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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시편 116:12-19
    설교일
    2011-11-20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116:12-19

 

서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만져 주셔서 받은 은혜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되기를 바란다.

흔히 그런 말을 한다. 감사는 깨닫는 자의 것이다. 정말 그렇다. 똑 같은 은혜를 입었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감사치 않는 사람도 있다. 눅17장을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한꺼번에 고침을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뿐이었다. 왜 인가? 감사는 깨닫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가졌어도 언제나 불평불만이 끊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늘 감사하는 사람도 있다. 감사는 깨닫는 자만이 누리는 은총이기 때문이다.

붕어빵 틀에는 무슨 재료를 넣어도 붕어 모양의 빵만 나오듯이, 그 마음의 생김새가 ‘불평제조기’인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불평을 생산해 낸다. 반면에 그 마음의 생김새가 ‘감사제조기’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만들어 낸다. 감사는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자라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함께 읽은 시116편에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한 순전한 성도를 만날 수 있다. 이 성도는 고백한다. 같이 읽자.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 고백에서 우리는 시인의 두 가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많은 은혜가 있구나하는 깨달음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헤아려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오늘 누구 덕으로 살고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다. 한 10여일 전에 우리 교회 새로 등록하신 분 심방을 갔다. 제가 심방을 가면 간혹 좋아하는 찬송이 뭔지 물을 때가 있는데, 그 분에게도 여쭈어 보았다. 그 분이 택한 찬송이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였다. 그런데 429장 가사를 보면 계속 비슷한 가사가 반복된다.

‘내려주신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 보면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많은지 알게 되고, 그럼으로 항상 찬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새가족이 이 찬송을 그냥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은혜로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오늘 시인도 받은 복을 세어 봄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많은 줄을 깨달았다.

두 번째 시인의 마음에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가만 있을 수 없고 어떻게 좀 보답을 해 드리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많은 것을 해 드려도 받은 은혜의 1/100 아니 천만분의 일도 갚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그 은혜를 갚는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사랑’이다. 그럼에도 받은 그 은혜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는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성도의 최소한의 도리인 줄 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 그러면 시인이 깨달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할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또 무엇인가?

 

1) 시116편을 지은 성도가 받은 은혜는 한 마디로 그의 기도가 응답 받아서, 아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구원해 주신 일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계속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은 일을 만날 때가 있다. 시116편의 기자도 그랬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그런다. 6절에서는 ‘내가 어려울 때에’ 그런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만난 것인지 밝히지 않지만, 고치지 못할 병이 든 것인지, 아니면 원수들이 모함을 하고 죽이려고 달려든 것인지, 혹은 너무나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 것인지, 혹은 너무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을 당한 것인지 밝히지 않지만, 아무튼 시인의 마음은 지금 사망의 포승줄에 꽁꽁 묶여서 도저히 헤쳐 나올 길이 보이지 않고, 거센 슬픔과 환난의 파도 속에 자기 영혼까지 매몰되어 버릴 그런 심정이었다. 주위를 돌아 봐도 딱히 도와줄 사람이 없고 누군가 기댈만한 언덕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앞뒤가 다 막힌 상황에서 시인은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을 붙든다. 뭔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다. 이 시인의 기도를 보라.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고 힘든지 ‘하나님 내 형편이 이만저만 합니다, 그러니 이리저리 도와주십시오’ 하고 자세하게 속사정을 다 진술하지도 못한다. 그저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아뢰기를 ‘하나님 좀 살려 주십시오, 내 영혼을 좀 구원해 주십시오’ 그 말밖에 못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사정을 자세히 다 아뢸 수도 없어 그저 신음하듯이 살려달라고만 애원하는 시인의 기도를 우리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래서 6절에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였도다’ 하신다. 8절에서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하고 고백한다. 시인은 그저 ‘주님 살려 주십시오’ 그랬는데, 우리 하나님은 시인의 형편 사정을 자세하게 살펴서 그의 영혼은 사망의 위협과 억눌림에서 건지시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의 발은 넘어져 다치거나 망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셨다. 시인이 알고 두려워했던 환난에서 건져 주셨을 뿐 아니라, 시인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그런 환난에서까지 건져 주신 것이다.

우리 사람이 그렇게 지혜롭지를 못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어떤 위험이 내게 닥치고 있는지 한치 앞도 다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내가 아는 일에 대해서는 간구할 수 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한 일은 간구조차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인처럼 진실한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위험과 환난에서까지 건지시는 줄 믿는다.

이렇게 시인은 그의 마음과 영혼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응답하심을 받았는데, 그러기에 1-2절에서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

 

2) 그런데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환난만 아니라 미처 몰랐던 위험들로부터도 나를 건지시고 지키시는 이런 은혜를 시편116편의 기자만 받았는가?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 은혜로 살아간다. 그러기에 오늘 시인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하면서, 자기가 수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듯이, 우리도 은혜 받아 사는 줄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란다.

시인의 고백을 다시 보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1-11절에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기도했더니 건져주신 이 은혜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은혜라고 고백한다. 이번에 이 환난에서 건져 주신 것도 은혜지만, 환난 없이 평탄하게 사는 것도 은혜더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은혜더라는 것이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여기서 좀더 생각을 해보자.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에는 어떤 은혜들이 있는가? 사실 이것 다 헤아려 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오늘 대표로 4가지 정도만 살펴 보자.

 

➀ 첫째 오늘 건강한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것부터 은혜인 줄 안다. 사실 우리는 삶의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을 잘 모르고 지낼 때가 많다. 그런데 병원을 한 번 가보라. 건강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정상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임을 배우게 된다. 또 주변을 한 번 보라.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의 연속인가? 그 중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 은혜다.

저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니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참 놀라운 것은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는 이유를 모른 채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죽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무런 기쁨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자살공화국이라 하지 않는가? 잠정적인 우울증 환자가 10%를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시대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은혜 받으면서 기뻐하면서 삶의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할 제목인 줄 믿는다.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 301장에서 우리가 뭐라고 고백했는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우리가 정말로 이런 은혜 받고 사는 줄 믿는다.

 

➁ 두 번째로 우리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의 삶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 지루해하고 싫증을 느끼고 그래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하는 상상을 하면서 감사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평범한 일상의 싸이클이 한 번 무너져서 당황해보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저희 집 큰 애를 임신했을 때, 집사람이 몸이 안 좋아서 임신인 줄도 모르고 병원을 갔다. 임신 초기인데 지금 상태라면 거의 유산하게 된다고 안정될 때까지 입원을 하라 했다. 한 1주일 입원하니까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집사람도 병원생활을 힘들어해서 장모님 집으로 옮겨서 거의 5개월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평소 이것저것 집사람이 다 챙겨주고 저는 거의 교회 일에만 신경 썼는데, 갑자기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니까 한 동안 참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알았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하루하루 별탈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삶이 참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목사인 어느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루는 아들 목사가 들어오면서 아주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 들 : 아버지, 오늘 저에게 너무 감사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버지 :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 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 정말,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 그래? 어서 말해 보아라.

아 들 : 오늘 교회에서 집으로 오다가 차가 세 바퀴나 굴렀어요.

그런데 상처 하나 없이 이렇게 말짱해요.

아버지 :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

아 들 : 아버지는 네 바퀴 굴렀나요?

아버지 : 아니.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가장 평범한 하루가 감사할 때 가장 행복한 하루라고’. 감사함으로 평범한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어 가시는 지혜로운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➂ 세 번째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되새기며 감사해야 한다. 평범한 일상에 대해 감사함을 잊어버리는 것 이상으로, 또 우리 성도들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둔해져서 그저 당연한 일이려니 하고 별로 감사를 못 느끼고 살 때가 많은 것 같다. 처음 예수 믿을 때 죄사함 받은 것 때문에 감격하며 눈물 흘리던 일은 아득한 옛날의 추억으로만 남아있고,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둔감해져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 없이 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예수님 믿어서 나는 너무 행복해요’ 하는 고백이 흔하지를 않다.

우리가 입술로는 늘 찬양한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이렇게 찬양하면서 실제 우리 마음에는 ‘나는 예수님 한 분으로는 부족해요’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은 것 같다.

오늘 시편 기자는 어떻는가? 그의 마음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막 꿈틀거리고 있다. 그래서 13절에서 소리친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소리치는 시인에게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도 이런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감사해야 하는 줄 믿는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것만 생각하면 기쁘고 춤을 추어야할 일인데, 그런데도 왜 구원의 감격이 쉽게 사라지는가?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스펄젼 목사님은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딱 5분씩만 경험하게 해 주면 좋겠다’ 그러셨다. 천국을 단 5분만이라도 다녀오면 그 기가 막힌 천국에 내가 들어갈 것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그 어떤 고난도 감사할 수 있고, 정말로 날마다 주님 은혜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찬송하고 또 찬송할 것이다. 지옥을 단 5분만이라도 다녀오면 내가 거기 가지 않을 것 인해 감사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서 거기 보내지않고 천국 데려가려고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꼭 천국과 지옥을 직접 갔다 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계시록 21장을 보면 천국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천국에는 다섯 가지가 없다.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애통함이 없고, 아픔도 없다. 반면에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길 좌우에 열두 가지 생명나무가 맺힌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에 햇빛조차 필요 없는 온전한 영광과 기쁨과 찬송이 울려 퍼진다.

이런 천국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구원받은 은혜를 인해 날마다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송하며 사기를 축원한다.

 

➃ 네 번째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가시’조차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살전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시’까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가시가 있었다. ‘육체의 가시’였는데, 성경은 동시에 ‘사탄의 사자’라고 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왜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나? 그 이유는 이 육체의 연약함을 틈타 사탄이 다른 사람들이나 바울의 마음을 시험하는 도구로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는 이방인의 사도인데, 그에게 누구나 다 아는 육체의 질병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아니 사도가 뭐 그래, 남의 병은 잘도 낫게 한다더니 자기 병은 왜 못 고치는 거야 혹시 가짜 아냐?’ 그럴 수 있다. 바울 자신도 인간적으로 계산해보면 이 육체의 가시 곧 육신의 병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빨리 고쳐서 건강하게 살면 더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 세 번이나 간절히 이 사탄의 가시를 떠나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다. 그때 주님의 답변이 뭐였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육체의 가시가 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못하게 하는 은혜의 장치요, 또 사람의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기가 막힌 방편임을 말씀하셨다. 이것을 알고 바울이 뭐라고 고백하는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그런다. 심지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한다. 한 마디로 뭔가? ‘가시’까지 감사한다는 말이다. 가시를 인해 더 감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성도인지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뭔가? 바로 인생의 가시조차 감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리스도를 위해 찔림 받는 가시까지 감사하다면 우리는 온전한 성도이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기장교회 성도들은 ‘가시’조차 감사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2. 이처럼 사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세어 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 이렇게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 줄을 깨달았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시편의 기자처럼 말해야 한다. 같이 읽자.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러면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께 어떻게 보답하겠다고 하는가? 13-19절 말씀을 보면 크게 두 가지를 고백한다.

1) 첫번째 13절이다.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조금 표현을 바꾸어 17절에서 한 번 더 고백한다. ‘내가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똑 같은데, 앞에서는 ‘구원의 잔을 들고’ 그랬고 뒤에서는 ‘감사제를 드리며’ 그랬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다르게 ‘찬양한다’ 혹은 ‘예배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구원의 잔을 들고 혹은 감사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원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겠다는 말이다. 진심으로 경배하겠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바로 ‘마음을 담은 예배, 감사를 실은 예배’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 젊은 청년들이 좋아하는 가스펠송 중에 ‘마음의 예배’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 마지막 가사가 이렇다. ‘주님께 드리는 맘의 예배, 주님을 위한 주님을 향한 노래, 중심 잃은 예배 내려놓고, 이제 나 돌아가 주님만 예배해요’.

바로 이것이다. 중심 잃은 예배,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마음이 꺼림칙해서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 혹은 의무적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를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구원의 잔을 들고’ 감격하면서 드리는 예배, 자원해서 ‘감사제 곧 감사의 마음이 담긴 예물’을 하나님의 전에 올려드리면서 전심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가 회복돼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또 진심으로 감사해서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바란다.

 

2) 둘째로 시편의 기자는 또 무엇으로 받은 은혜를 보답하려 하는가? 14절이다.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이다’. 이번에도 표현을 바꾸어 18절에서 한 번 말한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이다’.

서원을 이행한다는 것은 똑 같은데 앞에서는 서원을 갚으리라 그랬고, 뒤에서는 서원을 지키리라 한다. 시편 기자가 무엇을 서원한 건지 밝히지 않아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성경에서 서원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첫째는 거룩하게 살겠다고 맹세하는 나실인의 서원이다. 둘째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서원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지금 시116편의 기자는 서원을 갚는다고도 하고, 지킨다고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이 시편 기자는 한나처럼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 서원도 했고, 또 나실인의 서원처럼 ‘앞으로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서원도 한 것 같다. 그래서 드리겠다는 서원에 대해서는 ‘갚으리이다’ 그러고,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서원에 대해서는 ‘지키리이다’ 그랬다.

이 둘을 묶으면 결국 이 시편 기자의 서원은 다름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제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것이며, 자기의 삶은 전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일에 헌신하겠다는 서원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거창하게 말만 해 놓고 나중에는 오리발 내밀지 않도록 두 번이나 ‘모든 백성 앞에서’ 갚으리라 ‘모든 백성 앞에서’ 지키리라 한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대단한 것을 하니 좀 보고 알아다오’ 하고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속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기가 서원한대로 반드시 남은 생애는 하나님 위해 살고,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들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사용하며 살겠다는 말이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서원을 따라 주님께 드리고, 또 서원을 따라 내 삶 전부를 주님 위해서 살아가기로 작정하면,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 다 받으시고 우리는 빈털터리 인생이 되게 하실까요?

오늘 마지막으로 15절16절을 같이 보자.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라 ....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무슨 말인가? 받은 은혜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 하면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서원을 따라 내 삶을 모두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우리가 드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내 인생 전체가 주님의 보물이 되게 해 버리신다. 15절에서 경건한 자의 죽음까지 하나님이 귀중히 보신다 했지 않는가?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요 두려움인 죽음까지도 귀중하게 만드신다 했으니,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이 우리 인생 자체를 하나님의 보물로 삼으신다는 말인 것이다.

그것만 아니라 16절에서는 우리의 결박을 풀어 주신다 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성도에게 육신의 결박, 마음의 결박, 영혼의 결박, 가정의 결박까지 풀어주시는 분이신 줄 믿는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가지고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하는 그런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