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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고리도전서 15:8-11
    설교일
    2011-12-18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8-11

 

 

서론. 어제 위임식에 많이들 참여해주시고 또 수고해 주신 것 감사하다. 무엇보다 부족한 사람을 여러분의 영혼을 맡은 목사로 받아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10월16일 처음 부임할 때 무슨 설교를 할까 참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었는데, 위임식을 마친 첫 주일인 오늘도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 많이 생각하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에 바울 사도의 고백이 제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말씀을 붙들고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회 때 기도를 하는데, 제가 어릴 때 자랐던 고향에서 있었던 일, 사역자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고민했던 일, 19년 동안 거쳐 왔던 여러 교회들에서 사역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제 마음에 정말로 고백하게 되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구나’.

살아온 세월을 돌아볼 때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이 많은지, 왜 그리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았는지, 정말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목사로 만드시려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인내해 오셨는지, 얼마나 기막힌 사랑으로 빚으시고 다듬어 주셨는지, 그런데도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씨름하는 사람인데 여전히 은혜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지, 한 동안 바쁜 일상에 묻혀 잊고 지냈었는데 위임식을 계기로 다시 한 번 하나님 은혜를 추억할 수 있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이 고백이 어찌 바울 사도와 저만의 고백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며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조금이라도 추억해본다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누구나 이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줄 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성도들 심령이 늘 은혜에 젖어서 날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는 이 은혜의 고백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고백에는 크게 2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는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깨달음이고, 또 하나는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 하는 깨달음이다.

 

 

1. 먼저 바울은 은혜받기 전에 자신이 어떤 죄인이었는지를 분명히 깨닫고 있다. 은혜 받을 아무런 이유도 공로도 자격도 없었음을 고백한다.

1) 그래서 8절을 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그런다. 9절에서는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한다.

흔히 만삭되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나 조금은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켜 팔삭동이 혹은 좀 속어로 팔푼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들에게 팔삭동이니 팔푼이니 그렇게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참 신기하게도 자기 스스로 ‘나는 팔푼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다. 왜 바울은 스스로 자기를 ‘팔푼이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자기비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바울이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이어서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불렀기 때문인가? 물론 둘 다 아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이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젊은 날 혈기왕성하고 의협심에 불타고 ‘자기 의’로 충만해서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모질게도 핍박했던 사람이다. 스데반이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 당할 때, 바울은 살의가 찬 눈으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스데반이 죽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 그리고 이후에는 아예 자기가 직접 예수 믿는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려고 앞장서서 일하기까지 한다. 이런 바울에 대해 행9:1에서는 ‘바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렇게 말한다. 물론 그때 바울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한 옳은 일인 줄 여기고 그렇게 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에 ‘위협과 살기가 가득했다’는 것은 예수님 만나기 이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악독하고 완악한 사람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을 만큼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또 어떻게 살았었는지 돌아보니까, 자기가 행한 일들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천벌을 받아도 수없이 받아 마땅한 일들을 겁 없이 저지르고 살았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악한 일들을 행하였던 이유는 바로 자기 마음이 너무나 부패하고 완악한 연고였기 때문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기 마음속이 마치 검은 숯 덩어리처럼 통째로 죄악 덩어리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니 저절로 고백이 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입니다’.

흔히 바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을 보고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을 쓴다. 작은 빙산의 조각이 바다 위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사실 수면 아래에 타이타닉과 같은 거대한 배도 한 방에 좌초시켜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얼음덩어리가 숨어 있다.

우리 인간의 죄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우리 입에서 남을 비난하는 말 한 마디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남을 욕하는 말 한 마디 이면에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에서 남을 미워해서 소리치는 사악한 천둥같은 소리가 울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되 사랑의 눈빛으로 보지 않고 무시하거나 괄시하는 눈으로 한 번 눈짓하는 그 이면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교만덩어리와 완악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우리가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 그래서 살면서 도둑질한 적 없고 강도질 한 적 없고 살인한 적도 없으니 나는 그래도 꾀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죄덩어리를 감추어 둔 채, 겉으로는 ‘의’로 자기를 포장해서, 남도 속이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자기 자신까지도 속여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2)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이 지은 시편51편을 참 좋아한다. 같이 한 번 찾아보자.

1-2절 같이 읽자. ‘하나님이여 .....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이 짧은 두 절에서 다윗은 애간장을 녹이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기 죄를 깨끗이 씻어 달라고 애원한다.

다윗이 왜 이렇게 간절하게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애원하는가? 3-5절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또 같이 읽자.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5절을 잘 보시면 다윗이 아주 중요한 사실을 3가지나 고백한다. 첫째는 내 죄가 항상 있다는 고백이다. 3절에 그러죠?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저 숨을 쉴 때마다 죄를 먹고 마신다는 말이다. 둘째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반역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고백이다. 4절에 그러죠?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다 보고 계신 앞에서 보란 듯이 죄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소한 죄라도, 죄를 짓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다. 모든 죄에는 ‘하나님이 보시긴 뭘 봐, 하나님이 알고 갚긴 뭘 갚아’ 그런 마음이 우선된다 그 말이다. 셋째는 제일 중요한 고백인데, 왜 이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고백이다. 5절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기 죄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더는 말이다. 죄 중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죄인이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맺히고 포도나무에는 포도열매가 맺히듯이, 날 때부터 죄인된 인생이기에 죄악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눈 여겨 보아야 할 게 있다. 다윗이 이렇게 자기는 죄 중에서 잉태되고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는 깨달음이 언제 생겼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얼마나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하다고 칭찬들은 인물 아닌가? 그런 다윗이 어떻게 자기라는 사람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전부다 죄악 덩어리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으며, 무엇보다 자기는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느냐 말이다. 시편51편이 언제 기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서론을 보면 그 때를 알 수 있다. 시편51편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고, 자기 죄가 들통 나는 게 두려워서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어버리고, 그러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지적해 줄 때 지은 시이다.

뭔가?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죄를 숨기려고 간접 살인까지 저지른 다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지’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윗은, 지금까지는 하나님 은혜로 인해 더 큰 죄를 짓지 않고 살았을 뿐이지, 사실 이미 자기 속에는 어머니 태속에 잉태되고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무슨 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이 가득한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전에는 이런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어마어마한 죄악 덩어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밧세바 사건으로 천인공로할 죄를 짓고 나서 보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자기 속에는 이미 태산보다 더 큰 죄악덩어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니 이제 다윗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여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오나, 오직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편51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다윗은 자기기 저지른 간음죄를 용서해 달라거나, 간접 살인죄를 용서해 달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왜 그럴까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기 마음속에 숨어있던 죄악 덩어리를 보고 나니까, 겉으로 드러난 간음죄 간접살인죄 이것 용서받는 것 가지고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마음속에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죄악덩어리가 숨어 있으니, 겉으로 드러난 간음죄 간접 살인죄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용서받아야할 것은 바로 죄악 덩어리인 자기 자신임을 안 것이다. 죄악 덩어리 자체인 자기 자신이 용서를 받을 때 자기가 지은 모든 죄들도 함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은 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이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악 덩어리인 죄인인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3) 다윗과 같은 사건은 아니었지만 2008년도에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로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의 배려로 한 해 동안 안식년을 가졌는데, 매일 아침에 집에서 새벽기도 대신에 QT를 하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제 속에 뭐가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 마치 과학자들이 사람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포 속에 뭐가 있는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저의 마음이 어떻게 생겨 먹었고 또 저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앉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으로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탄식했다.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지 보면서 제 자신이 미워졌다.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보면서 저라는 사람이 혐오스럽기까지 하였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일에 너무나도 미숙하고, 나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얼마나 발 빠른 사람인지 보면서 고통했다. 얼마나 인정받기 좋아하고 칭찬듣기 좋아하는 얄팍한 사람인지 보면서 울었다. 무엇보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 성도들 앞에서 얼마나 가면을 많이 쓰고 살았는지 모른다. 사랑이 많은 목회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영적인 목회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긴장하며 살았는지 저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게다가 또 얼마나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지 목이 굳어 화강석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저의 그 적나라한 모습들을 보며 가슴을 치고 회개했는데, 그렇게 회개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제 속에는 그런 연약함과 부끄러운 인격과 성품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를 않고 계속해서 찌꺼기가 남더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렇게 적나라한 저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지만, 변화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런 모습이 너무 많아 앞으로도 평생 변화되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오죽 했으면 안식년을 마치고 사역지로 돌아올 때, 제 안에는 없는 것들을 하나님이 선물로 부어 달라고 간절히 붙들었던 기도제목들이 생겼는데 그것을 사자성어처럼 만들었다. 그 사자성어는 ‘충정관사’였다. 첫 번째 ‘충’은 게으르지 말고 충성스럽게 살되, 더 이상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버리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자는 뜻이다. 그 다음은 ‘정’이다. 정직의 ‘정’ 자이다. 목회자로 살면서 저도 모르게 실제의 내 모습 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긴장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놓고 살자, 나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저 진솔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어서 정직하자가 기도제목이 되었다. 세 번째는 관용의 ‘관’자이다. 관용하자. 마음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제 ‘나 중심적인’ 옹졸함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넓은 마음으로 살아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다른 교역자나 성도들 시기하지 말고 도리어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배려해주면서 그렇게 살아보자는 뜻에서 관용의 ‘관’자를 기도제목으로 붙들었다. 마지막은 사랑의 ‘사’자이다. 이제는 그저 목회의 의무를 이행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제발 하나님이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좀 부어 달라는 뜻에서 사랑하며 살자는 것을 기도제목으로 붙들었다.

그래서 충성의 ‘충’ 정직의 ‘정’ 관용의 ‘관’ 사랑의 ‘사’자를 모아 ‘충정관사’가 안식년을 마치면서 붙들게 된 저의 기도제목이었고, 지금도 이 기도제목으로 저는 기도한다.

그렇게 한 해 동안 많이 아파하고 울면서 그 후로는 하나님 앞에 살려고 참 많이 애도 썼었는데, 어제 저의 위임식을 계기로 저는 다시 저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지난 한 주간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담임목사로 사역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그릇이 안 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여러분은 모르지만 하나님과 저만 아는 저의 심히 부족함을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부탁드린다. 혹 지난 두 달 동안 제가 사역하면서 우리 기장교회 성도님들 마음을 아프게 했거나 잘못한 게 있다면 주님 사랑으로 용서하시기 바란다. 저는 아직도 부족한 목회자다. 아니 평생 부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용서하시고 부족한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2. 이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고백은 먼저 자기의 인생과 마음을 살펴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악 덩어리인가를 깨달은 사람의 고백인데, 나아가 두 번째로는 그런 죄인에게도 하나님은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고백은 죄인으로서 절망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죄인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살 소망을 얻은 사람의 고백이다.

 

1) 8절을 다시 같이 보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으며’.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내게도 보이셨으며’ 그랬다.

여기 ‘보이셨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그를 사도로 삼으시기 위하여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인데,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신 것을 의미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바울에게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보이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가 않는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권능을 우리는 믿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친히 보이셨는데, 이 일을 두고 바울은 ‘내게도’ 그런다. 무슨 말인가? 부활의 주님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시는 것은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데, 자기에게 보이신 것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예수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들 보면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이라고 삿대질하고 이를 갈면서 대적했던 사람인데, 그런 자기 같은 사람도 구원하셔서 그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주시려고 ‘나 같은 자’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도 보이셨으며’.

 

우리 성도님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뭐냐고 물으면 305장이라 답하는 분들이 많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송을 작곡하신 분은 노예 상인이었던 죤 뉴톤 목사님이시다. 젊었을 때 노예선 선장이 돼서 수많은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았다.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탈영을 했고, 나중에 붙들려서 자기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15개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 죤 뉴톤이 주님 앞에 꼬꾸라지면서 지은 시가 바로 ‘나 같은 참혹한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이다.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회개하면서, 나중에 노예해방운동의 정신적인 지주로 사역하면서 이 찬송을 지었다.

이 죤 뉴톤 목사님이 한 번은 설교 중에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국에 가면 세 가지 사실 때문에 깜짝 놀랄 것이다'고 했다. 첫째는 천국에 가면 꼭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둘째는 천국에서 다시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을 천국에서 보게 돼 깜짝 놀랄 것이다. 셋째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 좋은 천국에 왔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했다.

무슨 말인가? 단 한 사람도 자격이 있어서 천국에 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 생각할 것 없고, 자기 자신을 보면 안다. 나 같은 죄인이 죄사함 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 중의 은혜인데, 예수님이 내 속에 당신을 나타내신 은혜의 결과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도 보이셨으니’하는 이 마음, ‘나 같은 죄인도 불러주셨으니’ 하는 이 마음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시기 바란다.

 

2) 이렇게 만삭되지 못한 자 같은 바울에게 나타난 은혜는 먼저 구원의 은혜이고 더 나아가 직분까지 맡겨 주신 은혜 때문에 바울은 또 감격한다. 그래서 9절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한다. 구원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당치 못할 은혜인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되어서 이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셨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반장을 더러 했다. 4학년 때 선생님이 박카스를 좋아하셨다. 자습하는 시간이 되면 저에게 돈을 주시면서 동네 가게에 가서 박카스를 사오라고 시켰다. 친구들이 그것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한 친구는 자건거를 잘 탔는데, 자기가 운전해 줄테니 꼭 저보고 같이 가자해서, 저는 자전거 뒤에 편하게 앉아서 선생님 심부름을 하곤 했다. 선생님 심부름한다고 저에게 한 번도 콩고물이 떨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선생님 심부름 하는 게 좋았다. 왜 좋은가? 초등학생 눈에 선생님은 하늘같은 분인데, 그 하늘같은 분에게 인정을 받아야 심부름을 하지 아무나 그 심부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바울 사도의 마음이 그러하다. 천지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에게 사명을맡기신다는 것은 ‘내가 너를 믿는다’ 하는 그런 의미 아닌가? 게다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일을 맡기실 때는 우리가 이루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상급을 준비해놓고 맡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딤후4:8을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 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그렇게 고백한다.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사명을 맡기실 때는, 우리가 그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세상은 알 수 없는 놀랍고 신비로운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는 법이다. 그래서 바울 같은 경우는 육신의 몸을 입은 자로서 삼층천까지 다녀오지 않았는가? 사명이 큰 만큼 베푸시는 은혜도 큰 것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자기 같은 사람 구원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직분까지 주셔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신 것을 정말로 감사했다. 세상에서 대통령 비서실장만 되어도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가?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의 사도되고 직분자 된 것을 생각할 때 감사 위에 감사가 넘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직분들을 결단코 하찮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는 잘 몰라서 그러지, 하늘의 천사들은 지금 우리를 보고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 모른다. 장차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노릇 할 하나님 나라 후사들인 우리가, 잠시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을 보면서 천사들은 한없이 흠모하는 그런 직분을 우리가 받은 것이다.

 

 

3. 그러면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0절 하반절 말씀을 다 같이 보자.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은 한 마디로 받은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은혜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빛을 내도록, 은혜가 은혜 되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것인가? 두 가지다. 첫째는 충성이고 둘째는 겸손이다.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나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내가 많이 수고했다 그러지 않는가? 주님을 위해 많이 헌신하고 수고하고 섬기는 삶, 곧 충성이다.

그렇게 충성한 다음에 바울이 또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충성한 것이 혹 자기의 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런다. 자기가 충성하며 산 것 마저도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라는 것이다. 겸손 아닌가?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기장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은혜 받은 줄을 깨달아서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마음을 품고, 먼저는 충성하시고, 충성한 다음에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하나님 은혜인 줄 알고 겸손히 충성하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