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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설교일
    2012-07-01

기쁨 기도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5:16-18, 12-6오전

 

 

서론.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맥추절로 정해서 지키는 감사주일이다. 한국교회는 맥추절과 추수감사절 그렇게 두 번을 감사주일로 지켜왔다.

맥추절은 해마다 7월 첫째 주일에 지킨다. 과거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 때 보리나 밀 추수가 끝난 때다. 7월 첫 주는 또 한 해의 딱 절반이 지나고 하반기를 시작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7월 첫 주에 맥추절을 지키는 것은, 한 해의 절반을 사는 동안 함께 하신 모든 은혜를 되새기며 감사하고, 영육 간에 양식 주시고 보살피심을 감사키 위함이다.

 

 

1. 출23:14-16절을 보면 구약 백성에게는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의 3대 절기를 지키라 하셨다.

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에 속한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실 때,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린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지나갔다. 유월한 것이다.

유월절의 신약적인 의미는,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신 은총을 가리킨다. 구약의 유월절을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➁ 맥추절은 곡식의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다. 유월절이 지난 첫 안식일부터 7주 후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맥추절 곧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셨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순절이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린 날이듯이,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이제 진정한 하늘나라 영적 추수와 풍성한 영적 삶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맥추절의 신약적인 의미는, 영육 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심을 감사하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 추수꾼이 될 것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다. 오늘날 두 번의 감사절기와 성령강림절이 구약의 맥추절의 성격이라 볼 수 있다.

➂ 다음은 수장절이다.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23:16) 하셔서,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저장하게 됨을 감사하는 절기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고한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어느 정도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저축하며 살게 하심을 감사하는 거다. 한편 이 수장절에는 초막을 지어서, 7일간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면서 지킨다. 초막에 거함으로서, 과거에 이스라엘은 쉴 곳을 찾지 못한 나그네로 광야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나안 땅을 안식처로 주신 것을 감사하는 거다. 그래서 수장절을 다르게는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른다.

수장절의 신학적인 의미는, 지금 나그네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의 날이 있음을 증거한다.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이다. 수장절에 거둔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듯이, 주님이 다시 오시면 알곡들을 모아 천국 곡간에 넣으실 것이다.

구약의 3대 절기를 이렇게 이해하면, 3대 절기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아도, 현재 내 삶을 보아도,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아도 항상 감사하며 살게 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유월절은 과거에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 사랑으로 구속하심을 감사하고, 맥추절은 현재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내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주시고 돌보아 주심을 감사하고, 수장절은 미래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 안식의 소망 있음을 감사하는 거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과거 현재 미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여 해마다 절기를 정해 지키는 것은 믿음의 순례길에 이정표가 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교회 전통에 따라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면서, 기쁨 기도 감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2.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 잘 아시는 말씀이다. 아마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 다음으로 가장 잘 외울 수 있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같이 한 번 외워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 뜻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고 하시는 경우를 본다. 그런 분들의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이해 간다. 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같은데, 잡힐 듯 잡힐 듯하면 잡히지가 않다. 뭔가 문제가 꼬여 있는데, 될 듯 될 듯하면서 속 시원히 해결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뜻이요, 또 하나는 개별적이면서 특별한 뜻이다.

먼저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뜻은, 모든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뜻이다. 구약 백성에게도, 사도 시대의 백성에게도,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뜻이다.

다음 특별하면서도 개별적인 뜻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또 개인마다 다르다. 주님의 행적을 보면, 똑 같이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데, 한 사람은 당신을 따라 오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서 받은 은혜를 나누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먼저 집안 일 좀 정리하고 따르겠다고 하는데,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사람에게는 이것을 요구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것을 요구하셨다. 개별적이면서 특별한 하나님의 뜻도 있는 거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성도는, 먼저 오늘 여기서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에 충실히 살아야 한다. 오늘 여기서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기만 하면 내일 저기서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일 뿐이다. 오늘 여기서 분명하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내일 저기서 개별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쉽게 예를 들면, 오늘 이웃을 위해 단돈 만 원도 구제하지 않으면서, 내일 돈만 많이 벌면 교회당도 짓고 선교사님도 수없이 돕겠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다.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과 개별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신29:2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같이 읽자.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여기 보면 ‘감추어진 일’이 있고 ‘나타난 일’이 있다. ‘나타난 일’이 뭔가? 분명하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감추어진 일’은 뭔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보여주시는 뜻이다. 그런데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섣부르게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 여호와께 속하였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과 섭리를 따라 가르치시고 알려 주실 거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하였기에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 행해야할 일이다.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가?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율법의 말씀, 계명의 말씀이 우리 성도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행하여야할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우리가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뜻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 그 말이다.

이렇게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나를 쓰시고자하는 뜻이 있을 때면 그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뜻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시고, 또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친히 도우시고 인도해 주시는 거다.

오늘 주보에도 소개했는데, 우리 고신교단이 파송한 제1호 여자선교사님이 계시다. 김자선 선교사다. 미혼 여자의 몸으로 필리핀의 오지 중의 오지에 가서 20년 이상을 정말로 헌신적으로 사역하셨고, <그 왕을 위하여>라는 책을 내셨다. 그 책에 보면 싱글 여자선교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 안전하면서도 환경이 괜찮은 선교지를 추천하였고, 관광지로 유명한 세부에서 같이 동역하자는 제의도 있었다. 그런데 많은 반대와 오해와 핍박까지 무릅쓰고 선교사님은 어느 선교사도 가 본 적이 없는 필리핀 최북단의 가장 오지를 선교지로 택하여 가셨다. 선교사님이 그렇게 어려운 곳을 가시게 된 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선교사님을 주님께 인도한 영적 어머니인 무척산 기도원의 명향식 원장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세부 쪽으로 오지 말라 하신 거다. 그리고 창12:1-3 말씀을 통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어느 선교사님도 가보지 않는 오지로 가시도록 하나님은 선교사님을 인도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교사님에게 개별적이면서 특별한 뜻을 보이셨는데, 이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이면에는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위해 뼈를 묻겠다는 100%의 헌신과 순종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임을 <그 왕을 위하여>라는 책에서는 힘 있게 고백하고 있다. 오늘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 때, 개별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뜻도 보여주시는 거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행할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 뭐라고 하는가? 본문 말씀을 다시 외워보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를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뭔가? 항상 기뻐하는 거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거다. 범사에 감사하는 거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 바란다.

 

 

3. 오늘 말씀은 먼저 ‘항상 기뻐하라’ 하신다. 신앙생활한지 몇 년 만 되어도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은 수십 번은 들으셨을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 가정이나 직장에 단연코 제일 많이 붙여 놓은 성구도 이 말씀일 듯하다.

그렇게 자주 들어온 말씀인데, 참 놀랍게도 이 말씀은 가장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말씀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아니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어요?’하는 의문을 가져 보시지 않았는가? 너무나 좋은 말씀이지만, 내가 실천하기란 불가능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는가? 저는 솔직히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마음에 부담이 컸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지?’ 그랬다.

 

1) 오늘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하신 것은 먼저, 어떤 종류의 기쁨이든 그저 기뻐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쁨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는가? 거룩하고 선한 기쁨도 있고, 타락하고 악한 기쁨도 있는 거다. 신령한 기쁨도 있고, 세속적인 기쁨도 있다. 남을 괴롭히면서 자기는 기뻐한다면 그것은 사악한 기쁨이다. 자기 영혼은 망가지고 있는데, 육체의 쾌락과 방종으로 즐거워한다면 그것 역시 왜곡된 기쁨이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마냥 희죽거리면서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성경 말씀에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도 있지만, 애통하고 슬퍼하라는 말씀도 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고, 약4:9에서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였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을 보면서 슬퍼해야 하고, 하나님 없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애통해야 한다.

 

2) 이렇듯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거룩한 슬픔이나 애통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은 또 분명히 ‘항상 기뻐하라’ 하신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기뻐하라는 말인가? 18절 하반절에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랬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이유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이다. 항상 기뻐할 힘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며, 내 환경에도 있지 않다. 연약하고 여전히 죄에 유혹받기 쉬운 나를 보고서는 항상 기뻐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 주지를 않는 세상을 볼 때 항상 기뻐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빌3:1에 보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신다. 빌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신다. 주님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이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서신서들을 보면, 시작할 때든지 마칠 때에 문안하는 내용이 나온다.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과 긍휼을 빌 때, 누구의 이름으로 비는가?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빈다. 다시 말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이라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항상 우리 심령을 채워주는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요15:11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의 근원은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을 맛본 신자는 이렇게 외친다. 시4:7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러기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내가 주님 때문에 죄사함 받은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살 때 어려움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언제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인해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내 안에 주님이 성령으로 찾아 오셔서 부어주시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이다. 슥2:10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4. 오늘 두 번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그러나 생각되듯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비슷한 느낌을 줄 것이다.

 

1) 그래서 우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흔히 오해하듯이, 밤이고 낮이고, 깰 때든지 잘 때든지 계속해서 기도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기도에 가장 모범을 보이신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다. 주님도 주무실 때도 있었고, 식사도 하셨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가르치실 때도 있었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만 하고 살라는 말은 아닌 거다.

 

2) 그런데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기도의 은혜를 깨우쳐 드리기 위해 소개하고 싶은 책이 참 많다. 그 중에 하나가 경건한 청교도 목사님인 존 라일이 쓴 <기도를 잃어버린 당신에게>하는 책이다. 그 책에서 존 라일 목사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아주 쉽게 풀이 하셨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성전의 불처럼 기도가 일상에서 계속 타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파종 때와 추수 때, 여름과 겨울, 건강할 때와 병들 때를 가릴 것 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침과 저녁 기도를 이어 주는 작은 탄성의 기도들이 사슬처럼 온 종일 이어져야 합니다’.

존 라일 목사님의 해석을 근거로 살펴보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에는 크게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➀ 첫째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존 라일 목사님이 ‘아침과 저녁 기도’라고 표현한 정해진 기도 시간이다. 신구약을 무론하고 사실 우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신앙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해진 기도 시간과 장소를 가진 분들이다. 다니엘이 그랬고, 다윗도 그랬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고 사도들도 그랬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은 정해진 기도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➁ 둘째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삶이다. 파종을 할 때도 기도하고, 추수할 때도 기도한다. 병들 때도 기도하고, 건강할 때도 주님 주신 건강으로 주님 영광 드러내도록 기도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는 거다.

➂ 셋째 정해진 기도 시간 외에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의지하고 사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것을 존 라일 목사님은 ‘아침과 저녁에 정해진 기도 시간을 이어주는 작은 탄성의 기도들이 사슬처럼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➃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이 특별한 시험이나 사명을 주실 때는 특별히 뜻을 정해서 기도하는 거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에스더가 작정해서 기도함으로 민족을 구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자 작정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그 시간에 천사 가브리엘을 계시의 영으로 보내셨다. 우리 주님도 제자들을 택하실 때나 십자가를 앞에 두셨을 때 작정하고 기도하심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았다. 평소에 늘 기도하며 사는 주의 백성이, 특별한 일을 만나 특별하게 작정하고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사 하늘 문 여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는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4. 오늘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꽃의 향기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꽃이 보기에만 예쁠 뿐 아니라 향기도 좋듯이, 우리의 믿음은 감사의 향기를 언제나 풍기기 마련이다. 믿음도 좋고 열심도 있는데, 감사가 없고 불평이 가득하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에는 언제나 감사의 꽃이 피는 거다. ‘범사에 감사하라’.

저는 목사다. 늘 설교하는 사람이다. 이런 주제의 설교도 해야 하고 저런 주제의 설교도 해야 한다. 본문이 정해지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자신 있는 주제의 설교를 하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 새벽기도 시간처럼 본문이 딱 정해진 설교는 다른 설교를 할 수가 없다. 그날 주어진 본문의 주제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이전에 저는 ‘감사’에 대한 주제의 본문이 나오면 설교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제 속에 솔직히 그다지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 불만이 참 많았다. 그러니 감사에 관한 설교가 힘들었고, 특별히 ‘범사에 감사하라’ 이 설교는 참 힘든 설교였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 데살로니전서 5장18절 이 본문은 공식 예배 시간에는 처음으로 설교를 한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은 너무 감사했고 기뻤다. 왜냐하면 제 마음에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저를 연단하시고 낮추시면서, 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제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망 없는 죄인인 줄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부족한 사람을 얼마나 오래 참아 주시고, 은혜로 인도해 주심을 깨달으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사실 제 개인의 형편이나 저의 집안의 형편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도 사연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제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제 욕심대로 되지 않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는 감사가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이 너무 좋다.

이유가 뭔가? 제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제 마음에 주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한 가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믿는다.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음을 위해 사용해 주셨고, 앞으로도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게 하실 줄 믿는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제 눈에 보기에 좋은 것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쓰실 것이고, 제가 느끼기에 어렵고 힘든 것도 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실 것이다.

제가 기장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많은 새가족들이 오셨다. 새가족 심방을 가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제가 늘 물어본다. 놀라운 것은 다들 사연이 있다. 우선 듣기에는 참 아픈 사연들이다. 그런데 놀랍지 않는가? 그 아픈 사연들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저들 영혼의 아버지를 찾아 나왔다. 저들 영혼에 참 안식과 위로를 주실 선한 목자를 따르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 아픈 사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온 우리 성도님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크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들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얼마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신 줄 모른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가 어떤 죄인인 줄 깨닫고, 또 오늘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신 줄을 분명히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을 때, 제 마음에는 감사가 솟아났다. 평안히 흘렀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란다.

 

 

결론. 오늘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 전통에 따라 맥추 감사주일로 지킨다. 부디 바라기는 주님이 사랑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마음에,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고 주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마음, 자신이 연약함을 알고 또 우리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계심을 알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인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