시간 달래는 놀이라도 된 듯 그렇게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조롱한다.
이처럼 악랄한 유대인들은 악의가 차서, 군병들은 짐승처럼 무지해서 거룩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가운데, 기가 막힌 일이 또 이어진다. 죽을 죄를 짓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들마저도 예수님 조롱하는 일에 가세한다. 평생 버러지 같이 죄악을 늪을 뒹굴고 살아온 행악자가 그 더러운 입으로 주님을 훼방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한다. 여기 행악자를 보라. 자기 죄로 죽어가면서까지,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온몸이 뒤틀리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거룩하신 이를 비방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악독한지, 어디까지 악독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죽을 때만큼은 진실해지고 선한 마음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여기 한 행악자를 보라. 죽어가면서도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마음에 있는 악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입으로 저주와 악독을 뿜어대면서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 떠난 인간의 죄의 깊이이다.
2) 이렇게 버러지 같은 인생들이 하나같이 거룩하신 주님을 조롱할 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편에 달린 한 행악자가 예수님을 훼방하는 자를 꾸짖는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여기 두 번째 행악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와 마지막에 형벌 받는 일이 첫 번째 행악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와서는 그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한 행악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죄악된 모습 그대로 죄악 가운데 생을 마치지만, 마지막 순간에 조롱하는 행악자를 꾸짖는 두 번째 행악자는 죽음 직전에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소망을 본 것이다.
첫 번째 행악자는 악으로 일관해 온 그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당연히 받아야할 정죄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채 거룩하신 이를 능멸하는 발악적인 모습을 보인다. 끝까지 죄를 고집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을 택한 거다.
그러나 두 번째 행악자는 그야말로 그에게 있는 마지막 기회 마지막 시간에 자기 옆에서 죽어가는 한 거룩하신 이의 죽음을 통해 자기 죄를 깨달으며 그 분을 의지하여 살 길을 찾게 되었다.
3) 그러면 이 두 번째 행악자는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에서 살 소망을 발견한 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은혜인데, 두 번째 행악자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기 옆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은 채 죽어가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이 강도는 예수님의 의롭고 거룩하신 신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의로우신 예수님의 죽음에서 죽어 마땅한 나 같은 죄인도 살리는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번째 행악자는 참 복된 사람이다. 아직 주님이 부활하시기 이전이어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분명하게 다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마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소망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절망감만 느끼고 도망가 버린 상황이다. 너무나 주님을 사랑해서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섬기면서 따라온 여인들도 주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그저 탄식하고 마음이 어둠에 눌려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행악자는 아직 주님의 부활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주님이 죽으시는 모습만 보고서도 그가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저 의인의 거룩한 죽음 안에서 죄로 망할 자기 영혼도 살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은혜 위의 은혜가 두 번째 강도에게 임한 것이다.
사실 이 두 번째 강도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이 죄인을 살리기 위한 완전한 의인의 죽음임을 안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첫 번째 강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비웃은 일에 동참했다고 마27:44은 증거한다. 그랬던 행악자가 그리 길지 않는 시간 동안에 완전히 그 마음이 바뀌게 되는데, 거기에는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마지막 호흡이 다할 때까지도 영혼 섬김의 수고를 감당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었다.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그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이 두 번째 강도는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같은 죄인의 죽음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완전한 의인이요 온전히 선하신 분이심을 깨달은 거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우연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들 유대인의 왕이심을 깨달은 거다.
그것만 아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의로운 죽음 앞에서 두 번째 강도는 자신의 죄악된 실상도 보게 되었다. 이때까지 살아온 자기 인생 전부가 그야말로 죄악으로 얼룩져 망할 인생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하는 첫 번째 행악자를 보고 하는 말을 보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자기는 마땅히 이렇게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자기가 살아온 생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벌을 받도록 정죄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거룩한 의인의 죽음임을 깨달았고, 의로우신 예수님 앞에서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 행악자는 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자기 같은 죄인에게도 용서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하심도 보았다. 사실 자기가 살아온 과거의 죄악을 생각하면, 마지막 순간에 용서해 달라고 긍휼을 구하는 것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이 강도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은 무한한 것이라 어떤 죄인까지도 능히 그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본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강도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강도처럼 드러내 놓고 범죄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남의 눈이 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은밀한 죄들을 짓고 살았는가? 또 사람의 눈이 볼 수 없다고 우리 마음속에 얼마나 추하고 완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을 품고 살았는가?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 가운데 죄로 물들지 않은 영역이 있는가?
그러니 우리 역시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임이 죄인을 대신하는 완전한 의인의 죽음임을 깨달아야 한다. 완전한 의인이신 분이 가장 참혹하게 죽은 이 이상한 죽음 앞에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악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완전한 의인 예수님의 이 죽음에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기 원하시는 그 은혜와 자비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또 어떤 죄인도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두 번째 행악자는 이제 그 얼굴을 돌려 주님을 향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깨어진 심정으로 간구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완전한 의인이요 하나님 아들되신 거룩하신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이 버러지 같은 죄인도 불쌍히 여겨 나도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옵소서’.
여러분! 강도의 이 간구가 염치없는 간구처럼 들리시는가? 맞다. 염치가 없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만큼 염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염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오직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주님의 대답을 보라.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강도에게 뭐라 하시는가? ‘강도야 너는 염치도 없느냐’ 그러신가? ‘내 나라가 너 같은 자와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1) 여기 주님의 대답을 잘 보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그러신다. 강도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줌으로 위로하려고 애쓰는 주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자. 이 행악자는 평생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의로운 일을 해 본 기억이 없다. 남에게 고통만 주면서 살아온 강도요 행악자다. 그런 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회개한다고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지만, 강도 자신도 한편으로는 의로우신 예수님 안에서 용서의 가능성을 발견했어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로 나 같은 죄인이 이 마지막 순간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두려움과 의심이 그 마음에 생기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고 이제 그 죄에 대해 정죄 받아 망할 자기 영혼 인하여 두려워하며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강도를 보시면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신 것이다. 주님 말씀은 빈말이 아니니 강도더러 확신을 가지라는 뜻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안심하라 평안 하라는 말이다. 모든 의심의 안개 벗어 버리고 담대하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2) 이렇게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라고 하심으로 담대함과 위로를 심어 주시면서 주님이 약속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① 오늘 ② 네가 ③ 나와 함께 ④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다. 여기 제가 번호를 붙여 놓은 것처럼, 십자가에서 강도를 보고 약속하신 주님 말씀에서 우리는 4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4번째 것부터 반대로 생각해보겠다.
① 주님은 먼저 강도에게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그렇다. 여러분! 낙원이 있다. 천국이 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확실한 천국 신앙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영광스러운 하늘나라가 있다.
우리 앞서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이 이 천국 소망과 믿음으로 살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살았기에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살았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 소망 붙들고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하며 찬송하며 살았다.
우리 앞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스러운 그 나라에 들어가신 우리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처소를 예비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 나라에 가서 우리는 영광 중에 우리 위해 그 손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던 피 흘리신 주님을 만날 것이다. 그 나라에 가서 우리는 또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사심으로 보석 같은 믿음의 유산들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과 순교자들을 만날 것이다.
얼마 전에 울산교회 어느 장로님이 자기 홈피에 재미있는 동영상을 하나 올려놓으셔서 보게 되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도 혹 보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어떤 스님이 교양강좌에서 설법하신 내용의 일부였다. 설법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었던 모양인데, 어떤 여자 분이 10여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위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절에서 하라는 대로 49제도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님에게 묻기를 정말로 극락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정말로 자기 어머니가 극락에 가 계시냐고 물었다. 진짜 그러면 극락에 가신 어머니로 인해 위로 받으면서 남은 세 자매가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진지한 질문에 스님은 아무 유머스러운 대답을 하셨다. 한다는 말씀이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렇게 답을 한다. 저도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다. 그랬더니 질문한 여자가 당황하고 의아해하면서 다시 말한다. 그건 교회서 하는 말이고, 불교에서 하는 대답을 정확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이번에는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셨으면 좋겠느냐 나뿐 곳에 가셨으면 좋겠느냐고 역으로 묻는다. 당연히 좋은 곳에 가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그렇게 믿으라고 했다. ‘극락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안 하고, 그냥 어머니가 좋은 곳에 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더 편치 않느냐 하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는 거다. 그러면서 다시 반복해서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고 스님이 말을 했다.
여러분! 보라. 얼마나 기만인가? 얼마나 거짓인가? 불교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천국이 있다는 확신도 못하면서 해탈이니 극락이니 하면서 속이는 거다. 그러면서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니 마음 편한대로 생각하고 살라는 거다.
②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강도를 향해 진실로 말한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그 낙원에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 낙원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들어간다. 우리 죄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간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낙원을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시는 거다. ‘나와 함께’.
그래서 스데반이 눈을 감을 때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환상을 보지 않았는가? 스데반이 눈을 감자마자 그 영혼을 주님은 낙원으로 인도하신 거다. 예수 안에 천국이 있고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사실이 아닌데 그저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진실로 천국이 있고 진실로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시기에, 우리는 진리에 근거해서 믿고 진리에 따라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낙원으로 들어가는 거다.
③ 그렇게 주님은 낙원에 대해 천국에 대해 확신있게 약속하셨는데, 누구에게 하신 약속인가? 바로 행악자다. 그냥 행악자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고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긍휼을 붙드는 행악자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그렇다. 여러분! 저 강도 같은 사람도 주님 안에는 사죄의 은혜와 생명과 평안의 소망이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을 살리려는 의인의 죽음임을 알고, 그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원래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의인들만 들어가는 영생의 나라다. 의의 나라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은 아무 의가 없는 자라도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의인들이 들어가는 영생하는 나라로 능히 인도하시는 것이다.
④ 이렇게 의로우신 예수님의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악자로 살았던 사람조차 진심으로 회개할 때,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신비로운 죽음인데,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가? ‘오늘’이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여기서 ‘오늘’은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바로 그 날 우리 심령에 천국에 임한다. 또 하나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 신자가 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날 우리 영혼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오늘’.
결론. 이렇게 주님은 자기 죄로 인하여 애통해하고, 죽음이 코앞에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두려움 가운데 그 영혼을 의탁하여 긍휼을 구하는 한 행악자를 위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없으신 주님이 왜 죄인처럼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죄는 멸하고 죄인은 살리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오늘 한 행악자같이 주홍보다 붉은 내 죄악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주님 안에는 나 같은 죄인도 살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시기 바라고, 그래서 주님 안에서 천국의 소망과 확신 사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