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해설
구역공과 25-35
25-35
제목 : 용서를 흘러가게 하라. 골3:13
찬송 : 여호와의 유월절/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257장(마음에 가득한)
인터넷 검색창에서 ‘용서’라고 쳤더니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나타난 표현이 ‘나는 누구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런 말들과 또 정치인 이름이 나오면서 ‘아무개는 절대 용서 못해’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 외 용서에 대한 많은 표현과 의견이 있었는데 용서에 대한 의견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항상 용서해 주는 사람이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용서받아야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글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용서와 관계해서 전부 피해자만 있었고 가해자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나는 용서 받을 사람이 아니라 용서해 주는 사람이기에,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내 권리라고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용서해 줄 권리도 있고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용서해 줄 것이 많은 입장이십니까? 용서 받을 일이 많은 입장이십니까? 그리고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용서’에 대해 가르치는 바를 살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에 용서 받는 기쁨 그리고 용서하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말씀과 삶 나눔
1. 골3:13을 읽어 봅시다. 용서의 순서를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아야할 사람, 용서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나는 항상 피해자이고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권리자로 여기게 된다. 그렇지만 나의 위치가 먼저 용서받아야할 죄인인 것을 생각하면 용서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2. 사38:17 사43:25을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에 대해 어떻게 약속하십니까?
☞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38:17)’ 하나님께서 우리 죄악을 등 뒤에 던져 버리셨다 했다. 다시는 우리 죄악을 끄집어내 보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전과들을 모두 도말하고 잊어버리신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세월 지난다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망각의 강에 허우적거리고 하시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는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고 다 지워버리시겠다고 하신다. 악한 마귀가 내 마음 속에 찾아와 과거의 죄를 교묘히 끄집어내면서 정죄할 때, 그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속임수임을 기억하고 사탄의 궤계에 속지 말라. 하나님은 그 아들의 대속의 사랑과 긍휼 안에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시는 분이시다.
3.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왕 앞에서 나왔다. 갚을 길이 없는 빚을 그저 다 탕감 받았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데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한 석 달 치 품삯 되는 돈을 빚진 친구를 만난다. 그 순간에 그는 자기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실은 깨끗이 잊어버린다. 은혜를 물에다가 새긴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만 집중한다. 원수는 돌에 새겼다. 그래서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다 던져 버린다. 사람들은 자기는 늘 용서해 주는 사람 입장이고 그래서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반대다. 우리 인생은 용서해 주는 사람 입장이 먼저가 아니라 용서받는 사람의 입장이 항상 먼저이기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 내 권리로 내가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 우리는 ‘용서의 권리자’가 아니라 ‘용서의 통로’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용서할 힘을 길러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이미 흘러들어온 하나님의 용서를 흘러 보내라고 하신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부어주신 용서의 은혜를 흘러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로 채움을 받은 사람으로 그 용서가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는 ‘용서의 통로’이다. 우리는 늘 용서하는 입장이 아니라 용서 받는 입장이 먼저인 사람이다. 따라서 용서 하고 말고가 내 권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를 흘러가게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가 그랬다.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또 다른 그리스도로 이웃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5. 용서하는 것이 왜 나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됩니까?
☞ 썩어가는 웅덩이 속의 물은 웅덩이에 갇히지만 않았어도 맑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큰 강을 이루고 나중에는 결국 바다까지 이를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며 많은 물고기가 살 수 있는 생명력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흘러가지 못하고 웅덩이에 갇히니 생명력은커녕 썩어 죽음의 악취를 내고 만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의 웅덩이, 원망의 웅덩이에 갇혀서 흘러가지를 못하고 인생을 썩히고 허비하는 사람이 많다. 웅덩이에 갇혀 썩어가는 물이 다시 가치를 되찾는 것은 비가 올 때 다른 물과 함께 다시 계곡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하나님 부어주시는 은혜와 용서의 사랑 힘입어 고인 웅덩이, 미움의 웅덩이를 벗어나야 다시 세상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싹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용서는 사실 제일 먼저 나 자신을 풀어 자유하게 하는 일이다. 나를 썩어 악취 나게 만들던 어둠의 웅덩이 상처와 원망의 웅덩이에서 맑은 생명수 강으로 풀어주는 일이다.
6. 바나바와 바울은 서로 뭔가 맞지 않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 15:39-40)’ 원문에는 ‘심히’라는 부사가 없다. 그래서 바울, 바나바가 앞으로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나중 일 생각 안하고 있는 대로 화를 내면서 심하게 싸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다투어’라고 동사로 번역을 했는데 헬라어 원문은 ‘파륵쉬스모스’라는 명사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행15장과 히10장 그렇게 딱 두 번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불일치, 격려’ 그렇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행15:30을 다시 번역해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격려하면서 각자 길을 갔다.’ 서로 의견이 다르니까 정죄하고 미워하고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막 해댄 것이 아니다. 의견이 서로 달라 각자의 길을 갔지만 그러나 서로의 길을 격려하고 축복하며 각자 길을 간 것이다. 그래서 훗날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바나바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6)’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4:10)’ 비록 자기와 의견이 달라 가는 길이 달랐지만 이후에 바울은 바나바가 얼마나 신실한 하나님 종인지 여러 곳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의견이 안 맞고 뭔가 안 맞아 불편한 분이 계시다면, 나와 안 맞아도 그 분의 마음속에는 나와 똑같이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미워하지 말고 격려하고 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함께 하는 기도
⚫ 내가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임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용서의 통로 되게 하소서
⚫ 하나님 은혜 힘입어 상처와 미움과 원망의 웅덩이를 벗어나 평안 사랑 자유에 이르도록
⚫ 나와 맞지 않는 성도 속에도 하나님 향한 사랑 있음 알고 서로 존중하고 용서 사랑하도록
⚫ 120주년 행사들 통해 믿음의 유산 잘 물려주고, 사랑 안에 교제하며, 하나님 나라 비전
⚫ 연약한 지체들 위해, 성도들 가정의 사명과 사랑과 행복, 성도들 복과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