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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사무엘상 1:9-18,26
    설교일
    2011-11-06

죽기내기로 기도하라  삼상1:9-18,26

 

서론. 우리 성도님들이 아마 고 박윤선 목사님을 많이들 알고 계실 것이다. 저는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여러 분에게 그 분의 삶과 사역에 대해 듣고 참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올해 초에 고 박윤선 목사님이 생전에 설교하셨던 원고를 모은 기도에 관한 설교집이 한 권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제가 아주 은혜 받으며 다 읽다. 책 제목이 <죽기내기로 기도하라>이다.

오늘부터 몇 주간은 기도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하는데, 첫 번째 설교제목을 뭐라 할까 고민하다가 박윤선 목사님 책이 생각났다. 그래서 오늘 한나의 기도에 대해 살피면서 설교 제목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고 정했다.

옆사람과 한 번 인사 해 보자. ‘죽기내기로 기도 하십시다’.

 

1. 오늘 예배 자리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는가?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한나라는 여인은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입니다’하고 자기를 소개한다. ‘나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살맛나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이다. ‘나는 기도의 능력이 무엇인지 경험하였고 그래서 오늘도 기도하며 사는 여자입니다’ 그런 얘기다.

1) 한나가 처음부터 이런 고백을 하며 살던 여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15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다. 아무리 상대가 제사장이지만, 그래도 타인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하고 자기 인생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을 처음 대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한이 많고 괴로움이 심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는 여자입니다’하는 고백을 하기 전에 한나는 먼저 인생의 아픔을 겪은 여인이었다.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여인이었다. 가슴 저미는 사연을 가진 여인이었다. 가시밭길을 걸어보았고 밤을 지새우며 신음해 보았다. 그 심령이 오죽 상하고 고통스러웠으면 한마디로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그러겠는가?

2) 한나의 마음이 왜 그리 슬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녀를 낳지 못한고로 그 대적인 브닌나가 심히 격분하여 괴롭혔기 때문이다. 임신을 못해서 가만 내버려 두어도 상실감과 자괴감으로 너무 힘이 든데, 대적 브닌나는 그것을 이용해서 한나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심장을 후벼 파며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낸다. 한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든지 7절을 보면 울기만 하고 먹지를 않는다. 아니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를 않아서 못 먹었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은 너무 슬픔이 가득차서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고 그저 그 마음속에 있는 아픔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3) 이랬던 한나의 삶이 완전히 바뀐다. 18절을 보면 얼굴에서 수색이 사라진다. 얼굴에 근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나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는 말이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 아닌가? 사람이 잠시 잠간은 마음을 숨길 수 있어도, 결국 마음이 얼굴빛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얼마나 얼굴빛이 달라졌느냐 하면, 아이 젖을 떼고 다시 성소로 올라갔을 때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래서 26절을 다시 보면, 이전에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하고 말하던 그 여자가 바로 자신임을 믿게 하려고 맹세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성도님들 심령에도 하나님 역사하셔서 얼굴빛이 달라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2. ‘마음이 슬픈 여자’ 한나가 어떻게 ‘얼굴에 수색이 없는 여자’ 한나로 바뀌었는가? 한나는 그 슬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죽기내기로 기도했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기내기로 기도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우리 영혼의 아버지신데,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방치하시겠는가? 나 몰라라 하시겠는가?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러면 한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기내기로 기도했는가?

 

1) 죽기내기로 기도한 한나의 기도는 먼저 암울한 시대 속에서 혼자라도 기도의 끈을 붙잡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라.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았다고 한다. 삼상4:13과 18절에서도 두 번이나 더 엘리가 여호와의 전 옆에서 의자에 앉아 있음을 말한다. 뭔가?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엘리는 영적으로 무력한 사람이 되어서 그저 육신의 안일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전을 지키는 제사장인데, 기도의 자리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의자에 그저 몸을 기대고 편히 쉴 생각만 하고 있다.

제사장만 그런 게 아니다. 9절 초두에 보면 ‘그들이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런다. 함께 성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기까지 했지만, 한나의 남편인 엘가나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무슨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제사장이 그러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안일해진 모습이다.

이렇게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는데, 유독 한나는 홀로 외로이 여호와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의자에 앉은 엘리와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기 마음의 슬픔을 인해서이긴 하지만 홀로 기도의 끈을 붙잡은 한나를 우리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시는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주신 아들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으셨다. 그 마음이 슬퍼서 시작한 한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 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살이가 별 걱정이 없어서 영적으로 안일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나처럼 마음이 슬퍼서라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편이 훨씬 더 복되다는 생각이다. 안일함에 젖어 살다가는 언젠가 크게 넘어지는 날이 온다. 성소를 지키는 제사상 엘리가 그렇게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다가 결국 나중에 그 의자에서 거꾸러져 목이 부러져 죽지 않는가? 안일함이 영적인 죽음은 물론이고 육신의 죽음까지 불러 온 것이다. 그러나 먹지도 못할 만큼 마음이 괴로웠던 한나는 그 슬픔을 안고 죽기내기로 기도함으로 얼마나 그 인생도 그 영혼도 은혜의 꽃을 피우게 되는가? 그래서 삼상2장을 보라. 한나가 너무 기뻐서 찬양의 기도를 드린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마음이 슬픈 한나의 기도에서 마음이 즐거운 한나의 찬송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한나를 사랑하시니까, 한나를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려고 한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한나가 잉태하지 못했던 이유가 어디 있는가?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 한다. 하나님이 그리 하셨다. 왜 그리 하셨는가? 한나의 마음이 슬퍼서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자리로 몰아가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전심으로 기도하라고 부르시는구나 생각하고, 한나처럼 슬프고 억눌린 마음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줄 믿는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 한 분을 뵈었다. 오늘 한국교회 위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현상 유지만 해도 목회 잘 하는 시대다’고 하셨다. 제가 말은 안 했지만 마음은 너무 아팠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너무 신뢰를 잃어가는 마당에, ‘현상유지만 해도 잘 하는 것이다’는 말을 위안삼고 사역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시대도 한나와 사무엘 때처럼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한나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장교회 성도 여러분! 암울한 시대에 혼자 죽기내기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은총을 입어 하나님 나라 역사에 쓰임 받은 한나처럼, 오늘 이 시대에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2) 죽기내기로 기도한 한나의 기도는 두 번째로 전심으로 자기 심정을 하나님께 통하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잘 보라.

10절이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3절도 보자.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여기 10절과 13절을 같이 보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10절에서는 ‘통곡하며’ 그랬다. 13절에서는 속으로만 말하는데 입술은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는 않는다 한다. 그러면 한나가 어떻게 기도한 것인가? 통곡은 뭐며, 속으로 말한 것은 뭔가?

이 두 구절을 같이 보면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한나의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처음에는 기도의 자리로 나가자 말자 통곡이 터져 버렸다.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는 아픔과 설움 때문에, ‘아버지’하고 하나님을 부르자마자 주변 사람 의식할 것도 없이 그냥 통곡이 터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한참 동안 통곡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통곡할 기력조차 남지를 않는다. 그러나 한나의 마음은 여전히 너무 간절하다. 아직도 기도의 소원이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한나의 마음은 여전히 통곡을 하는데, 차마 소리조차 낼 기력이 없어서 입술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기도생활을 많이 해 오신 분들은 한나의 이 모습이 이해가 되실 것이다. 정말로 내 속은 너무 간절해서 불이 붙는데, 밖으로는 소리조차 낼 수 없는 기도이다.

한 마디로 한나가 통곡한 것도 자기의 마음을 다 쏟아 부은 것을 의미하고, 말이 속에서만 맴돌아서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기도도 자기의 영혼까지 쏟아부어 기도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소리 내기가 귀찮아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 100%를 쏟아 붓는 기도를 드렸다 그 말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이 엘리 제사장에게는 이해가 안 된다. 왜요?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엘리는 한 번도 이렇게 기도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으로 으레 해야 하는 절차 때문에 기도했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혼신을 다해 기도해 본 적이 없는 엘리였다.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어 전심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한나의 기도가 어떻게 이해되는가? 통곡을 했다가, 입술은 동하는데 속으로만 말했다가 하는 그런 기도의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영혼을 쏟아 기도하는 한나에게 와서는 책망 한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기도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거꾸로 기도하는 사람을 방해하기 위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런 엘리에게 한나가 대답한다.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 나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여호와 앞에 자기 심정을 통하는 그런 기도를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통곡하여 부르짖기도 하고, 또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어서 입은 움직이는데 속으로만 말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께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해 보라. 마음을 다 쏟아서 한 번 기도해 보라. 그러면 어떤 날은 성령께서 내 심령으로 통곡하게 하신다. 어떤 날은 마음은 너무나 간절한데 속으로만 기도하게 하실 때도 있다. 소리내어 부르짖건, 속으로만 말하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통할 때까지 죽기내기로 전심으로 기도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온 마음을 쏟아 우리 심정을 하나님께 통하는 기도를 드리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난다. 정말로 나타난다. 18절 보라.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가 영혼을 쏟아 기도하고 나니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한나 자신도 놀랄 일이 일어났다. 뭔가? 밥이 넘어가더라는 것이다. 7-8절을 보면 한나의 남편이 한나를 위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게 아무 위로가 안 되었다. 여인에게 남편의 사랑보다 더 큰 위로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런 남편의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어서 차마 밥을 못 먹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가 영혼을 쏟는 기도를 드린 후에는 밥이 먹어진 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대적 브닌나가 뭐라 해도 이제 더 이상 마음이 격동 당하지를 않는다. 브닌나의 얼굴을 봐도 더 이상 격분하는 마음이 올라오지를 않는다. 오히려 마음에 평강이 임한다. 한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그 마음속에서 솟아난다. 그래서 얼굴빛까지 바뀌어 버린다.

무엇인가? 영혼을 쏟아 자기 심정을 하나님과 통할 때까지 기도한 한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만져 주셨. 성령께서 치유하셨다. 새힘을 주신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져 버린 것이다.

여러분! 한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도 정말로 영혼을 쏟아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만져 주신다. 우리 심령을 치유해 주신다.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몸은 세상에 거하지만 마음은 하늘에 살 수 있는 은혜의 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한나처럼 마음의 슬픔을 안고 영혼을 쏟아 부어 정말로 죽기내기로 기도하는 우리 기장교회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3. 이제 기도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요즈음 설교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정말로 구체적인 어떤 변화와 순종이 매주 하나씩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참 많은 설교를 듣는데, 들을 때는 고개를 끄떡였는데 곧 잊어버리고, 실천이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권면을 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 4가지 권면을 하고자 한다.

1) 첫째, 뜻을 정한 기도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살면 좋겠구나 기도하고 살아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끝내지 말고, 정말로 구체적인 뜻을 세워보시기 바란다.

‘나는 예수 믿은 지 10년이 넘었으니 새벽마다 하루에 30분은 기도하겠다’ 하고 뜻을 정하든지, 나는 아직 기도를 잘 하지 못하니 ‘하루에 10분이라도 하겠다’ 한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5분, 저녁에 자기 전에 5분 그렇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겠다’ 하든지 아무튼 각자의 형편에 맞게 뜻을 세우고 기도하기 바란다.

우리가 뜻을 세워놓아도 매일 실천하는 게 쉽지가 않는데, 아예 뜻을 세우지도 않으면 사실 거의 기도생활이 어렵다. 바쁘게 살다보면 그냥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니 뜻을 세우는 것이 기도를 실천하는 첫 단추가 된다.

다니엘을 보라.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워 기도하는 인생을 살았지 않는가? 원수들이 다니엘을 음해하려고 다리오 왕을 신격화시켜서, 왕 외에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 다니엘은 이 말도 안 되는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서도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랬다. 다니엘의 뜻은 하루 세 번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하루도 어기지 않고 실천하며 살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해버리셨다. 다니엘은 털끝 하나 손상을 입지 않았다. 뜻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서 결단코 잊은바 되지 않음을 아시고, 뜻을 정해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뜻을 정했으면 실천의지를 굳게 하기 위해 저에게 문자라도 넣으라)

 

2) 둘째 중단 없는 기도, 꾸준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도의 맛을 잘 못 느끼고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저는 요즈음 새벽에 기도할 때면 막 기대가 된다. 내가 오늘 이 기도를 드리는데 우리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해주실까 기대가 된다.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기도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기도한 것을 기가 막히게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했는데, 그 후로부터 제 마음에는 ‘좋으신 내 아버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시구나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이 강하게 왔다. 그 후로는 기도할 때 기대가 된다.

이렇게 기도의 재미를 한 번만 맛보면 우리는 시116:1-2의 다윗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 드렸는데 하나님이 다윗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 그것 때문에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막 솟아나고, 나는 평생토록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기도생활을 쉬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왜 기도의 재미를 맛보지 못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중단 없는 기도, 꾸준한 기도를 안 하기 때문이다. 한두 번 기도해보고 특별한 응답이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으니까 그냥 쉽게 포기한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평생에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분으로 유명하다. 기도한 바로 그 날 응답받은 것만해도 3천 번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죠지 뮬러 목사님이 기도에 대해 쓰진 책 <기도법>이라는 책을 보면, 뮬러 목사님이라고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번은 뮬러 목사님이 불신자 5명을 놓고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아플 때도 여행을 갈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한다. 그런데 그 5명 중에 겨우 1명이 18개월이 지나서야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 계속 기도했다. 두 번째 사람이 5년이 지나서 돌아왔다. 또 기도했다. 세 번째 사람이 6년이 지나서 돌아왔다. 그런데 뮬러 목사님이 <기도법>이라는 책을 쓸 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 지로부터 36년이 지났는데도 두 사람은 회개할 생각을 안 했다. 결국 그 책에는 두 사람이 돌아온 얘기가 없다. 그런데 나중에 뮬러 목사님이 죽음을 앞에 놓고 있을 때 놀랍게도 4번째 사람이 돌아온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사람은 뮬러 목사님이 죽은 다음에 회개하게 된다. 뭔가? 5만 번 응답받은 뮬러 목사님 같은 분도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중단 없는 기도를 드리되 거의 40년 동안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 5명을 모두 구원해 주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장교회 성도 여러분! 당장 응답이 안 된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뜻을 정해서 꾸준히 중단없이 기도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세 번째다. 기도수첩을 활용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방금 소개해드린 죠지 뮬러 목사님의 <기도법>을 읽으면서 제가 큰 감명을 받은 것 중의 하나가 기도수첩을 활용하는 일이었다. 뮬러 목사님이 어떻게 자기 기도가 5만 번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바로 기도수첩에 일일이 기도제목을 다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도 요즈음은 기도수첩을 활용한다. 이게 제 기도수첩이다.

기도수첩을 활용하면 몇 가지 정말 유익한 것들이 있다. 우선 내 기도가 언제 어떻게 응답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응답받은 것을 보면 내 믿음이 더욱 강해지게 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이 풍성한지도 알게 된다.

기도수첩을 활용하면 또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고 중언부언 하지를 않는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성령님이 주시는 기도제목들이 있는데, 그것을 기록해 놓으면 다음에 또 기도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기도 부탁한 것을 기록해 놓으면 잊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수첩을 활용하면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고 구체적인 기도생활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도 기도수첩을 하나씩 마련해서 꼭 활용하시기 바란다.

 

4) 네 번째 권면이다. 가능하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에 나와서 기도해 보십시오.

행1:14을 보면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한 일에 대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한다. 행2:1에서도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랬다. 뭔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다.

행12장도 보라.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죽이니까 유대인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옥에 가두어 놓고 무교절이 지나면 처형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쇠사슬을 푸시고 옥문도 여시고 베드로를 옥에서 구원하지 않는가?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제자들이 모인 곳에 가 보니 저들이 뭘 하고 있었는가? 행12:12에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기도했다. 그래서 처형되기 바로 전날 밤에 하나님은 극적으로 베드로를 수렁에서 끌어 내셨다.

우리 기장교회 성도님들! 정 시간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혼자 기도하시면 된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나올 수 있으면 새벽이든 수요일이든 나오셔서 함께 기도하심으로, 선하신 주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축원한다.

 

결론. 주님 사랑하는 기장교회 성도 여러분! 죽기내기로 기도하며 살자. 한나처럼 영혼을 쏟아 붓는 기도를 드리자.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 이제 정말 구체적으로 결심해 보십시오. 이번 주에 가시면 꼭 기도수첩을 준비해 보십시오. 꾸준히 기도해 보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같이 기도해 보십시오.

그래서 한나 같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을 만져 주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맛보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