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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시편 103:8-14
    설교일
    2012-01-29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시다  시103:8-14, 12-1주일오전

서론.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수없이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약속하셨다. 오늘 말씀 12절에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신다. 동쪽 끝자락과 서쪽의 끝자락은 결코 만날 수가 없다. 이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성도의 죄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버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사1:18에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사유하심이 있기에, 그 앞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는 모든 심령은 눈보다 더 희게 그 죄를 씻음 받는다.


1.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죄사함의 기쁨과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산다는 사실이다.
1) 죄사함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면, 사실 우리 성도는 오늘 내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고난이 있어도 마음의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다. 오늘 시편103편의 기자 다윗을 보라. 1-2절에서 반복해서 외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자기 영혼을 포함해서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 자기 마음도 심지어 잠시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의 생각의 조각까지도 하나님을 잊지 말고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스스로 권면한다. 무엇이 다윗에게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송축하기를 갈망하게 했는가? 3절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을 베푸사,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고, 그 뿌리를 파악 할 수조차 없는 모든 죄악을 사해주시기 때문이다.
2) 죄사함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면, 우리는 또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자기에게 상처 주고 마음 아프게 했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또 자기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된다. 빌레몬서를 보라.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오네시모는 원래 골로새 교회의 장로였던 빌레몬 집 노예였다. 그런데 그 주인 빌레몬을 배신해서 도망을 가는데, 주인의 재산까지 훔쳐서 도망갔다. 그런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다. 죄사함과 용서의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회개했다. 성령의 역사로 죄의 종노릇하던 오네시모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사람 되는 거듭남과 회심을 체험했다. 이런 오네시모의 변화에 대해 바울은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내게 유익하므로’ 그런다. 이렇게 십자가의 죄사함의 복음으로 변화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다시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보내면서 간곡하게 부탁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바울이 빌레몬에게 하는 말을 보라. 자기 돈을 훔쳐 도망을 간 노예가 오네시모다. 당시 로마법으로 도망간 노예는 주인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든지 아니면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짐승의 밥으로 던져 줄 수 있었다. 이렇게 찢어 죽여야 할 도망간 노예에 대해 바울은 ‘이제 후로는 종처럼 대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 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도 바울이지만 오네시모도 보라. 만약 빌레몬이 바울의 권면을 거절하면 어찌되는가? 십자가에 죽든지 산 채로 짐승의 밥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바울이 적어준 편지 한 장을 달랑 들고, 자유를 얻기 위해 돈을 훔쳐 도망간 이전의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들이 다 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죄사함의 능력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이었고, 그 죄를 하나님이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어떻게 다 멸해 주셨는지 깨닫고 보니, 이제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자존심 같은 것 다 내려놓고 죽을 각오로 자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자기 돈도 명예도 훔쳐가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 준 노예까지도 용서를 넘어 사랑을 나타낼 수 있게 되더라는 것이다.
3) 죄사함이 주는 기쁨을 제대로 체험하면 우리는 또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죄사함의 은혜를 받으라고 죄악 가운데 멸망 길을 달려가는 영혼들을 향해 외치게 된다.
사6장을 보라.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늘 보좌 환상을 본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 스랍이라 일컫는 천사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시고 섰는데, 여섯 날개가 있다.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날면서 서로 화답하여 찬양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스랍들이 찬송할 때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온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온 연기가 가득해진다. 한 마디로 이사야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지 지금까지는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 환상을 통해 그 작은 부분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죄악된 육신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의 작은 부분을 체험하게 될 때, 이사야의 입에서는 본능적으로 탄식이 터져 나온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여기 이사야가 ‘입술이 부정하다’ 하는 것은 입술은 부정하고 나머지는 다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이 입을 통해서 나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 내면 즉 자기의 근본이 부정하다는 말이다. 자신의 전부가 부정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영광을 체험하면서 자기 죄를 보니 탄식이 절로 나온 거다.
그때 스랍 중의 하나가 여호와의 제단에서 핀 숯 하나를 집어 들고 이사야에게 날아와서 입술에 대며 말씀하신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라졌느니라’. 하나님 영광에 비추어진 자기 죄를 볼 때는 죽는 것 외에 달리 소망이 없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그 성전의 숯불로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그 죄를 사하시고 제거하실 때 이사야의 마음에는 사람의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죄사함의 기쁨이 몰려왔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목숨을 드려도 아깝지 않는 감격이 넘쳤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저 완악한 백성들에게 갈꼬’하고 말씀하실 때, 이사야가 기뻐하며 외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지금 두 손 들고 환영하고 반겨줄 백성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과 죄사함의 소식을 전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굳어서 선지자를 배척하고 핍박하는 백성에게 가는 거다. 그래도 이사야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가는 것이 그저 기쁘다. 왜요? 제단 숯불을 그 입술에 대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신 은혜와 기쁨이 가슴에 고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2. 이처럼 죄사함의 은혜를 제대로 체험하면 그 기쁨과 능력은 말로 다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는 이 죄사함의 기쁨과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왜 그렇는가? 오늘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려 한다.

1) 첫째는 많은 성도들이 참소하는 마귀에게 속아서 죄사함의 확신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모든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을 아는데, 정작 마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는 몰라도 나의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하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죄책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10여 년 전에 어느 교회 청년대학부를 섬길 때의 일이다. 당시 35살 된 한 형제가 어느 날 조용히 만나고 싶어 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요즈음은 법이 바뀐 줄로 아는데, 그때는 공무원시험 응시에 나이 제한이 있었다. 그 해가 그 형제에게 마지막 기회였는데, 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마음을 심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자기가 자꾸 아슬하게 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저를 만나기 한 10년 전에 학교 앞의 작은 교회에서 대학부 회장을 했는데, 그때 같이 임원이던 어느 자매와 자취방에서 선을 넘어 버렸다. 그 후로 그런 죄악이 한 동안 계속되었는데, 자매 부모님이 알고 강제로 자매를 서울로 보내 버렸다. 자매와 헤어진 것도 힘들었지만, 그 다음 찾아온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형제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옛날에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시나 생각되고,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얼굴을 보면 늘 그늘이 짙게 져서 세상 걱정 한 몸에 지고 가는 사람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상담을 하면서 제가 세 가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하나는 정말로 철저하게 죄를 회개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회개 없이는 죄사함의 은혜는 없다. 하나님이 주홍빛 보다 더 붉은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회개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 죄를 씻으신다. 둘째는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 그런 죄를 지으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다시 그런 죄를 지으면, 한 번 그 죄를 지었을 때 당했던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인한 고통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더 큰 고통과 영적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은혜를 다시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견딜 수 없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런 죄에 아예 익숙해지면 마치 불신자와 방불하게 되어 은혜에서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도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던 것이다. 셋째는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도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고 학대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해 보상하는 일이 아니라 다만 불신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을 믿고 죄사함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고 권면하였다.

마찬가지다. 혹 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 중에도 과거에 지은 어떤 죄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고통당하는 성도가 있다면, 철저하게 자기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죄라도 널리 용서하시고 능히 씻어 거룩하게 하신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 하시는 분이 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체면치레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마치 죄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는 거다. 어찌 보면 염치 있는 생각 같지만, 잊지 말라. 그건 염치 있는 생각이 아니라 마귀의 계략에 빠진 생각이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마귀가 노리는 게 뭔가? 두 가지다. 하나는 ‘나 같은 사람은 용서를 받아도 계속해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게 마땅해’ 하면서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염치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단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죄악 앞에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다가 그랬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뒤 양심의 가책으로 뉘우쳤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죄사함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지 못한고로 자살해 버렸다. 자살한다고 자기 죄를 씻을 수 있거나 책임지는 것이 아닌데, 마귀는 ‘너의 스승을 너의 주를 부인하고 팔아먹었으니, 너는 이제 아무 소망이 없다.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라’고 부추긴 것이다. 이렇게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 자기 죄에 대해 책임지는 일인 양 속이지만, 그것은 자기 죄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마지막 소망의 줄마저 스스로 끊어버리는 일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마귀는 어떻게든 죄인인 인생들에게 어떤 죄라도 능히 사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더라도 온전한 사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거짓말로 속삭인다. 그래서 마귀를 참소자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렇게 참소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속지 마시고,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사55:7을 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널리(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오늘 말씀 11절을 보라.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렇게 크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죄악을 알고 겸비한 마음으로 인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 사유하지 못할 죄인은 아무도 없다. 어떤 죄인이라도, 어떤 죄악이라도 우리 하나님은 널리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지금까지 숨겨온 모든 죄악을 남김없이 다 고하시되,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죄를 고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사죄의 확신과 기쁨을 누리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참 좋은 글을 하나 읽게 되었다. 10년 정도 전에 제가 상당했던 형제와 비슷한 고민 속에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한 여 성도를 어느 목사님이 상담한 이야기다. 그  성도는 남편도 잘 하고 자녀들도 잘 자라서 아무 걱정이 없는데도, 결혼 전에 지었던 죄로 인하여 남편과 두 자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날로 우울증이 깊어져 갔다. 병원을 다녀 봐도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 남편이 어느 날 목사님께 아내를 데리고 상담을 하러 왔다. 남편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목사님이 솔직하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무에게도 말 못한 결혼 전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면서 ‘도저히 나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은 그 성도를 호숫가에 데리고 갔다. 작은 돌 하나는 집어서 던지라고 했다. 그리고는 돌이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그 성도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았다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큰 돌을 하나 집어서 또 던지라고 했다. 이번에도 그 큰 돌이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역시 호수 밑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고 하자,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큰 죄나 작은 죄나 다 예수님의 은혜의 호수에 들어가면 똑 같습니다. 모두 다 가라앉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죄만 아니라 큰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이런 팻말을 붙여 놓으셨습니다. <낚시금지!>. 그러니 다시는 과거의 죄를 또 떠올리지 말고, 이제 주님의 은혜의 강에 들어가서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 사십시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널리 용서하실 뿐 아니라, 기억조차 하지를 않으신다. 사43:25을 보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신다. 미가7:19도 보라.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죄악을 다시는 아무도 건져 올리지 못하도록 작은 호수가 아니라 아예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신다. 그렇게 우리의 죄악을 도말하시고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 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안에서 철저하게 회개하신 후에, 널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확신하고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죄사함의 기쁨과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두 번째 경우는 자기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경우이다.
통계적으로 정확하게 얼마나 그런지 몰라도, 많은 성도들이 자기 죄에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는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살면서 남에게 크게 해 안 끼쳤고, 도둑질한 적 없고, 살인한 일도 없으니 나는 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가 심각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죄사함 받은 기쁨과 감격도 그만큼 약하다. 실제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사함의 크고도 놀라운 은혜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이다.
눅7장을 보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다. 그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아낌없이 향유를 다 붓는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면, 자기를 만지는 자가 어떤 죄인인 줄 알고 가까이 못하게 했을 텐데’ 하며 예수님을 정죄한다. 시몬의 마음을 읽으시고 주님이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는데, 갚을 것이 없어 둘 다 탕감해 준다면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자신 있게 대답한다.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 이에 주님이 여인과 시몬을 비교해서 말씀하신다. 스스로를 의롭게 여긴 시몬은 모든 인생의 죄를 씻으시는 주님이 자기 집에 오셔도 최소한 손님 맞는 예의도 안 갖춤으로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발에 입 맞추지도 않고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런데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은 노예도 하지 않는 일을 자청해서 행하되,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값비싼 향유도 아낌없이 부었다. 여인이 무슨 마음으로 이 일을 한 것인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태산보다 더 크고 바다보다 더 깊은 자기 죄를 씻음 받을 소망을 본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은혜를 본 것이다. 이런 여인의 믿음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그러면서 여인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보자. 스스로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의 차이가 무엇인가? 죄가 많고 적고 혹은 무겁고 가볍고의 차이인가 아니면 자기 죄를 깨달은 차이인가? 바리새인 시몬은 50 데나리온 정도의 빚만 졌고 여인은 500데나리온 이상의 빚을 진 것인가 아니면 죄의 무게는 같은데 얼마나 철저하게 깨달았느냐의 차이인가?
많이 고민할 것이 없는 질문이다. 스스로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의 차이는 죄가 많고 적고 무겁고 가볍고의 차이가 아니다. 다만 영광스럽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제대로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의 차이 뿐이다.
자기를 죄를 철저하기 본 여인은 거룩하시고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주님 앞에 설 때 그저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찢어지듯 회개의 영이 터진 반면, 바리새인 시몬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므로 거룩하신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도 아무 감동이 없었다. 자기 죄를 깊이 인식한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남김없이 부어드려도 아깝지가 않는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누린 반면, 스스로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 시몬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주님과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도 아무 기쁨과 감격을 몰랐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배고픈 사람하고 똑 같다.
여기서 죄사함의 기쁨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자기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굳은 마음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로 자기 죄의 심각성을 볼 줄 아는 영의 눈이 열려서, 우리의 태산같은 죄악이라도 남김없이 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사죄의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3. 오늘 마지막으로 살필 것은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점이다. 크게 세 가지다.
1) 첫째 악에서 떠나라. 또다시 죄의 종노릇하며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대하7:14을 보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스스로 겸비하여 낮아지고 기도하고 내 얼굴을 찾고 그들이 걸어가는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악을 고칠지라’ 하신다. 여기 하나님이 하늘에서 듣고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의 악을 언제 고친다고 했는가? 세 가지를 말한다. 스스로 겸비해라. 하나님 얼굴을 찾고 구해라. 지금까지 걸어온 악한 길에서 떠나라 그랬다. 이제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2) 둘째 우리가 연약하여 또 넘어질 때, 절망하여 주저앉지 말고 다시 주님 십자가 붙들고 일어나라. 우리가 회개하여 죄사함 받았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세상을 향해 마귀와 죄를 향해 달려갔다면, 이제는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해 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달려가는데, 우리가 약해서 또 넘어질 때가 있다. 쉽게 말하면 성도인데도 연약해서 또 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 잊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달려가다가 넘어진 것이지, 다시 방향이 마귀에게로 세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다가 넘어지면 절망하지 말고 다시 십자가를 붙들고 일어나서 계속해서 달려가야 한다. 잠24:16을 보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의인도 약해서 넘어지지만 다시 하나님을 힘입어 일어난다 그 말이다.
3) 셋째는 이사야와 같이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 보내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라. 때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 기뻐하는 선한 일을 다시 행하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사 그 영원한 인자와 긍휼로 함께 하시고 의의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결론. 오늘은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시다’는 주제로 말씀드렸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 기억하지도 않는 하나님 안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란다. 그 죄사함의 기쁨과 능력으로 악에서 떠나시고,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십자가 붙들고 다시 일어나고,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 힘써 달려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