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12년 1월 15일 "온전하게 되어 봉사의 일을 합시다"
온전하게 되어 봉사의 일을 합시다 엡4:7-16
서론. 우리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 나라 새 백성 새 이스라엘이라 했다. 그래서 엡4:1-6에서는 하나님 나라 새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로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서로 용납함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다. 어떻게 지난 한 주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사랑으로 용납하면서 사셨는가? 늘 받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 순종하므로 성숙해지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1. 오늘 말씀도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에 대한 권면이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생활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권면을 보게 된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녀를 고아원에 갖다 맡기거나 내팽개치지 않고,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으로 돌보고 양육한다. 그러면서 자녀가 몸도 마음도 반듯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가정의 기쁨이 되고 사회에도 유익한 인물 되기를 기대한다.
마찬가지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셔서 하늘나라 새 백성으로 재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로운 교회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잘 자라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하게 잘 섬기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대하신다.
오늘 본문 말씀 엡4:7-16의 말씀의 주제는 한 마디로 하늘나라 새 백성인 우리 성도가 교회에서 어떻게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서, 받은 은사를 따라 잘 섬김으로 몸된 교회를 세워갈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다.
2. 새 백성의 교회생활과 관련하여 오늘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점이다.
7절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은사)를 주셨나니’. 우리 성경이 ‘은혜’라고 번역을 했지만, 정확한 의미는 ‘은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7절 말씀은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첫째는 ‘각 사람에게’ 라고 하셔서 모든 성도에게는 예외 없이 은사를 주셨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나에게는 무슨 은사를 주셨는지 잘 생각해서, 각기 받은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적당한 은사를 주셨다. 그래서 ‘분량대로’ 그렇게 말씀하신다. 너무 과하여서 교만하지 않도록, 반대로 ‘나는 은사가 없어서 섬길 수가 없어요’ 하지도 못하도록 분량대로 모두에게 주셨다.
셋째로 은사는 십자가로 원수 마귀를 이기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간혹 어린 자녀만 집에 남겨 두고 부모가 잠시 집을 떠나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부모는 홀로 있을 자녀들이 염려되어서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먹을 것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잘 준비해 놓고, 혹시 몰라서 용돈도 여유 있게 주고 간다.
마찬가지다. 부활하신 주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과 함께 이 땅에 교회를 남겨 놓고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때 주님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그냥 사명만 맡겨 놓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아셨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교회와 우리 성도가 기쁨으로 주님 맡겨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시고 가셨다. 그 선물이 무엇인가? 바로 은사다. 성령의 은사다.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성령의 은사가 있기에, 우리 교회와 성도는 주님의 몸이 되어서 주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 갈 수 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하신다. 부활승천하실 때 마귀를 사로잡아 무저갱에 결박하시고, 우리 성도에게는 각양 은사를 선물로 주셨다.
3. 새 백성으로 합당한 교회생활과 관련해서 오늘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각 성도에게는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또 목회자를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이다. 11절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그러면 하나님이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12절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심이라’.
1) 여기서 우선 잘 생각해보자.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할 때,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주체가 누구인가? 목회자인가? 성도인가? <말씀을 잘 생각해 보라>
바로 성도이다. 성도가 온전해져야하고, 온전해진 다음에는 성도가 봉사의 일을 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세워져 간다.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고 몸을 세우는 주체는 우선 성도라 그 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은 뭔가? 11절 끝 부분과 12절 앞부분만 다시 보자. ‘....... 목회자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 목회자의 역할은 뭐라구요? 바로 우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우리 성도들이 기존 가지고 있는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뛰는 일꾼이고, 당회를 비롯해서 우리 성도들은 목회자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자라고 생각했다.
비유컨대 축구경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는 선수는 목회자이고 우리 성도들은 관중에서 앉아서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잘 하면 함성을 질러주고 박수도 쳐 준다. 그런데 좀 잘못하면 ‘우 우’ 하면서 야유를 보내고, 심지어 잘못하는 선수를 향해 깡통 같은 것을 집어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는 선수는 목회자가 아니고 우리 성도들이다. 목회자는 선수인 우리 성도들이 잘 뛸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고 전략을 짜 주는 코치의 자리에 있다. 그리고 관중석은 이 땅의 우리 성도의 자리가 아니고, 하늘의 천사들과 우리 앞서 신앙의 경주를 마치고 하늘에 가 있는 믿음의 선배들의 자리다.
따라서 한 마디로 목회자의 역할은 우리 성도들이 온전해져서 봉사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성도 여러분이 목회자인 저를 돕는 게 아니고, 제가 우리 성도들을 도와서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저를 돕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목사인 저에게서 말씀으로 잘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 성도 여러분이 온전해지고 여러분이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여기서 오늘 본문이 먼저 7-10절에서 모든 성도에게 그리스도가 선물로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을 하고, 그 다음 11-12절에서 교회 공동체에게는 목회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 이유가 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목회자는 우리 성도 한 분 한 분이 그 은사를 잘 찾아서 주님을 위해 잘 섬기도록 돕게 하셨음을 말씀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성도님들은 목회자를 응원하고 돕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늘 말씀 그대로 여러분이 온전해져서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2)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을 하나 하나 짚어보자. 세 가지죠. ① 첫째 성도를 구비하게 하는 것이다. ② 둘째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③ 셋째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① 먼저 목회자는 성도를 구비하게 한다.
12절에 보면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라고 하는데, 여기 ‘온전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구비하게 하다’ ‘준비시키다’ 그런 의미이다.
가령 누가 에베레스트 등산을 가려 한다 해 보자.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 에베레스트 등산을 아무나 뒷동산 산책 가듯이 갈 수 있는가? 눈길 미끌림을 방지하는 아이젠도 준비 안하고 훈련도 안 받고 그러고 갈 수 있는가? 못 간다. 에베레스트 같은 산을 등산하려면 여러 가지 특수 장비도 철저하게 준비해야하고, 수개월이상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렇게 필요한 장비도 준비하고 훈련도 받고 하는 이게 뭔가? 바로 ‘구비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우리 성도들이 선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원하시는 사명을 위해 살 수 있도록 준비도 시키고 훈련도 시키는 일을 하는 직분이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선한 믿음의 싸움을 하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구비시켜야 하는가? 최소한 세 가지가 구비돼야 한다.
첫째 굳건한 믿음이 구비되어야 한다. 굳건한 믿음 없이 봉사부터 하면 어찌되는가? 마가가 준비되지 않은 채 선교여행부터 하다가 중간에 도망가 버린다. 그래도 마가는 다시 재훈련을 받아 사명자의 자리에 돌아오기는 하지만, 데마와 같은 사람은 아예 세상을 사랑하여 배도의 길로 가버린다. 뭔가? 굳건한 믿음이 준비돼야 한다. 어떤 환난의 바람이 불고 고난이 있어도 내가 받은 하나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저 천국의 소망 때문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 대문에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해서 사도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구비돼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요동치 않는 굳건한 믿음 위에 서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둘째 잘 다듬어진 신앙인격이 구비돼야 한다. 간혹 우리 성도들 중에는 열심은 정말 특심인데, 문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히고 상처 주는 사람이 있다. 뭐가 문제인가? 주님 위해 일할 수 있는 다듬어진 인격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자기 부족을 아는 겸손한 인격, 다른 사람 의견도 잘 존중할 줄 아는 넉넉한 인격, 양보할 줄 아는 인격, 함께 일할 수 있는 그런 인격이 준비돼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다. 제목이 ‘고슴도치의 딜레마’이다. 추운 겨울 밤 큰 통에다가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 놓았다.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분다.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중간으로 모여든다. 처음에 잠시는 따뜻해지는 것 같다가, 저마다 가진 침으로 상대를 찌른다. 피가 흐르고 고통이 심해진다. 그래서 너무 아파서 고슴도치들이 결국은 흩어지고 만다. 흩어지니까 이번에는 또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모인다. 이번에는 추위가 더 심해져서 더 밀착하다 보니 처음보다 더 세게 상대를 찌른다. 결국 또 흩어진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를 반복하다가 날이 밝아 오는데, 아침에 나가 보니 절반은 얼어서 죽고 절반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고, 결국 한 마리도 살아남지를 못했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지 않는가? 함께 사는 훈련, 함께 일하고 남을 배려하는 훈련, 다듬어진 신앙인격이 구비 안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유익을 주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가르침 받는 말씀을 정말 마음에 새겨 순종하고 또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다듬어진 신앙인격을 구비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는 인격, 어떤 경우에도 불평이나 비난하지 않는 인격,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것을 헌신할 수 있는 인격이 구비될 때,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귀히 쓰신다.
셋째 자기 사명과 은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저 세상에서는 복 받고 살고 죽어서는 천국 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를 그렇게 믿으려 한다. 땅에서는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 가는 게 예수 믿는 전부인 줄 오해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엡2:10을 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하나님이 우리를 왜 새 백성 새 이스라엘로 다시 지으셨다고 하는가?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사명이 있다. 먼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사명,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할 사명, 선교할 사명이 있다. 그저 ‘내 한 몸 안일하게 살다가 편하게 천국가야지’ 그런 생각 이제 버리시라. 내 육신이 닳아서 없어지기까지 사명을 위해 살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성도들을 구비하게 하는 것이 목회자를 세운 첫째 목적이라면
② 이제 두 번째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대개 신앙생활을 하면서 봉사하는 것은 ‘선택 사항’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라. 하고 싶은 사람은 봉사의 일을 하게 해라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를 구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랬다. 모든 성도가 다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봉사를 해야 하는가? 오늘 이후 잊지 마시라. ‘봉사’ 중에는 은사를 따라 해야 할 봉사도 있고,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봉사도 있다. 그런데 여기 12절 말씀이 요구하는 봉사는 우선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봉사다. 어떤 봉사인가? 사람을 섬기는 봉사다. 그래서 여기 ‘봉사’라고 번역한 말은 원래 ‘식탁에서 시중을 들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자기 인격을 다 바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 봉사 대신에 다른 일로 봉사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려 한다. 그런데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봉사는 사람을 섬기는 봉사다. 다른 봉사는 은사가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사람을 섬기는 봉사, 영혼을 섬기는 봉사는 성도라면 누구나가 해야 할 봉사인 것이다. 사람을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이 봉사는 다른 봉사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찬양으로 봉사하니까, 다른 영혼 돌보는 일은 안 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말이다. 봉사의 핵심은 영혼 섬김이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영혼을 섬기는 이 봉사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③ 세 번째 목회자를 세운 목적은 뭔가? 봉사의 일을 하는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잘 구비되고, 또 받은 은사를 따라 함께 잘 봉사하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세워져 가게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벌집 쑤시듯 헤집어 놓고 마음이 완고해서는 허무는 일을 하는 안타까운 일들을 종종 본다. 우리 기장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라고, 정말로 겸손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바란다.
3. 새 백성으로 합당한 교회생활과 관련해서 오늘 크게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목회자의 사역으로 훈련을 받은 우리 성도는 성숙해져서 실제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11-12절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교훈이라면, 이제 13-17절은 우리 성도의 모습에 대한 교훈이다. 그런데 11-12절의 목회자의 역할과 13-17절의 성도의 역할은 서로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11-12절에서는 목회자가 성도를 이렇게 도와라 하는 말이고, 이어지는 13-17절은 그렇게 돕는 목회자에게 잘 가르침을 받아서 성도는 그 가르침대로 이렇게 살아라 그 말이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시면 13-17절의 내용은 표현을 조금 다르게 할 뿐이지 11-12절 내용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교훈을 하는데, 성도는 교훈은 그렇게 받고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면 안 되지 않는가? 그래서 11-12절은 목회자가 성도를 도울 내용이고, 13-17절은 성도가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행해야할 내용이니, 그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성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역시 세 가지다.
1) 첫째 13-14절에서 잘 구비된 성숙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 성숙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한다. 12절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구비시켜야할 것이 있는데 믿음과 신앙인격이라고 했죠? 13-14절이 바로 그 말씀이다. 바른 교훈의 말씀으로 잘 가르침을 받아서 온갖 세상의 거짓된 교훈이나 속임수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고, 나아가 그 신앙인격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즉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단이 와서 거짓 교훈으로 미혹해도 분별할 수 있고, 세상 재리의 유혹이 와도 믿음 팔아먹지 않을 수 있고, 때로 환난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며, 언제나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세상에서 덕을 세워 가야 한다.
2) 우리 성도의 삶의 모습 두 번째는 무엇인가? 15절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 가라’ 하신다.
12절에서 목회자가 성도를 두 번째로 어떻게 도와야 한다고 했죠? ‘봉사의 일을 하게 해라’ 그랬다.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목회자의 두 번째 목적이 이제 성도의 모습에서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봉사의 일’이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 즉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해야 할 참된 일, 선하고 의로운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그 말이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참된 일의 한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심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 다른 영혼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거기까지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물론 처음부터 우리가 다른 영혼을 섬기기 위해 내 목숨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15절을 자세히 보시면 뭐라고 하는가? ‘자랄지라’ 그랬다. 계속해서 성장해 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 초신자 때는 그저 남을 섬긴다는 생각은 못하고 어떻게든 섬김을 받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면 더 많이는 못해도 내가 섬김 받은 만큼이라도 나도 남을 섬겨야지 그렇게 성장 한다. 그러다가 이제 인생의 황혼이 깃들고 주님 만날 날이 다가오는 원숙한 신앙 단계에 가면, 섬김 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지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주고 섬기고 사랑을 베풀고 싶은 그런 마음이 가득해져야 한다. 옛날에는 섬김 받는 것이 즐거움이었지만, 성숙한 신자가 되면 오히려 섬기는 게 즐거운 거다. 뭔가? 자란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제자리걸음만 하지 말고, 사랑 안에서 참된 일 선한 섬김의 일을 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시기를 축원한다. 작년보다는 올해 더 많이 섬기고, 올해 보다는 내년에 더 많이 섬기고 그렇게 자라가야 한다.
3) 성도의 모습 세 번째는 뭔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는 것이다. 12절에서 목회자의 목적 세 번째가 뭐였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것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모습 세 번째도 몸된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것이다.
16절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 16절에서 두 가지를 주의해서 봐야 한다. 하나는 ‘그에게서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그에게서’ 즉 주님에게서 날마다 도움을 받고 연결되어야 된다.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주님에게 어떻게 연결된다고 하는가? ‘마디를 통해서 도움을 받고 연결된다’ 그랬다. 여기 마디가 뭘 상징하는가? 사람의 신체에서 마디가 뼈와 뼈를 연결해 주듯이, 우리 성도와 주님을 연결해주는 마디가 있다. 바로 목회자다. 그래서 성도는 목회자와 함께 은혜 받고 함께 사역할 수밖에 없다. 마디를 통해 주님과 잘 연결되는 건강한 신앙되기 바란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랬다. 마디인 목회자를 통해 주님의 도움을 받고 주님과 연결된 다음에는 받은 은사를 따라 사역하라 그 말이다. 봉사하라 그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는 것이다.
결론. 오늘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교회생활에 대해 말씀드렸다. 핵심은 뭔가? 목회자에게 가르침과 도움을 받아서 첫째는 믿음과 신앙인격이 잘 구비되어야 하고, 둘째는 봉사의 일 참된 일을 해야 하고, 셋째는 마디를 통해 주님과 연결되어 받은 은사를 따라 역사함으로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다.
아무쪼록 늘 제자리걸음하는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성장이 있는 봉사가 있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