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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고린도후서 13:5
    설교일
    2011-01-23

거듭남의 증거(구원의 확신) 고후13:5

 

서론. 함께 읽은 고린도후서13:5 말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

하나는 내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라 하신다. 내가 가진 믿음이 구원받을만한 참된 믿음인지 혹은 잘못된 믿음은 아닌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믿음이 구원받을만한 참 믿음이라면 그 증거는 무엇인지 말해봐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확증하라 하신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확신 위에 굳게 서라는 말이다. 참된 믿음이 있으면,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비틀거리지도 말고 확신 가지고 담대하게 살라는 말씀이다.

 

1. 딤후1:12을 보면 바울이 고백한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하나님께 맡긴 자기의 영혼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이 붙드사 끝까지 지키시고 반드시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실 줄 확신했다. 이런 확신이 바울을 담대케 했다. 복음에 미치게 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고난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핍박이 와도 즐거워하였다.

히6:19은 또 이렇게 말씀한다. 같이 읽자.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6장 문맥을 보면 ‘이 소망’은 ‘구원의 확신’을 가리킨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영혼의 닻과 같다 한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어긋난 길로 가지 않고 휘장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한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 우리 영혼은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함과 기쁨을 누린다.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게 하고, 좋은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이 우리 영혼에게 주는 유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2. 반면에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불안하다. 평안함이 없다. 기쁨으로 섬기지 못한다.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영적으로 눌리고 두렵다.

저는 확신 없는 봉사가 얼마나 비참한지 뼈저리게 체험해 본 사람이다. 대학 1학년 때 선교단체에서 전도를 자주 나갔는데,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하는 말을 할 때마다 제 양심이 저에게 망치질을 했다. ‘야 너도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감격이 없는데 그 소리가 어떻게 입에서 나오냐. 너부터 그 구원이라는 것이 주는 기쁨을 먼저 누려봐라. 그러고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해라’ 그러는 것 같았다.

존 웨슬리 아시죠? 선교사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서 두려워 떨었다. 그때 배 한쪽 편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안하게 찬송하는 경건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고 다시 말씀을 연구하다가 루터의 글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그 후로는 그의 사역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는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고, 반면 올바른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삶을 주님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3.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할 게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잘못된 확신을 가지는 것은 더 위험하다는 점이다. ‘구원 얻을 만한 참된 믿음’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데도,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마음 편케 사는 것은 참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등에 고장난 낙하산을 달고 뛰어 내린 것과 같다. 낙하산이 있으니 안심하고 땅을 향해 신나게 내려온다. 그런데 그 낙하산이 고장이 났으니 어떻게 되는가? 사정없이 땅 바닥에 곤두박질할 것이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 이런 결과를 낳는다. 구원받은 줄 알고 열심히 믿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천국문 앞에 섰는데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낭패이겠는가?

그러기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되, 거짓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내 믿음이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라는 증거가 없는 거짓 확신에 속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고후13:5을 다시 보면 2가지 명령을 하신다. 하나는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라,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살피라 그 말이다. 또 하나는 확증하라는 것이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라는 증거가 있는 믿음이 내 안에 있다면, 바울처럼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살라는 것이다. 확신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평안도 누리고, 고난도 이기고, 죽도록 충성도 하면서 살아라 그 말이다.

 

4. 그러면 내가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뭘까요? 내 영혼이 거듭났음을 확신해도 좋은 증거들이 뭐냐 그 말이다. 구원의 증거에는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가 있다. 그 중에 오늘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증거 5가지를 말씀 드리려 한다.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고, 이 외에도 많은 증거들이 있는데, 오늘은 내적이면서도 주관적인 5가지 증거를 말씀드리는 것이다.

 

1) 내 영혼이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는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있어서 거리낌이나 어색함이 없고, 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평안함과 정겨움 그리고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

롬8:15-16을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신다.

우리가 거듭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래서 우리 신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하나님이 내 영혼의 아버지이신 것이 믿어지고,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친근한 사랑으로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가정에 자녀들이 아무리 철이 없어도 용돈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준다 해서 이웃집 아저씨를 보고 ‘아버지’하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지 못한다. 그게 안된다.

마찬가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의 평안함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없다. 그렇게 불러지지가 않는다.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때때로 다급한 일이 있고 의지할 데가 필요해서 ‘아이구 하나님’하고 신적인 존재를 찾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게 신을 찾아도 거듭나지 않은 이상 하나님께 대해 내 영혼의 아버지로서 누리는 따뜻함과 신뢰와 평안은 누릴 수가 없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심령이 되어야 성령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고 너는 그의 자녀이니, 너의 아픔을 가지고 아버지께 이야기해라, 너의 기쁨을 가지고 아버지께 감사해라’ 그렇게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어도 ‘아버지’ 그러는 것이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버지’ 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내가 가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게 하는 증거는 내가 정말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사랑한다는 점이다.

누가 구원 받은 참 믿음을 가졌고 누가 참 믿음이 아닌가를 우리 사람이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간혹 목회자로서 목회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짚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있다. 언제냐 하면 교회에 다닌 햇수가 오래되었고 신앙생활 한 연륜이 제법 쌓였는데도 자기가 얼마나 가망성 없는 죄인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렇게 지적하고 비난하는 분을 만날 때이다.

사람이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그냥은 모르지만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잘 볼 수 있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고 성경에 내 삶과 마음을 투영해보면, 우리는 정말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은혜 받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고백하는 말은 한결 같다. 뭔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이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자기를 가리켜 ‘죽은 개와 벼룩 같은 자’라고 했다. 시편에서도 다윗은 ‘내가 모태에서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죄인 중의 내가 괴수’라고 했다. 그런데 다윗이나 바울의 이런 고백들은 겸양으로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워 본 사람, 온전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하나님 나는 소망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자기가 정말로 소망 없는 죄인임을 알면 옆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 영혼이 죄악 가운데 망하게 되었는데, 옆 사람 얼굴에 먼지가 묻었든지 옷에 때가 있든지 그것 지적하며 정죄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의 심령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소망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고 산다.

울산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교회에 큰 은혜를 입어 2008년도에 1년간 안식년을 보냈다. 에스라성경대학원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저는 정말로 많이 울었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그렇게 소망 없는 죄인임을 쳐다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기적인지, 어떻게 그렇게 추하고 더럽고 음란한지, 어떻게 그렇게 위선적이고 거짓된 사람인지, 어떻게 그렇게 내 안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돋보기로 들여다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지 정말로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을 자꾸 하게 된다. 겸손한 척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저의 죄악됨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 줄을 알게 되어서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죄인이요 부족하기 짝이 없다는 게 진실이니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심령에는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생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사랑과 감격을 갖게 된다.

절망적인 자기 죄를 보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가 보인다. 십자가의 능력이 믿어진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된다. 십자가가 내 생애 최고의 자랑이 되고, 내 삶의 가장 귀한 보배가 된다. 내 죄의 실상을 보고 나니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 제가 보여 드리지는 못하지만, 제 오른 팔에는 거의 10cm 가까운 큰 흉터가 있다. 이 상처는 제가 태어난 지 한 달 정도부터 발병해서 수개월 동안 제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단’이라는 병의 흔적이다. 어린 아이에게 곧잘 나타나는 ‘단’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한 종류는 사람의 속에 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몸 밖으로 나는 경우라 한다. 옛날에는 의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해서 몸 안에 단이 생기면 대개가 죽었고, 몸 밖에 발병해도 죽는 일이 많았다 한다. 제가 갓난아기일 때 이 단이 생겨서 머리를 비롯해서 온 몸이 고름 투성이가 되어서 제대로 눕혀 놓을 수도 없었다 한다. 그래서 제 상태를 보고 사람들이 포기하라고들 이야기 했었다 한다. 그런데 다들 포기하라 해도 그럴 수 없는 분이 계셨다. 누구일까요? 부모님이다. 저를 살리기 위해 저의 아버지가 입으로 주야를 무론하고 일일이 고름을 다 빨아 내셨다고 한다. 그래서 참 기적같이 제가 살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 큰 누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 그렇게 말이 없으신 저의 아버지 사랑이 뭔지 참 가슴 뭉클했다.

그러면서 생각했었다. ‘그렇구나, 바로 우리 주님이 내 속에 있는 그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나는 죄악을 빨아내시려고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내 심령의 그 더러운 것들 때문에 그렇게 모진 고난과 멸시를 당하셨구나’ 생각했었다.

그렇다. 여러분! 버러지 같은 우리네 인생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죄로 얼룩진 우리를 살리시려고 주님이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 주님을 생각할 때 거듭난 성도의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으며,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또 노래한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세월이 갈수록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를 향한 뜨거운 사랑과 감격이 더 충만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거듭나서 구원받은 세 번째 증거는 뭔가? 배고픔을 알고 양식을 찾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현저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먹을 것 달라고 떼쓰는 일이다. 그래서 젖을 먹고 배가 부르면 잠을 자고, 일어나서 또 배가 고프면 운다. 왜 그렇는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으니까 배고픔을 느끼고,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피로 죄 씻음 받아 거듭나면, 우리 속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있어서 이전에는 몰랐던 영적 배고픔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양식을 찾게 된다.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배가 고파서 고통하게 된다.

영혼의 양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은 현저하게 병이 들었든지 아니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현저하게 병이 든 경우는 그다지 크게 배고픔을 못 느낄 수는 있는데, 그러나 그 경우도 아예 안 먹고는 못 산다.

몸이 아파서 거동을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도 링거를 맞아도 맞으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양분은 섭취하듯이, 그 영혼이 병들어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는 사람도 일단 거듭나서 영적 생명이 그 속에 있다면 그 영혼의 기능은 그만두고서라도 영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은 찾게 되어 있다.

나아가서 영혼이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성도라면, 단지 생존을 위한 영의 양식이 아니라, 그 양식을 먹고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고 영적 활동을 해서 열매를 맺기에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영혼의 양식을 요구하게 된다.

마4:4에서 뭐라고 하는가? 같이 외워보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항상 느끼고 체험하는 그런 진리의 말씀이다.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혼의 양식을 날마다 먹어야만 살 수가 있다.

아무튼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세 번째 증거는 영적인 배고픔을 알고 그래서 영혼의 양식 - 곧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갈망하게 된다 하는 것이다.

 

4) 네 번째로 거듭난 증거는 죄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죄를 지으면 그 마음이 괴롭고 곤고해지며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워진다 그 말이다.

① 이 네 번째 증거는 우리 성도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요일5:18을 보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요일3:9도 같이 보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여기 말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니까 바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난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 씨’가 있어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여기 거듭난 성도 속에 거한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씨’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씨’에 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해석이 다양했는데, 어떤 이는 말씀이다, 어떤 이는 사랑이다, 혹은 진리라고도 했다. 또 어떤 분은 영원한 생명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것이다 하고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거듭남에 관한 성경의 여러 가르침을 같이 생각해보면 ‘성령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거듭나서 성령님이 그 속에 거하는 자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씀인데, 여기에 또 굉장한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 성도님들의 경험에서 볼 때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에 죄를 안 짓고 살았는가? 아니다. 다들 거듭난 후에도 죄를 짓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서 그것 때문에 가슴을 치고 뼈를 깍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것을 시편이나 여러 성경에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 요한일서 말씀들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하는가?

② 이런 어려운 문제를 교묘히 이용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진리에서 어긋나게 만든 이단이 있다. 뭐죠? 구원파다.

구원파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죄책감으로 고통당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의 심리와 요한일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기성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어떤 궤변이 나오느냐하면, 예수를 믿는 성도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어서 죄를 안 짓는 것인데, 그런데 내가 때때로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짓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의 권능이 죄를 짓는 것이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한다. 그러니 일단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이후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고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이 완전히 해방된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한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궤변인데, 그런데도 귀에 솔깃한 면이 있다. 왜 그렇는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죄책감으로 많이 시달려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믿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잘 변하지를 않고 여전히 죄 앞에 굴복할 때가 많나 고민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파의 교리가 더 이상 죄책감으로 고통하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미끼를 제공하기 때문에 귀가 솔깃할 수 있는 것이다.

③ 그러면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문자 그대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씨인 성령을 좇아 살 때 우리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다. 거듭난 사람으로 우리 속에 와 계시는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서 온전히 살기만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씨인 성령님께서는 결단코 우리가 범죄하도록 하시는 영이 아니시라 그 말이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현실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좇아 살지 못하고, 아직도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육신의 법을 쫓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성령님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도 남아 있는 ‘옛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인가? 바로 나의 옛 사람의 흔적이 되살아서 나로 범죄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는 말씀도 진리이고, 동시에 우리가 성령을 온전히 좇지 않고 육신의 소욕에 이끌림으로 인해 범죄하고 그래서 회개해야한다는 것도 진리이다.

이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붙잡아야지 구원파처럼 한 가지만 붙들고 늘어지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그 말이다.

④ 다시 정리를 해 보자.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실이 죄와 관계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먼저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온전히 좇아 살 때 죄를 짓지 않는다 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연약하여 육신을 좇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을 때에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그 죄에 대하여 증거하시고 책망하시고 또 탄식도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거듭난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된다.

그러기에 거듭난 사람은 성령을 좇아 죄를 짓지 않든지, 혹은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때문에 그 지은 죄를 인하여 심히 아파하는 가운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토설하게 된다. 자기 속의 죄를 다 토해 내기까지는 거듭난 성도의 심령이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묶어서 이해하면 거듭나서 구원받아 성령님이 그 심령 속에 거하시는 네 번째 증거는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거듭난 증거다. 죽어라고 죄가 미워지는 마음이 거듭난 증거다.

 

5) 이제 마지막 다섯째 증거는 뭔가? 죄를 미워하는 소극적인 단계를 넘어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팔복 중에 세 번째가 무엇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가 구원받아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 마음에는 거룩한 소원, 의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내 계획과 목표를 이루었다고 만족할 수 없고, 주님이 기뻐하는 선한 일,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만 만족할 수 있다.

이것저것 양손 가득 가져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것이지만 나눔으로 만족한다. 원수를 반드시 갚아주어야만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용서하고 복을 빌면서 신령한 만족을 얻는다.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우리가 거듭난 증거요 구원받은 믿음이 있다는 표징인 것이다.

그래서 마7:17-20에 뭐라고 하는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신다.

빌1:11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다.

 

결론. 오늘 하나님은 신령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씀에 따라 우리 성도님들은 정말로 내가 구원 얻을만한 참된 믿음이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보시기 바라고, 그 참된 믿음의 증거를 살핀 후에는 확증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란다. 구원의 확신 위에 굳게 서는 신앙이 되기 바란다.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머뭇거리지 말고, 이제 약속의 말씀 굳게 붙잡고 확신 위에 서기 바란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 때문에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고, 다윗처럼 내 안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작은 죄의 조각이 남아 있어도 철저하게 죄를 토설하고, 히브리서 기자처럼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주님이 교훈하신 것처럼 의를 사모하고 순종하여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살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