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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y 31, 2014
  • 4663

장사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눅23:50-24:12, 14-2오전

서론. 이 시간 예배하는 뭇 심령에 하늘 아버지의 풍성한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사도신경 강해 여섯 번째다. 오늘은 ‘① 장사한지 ②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는 고백을 살펴본다.

오늘 살필 고백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장사 지낸 바 되셨다. 둘째 장사 지낸 바 되신 주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1. 대개 성도님들이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은 많이 생각하고 묵상도 하는데 비해, 장사 지낸 바 되신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그런데 사복음서는 예외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의 헌신을 통해 장사되신 것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사도신경도 십자가에 죽으신 후 곧바로 부활하신 것을 고백하지 않고,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을 구별하여 고백한다.

1) 사복음서는 왜 주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을 주목해서 기록했는가? 우선 그 까닭은 주님께서 분명히 죽으셨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함이다. 무덤에 묻히는 일은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일이다. 가족 중에 누가 죽어 장례를 치룰 때면,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마다 감정적인 반응이 조금씩 다르다.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입관할 때, 발인할 때가 다 다르다. 그런데 대개 정서적으로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일 때는 땅에 묻거나 화장하기 위해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갈 때다. 육신이 그야말로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면 ‘아 정말 돌아가셨구나 이제 다시 볼 수 없구나’ 하는 것을 절감한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장사 지내진 것은 그 육신이 분명히 죽은 것을 확정하였다.

장사 지낸 바 되신 일 외에도 성경은 예수님이 분명하게 숨을 거두고 죽으신 사실을 여러 모양으로 확정한다. 요19:31-37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안식일의 예비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누군가가 저주받은 모습으로 나무에 달려 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빌라도는 군인들을 시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 해서 시체를 치우라 명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다리를 꺾은 다음 예수님의 다리도 꺾으려고 보니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다리를 꺾는 대신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러서 죽은 것을 확인하였다. 그것만 아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히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 시체를 달라 하니, 빌라도가 벌써 죽었는지 의아해서 백부장을 불러 죽었는지 되물어 확인하기도 하였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낸 후에 유대인들은 또 빌라도를 설득해서 무덤을 큰 돌로 막고 인봉하고 군인들로 지키게까지 함으로, 예수님이 분명히 죽으신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왜 이렇게 거듭해서 예수님이 분명히 죽은 사실을 확증하는가? 사도신경처럼 장로교회가 가장 권위 있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받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0문에서 아주 명쾌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의 죄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는 달리 치를 길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이 다 치루어졌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 였다.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 거두시는 일을 이루신 것이다.

2) 이처럼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이 분명히 죽으신 사실은 우리 죄값이 다 치루어진 것을 확인하시는 일이셨는데, 주님은 죽으실 뿐 아니라 무덤에 장사까지 지낸 바 되심으로 육신이 죽어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무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까지 완성하셨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사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일로부터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장사되시는 일까지,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우리를 영원한 죄의 저주와 죽음의 형별에서 구원하시는 일들이었다. 이 진리에 대해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36문은 아주 의미 있는 고백을 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로 있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

여러분! 그렇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거룩하게 나셨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모태에서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 가운데 태어나는 그 모든 죄를 가려주실 수 있으시다. 뿐만 아니라, 이제 거룩한 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을 치루시고 무덤에 장사되심으로 주님은 이제 사람이 마지막 가는 곳 곧 죽음의 자리 무덤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 되셨다. 장사 지낸 바 되심으로 무덤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주님의 권세에 대해 계1:18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무덤, 지옥)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러분! 만약 마귀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도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신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를 거기서 능히 구원해 주신다.

3)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값을 치루셨고 장사 지낸 바 되심으로 사망과 음부와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셨다면, 우리 신자가 왜 여전히 육신의 죽음을 당하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대신 죽어 무덤에서 우리를 건졌다면, 우리는 육신으로도 죽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명쾌하게 답변해 준다. ‘신자의 죽음은 ① 자기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②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③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 그리고 우리 대신 죽으셨는데도 신자가 한 번은 육신의 죽음을 당하는 것은 우선 죄값이 다 치러지지 않아서 다시 죄값을 치루기 위함이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 우리 죄값을 다 치루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값을 치룰 일이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지만 우리의 죽음은 그렇지가 않는 거다.

죄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면 왜 신자가 육신의 죽음을 당하는가? 그 첫째 이유는 ‘죄 짓는 것을 그치기 위함’이다. 신자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가 있고 또 연약해서 죄를 지을 때도 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다면 죄짓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신자의 신앙 양심과 심령에 큰 괴로움과 고통이 된다. 여러분! 거듭난 신자는 절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의를 사모하는 마음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연약해서 죄를 지으면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영적 고통이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첫 번째 특징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하셨다. 거듭난 신자는 의에는 주리고 사모하지만 죄는 밉기 때문에, 이 땅을 사는 동안 치열한 죄와의 싸움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제 육신의 죽음을 당하면 어찌되는가? 죄와 씨름하는 일이 끝이 난다. 죄의 유혹에서도 완전히 해방된다. 그러기에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실 크나큰 복이다. 은혜다. 죄와의 싸움과 고통에서 온전히 해방되는 일이기에 복이다. 계14:13이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대개 우리가 죽음으로 수고를 그친다고 할 때 이 땅에서 짊어진 인생의 짐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더 중요한 뜻은 죄와의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죄값을 치루는 것이 아닌 신자의 죽음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인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 우리 신자는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면 그 즉시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영생에 들어간다. 어떤 분들은 신자가 죽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수면 상태 곧 영혼이 잠자는 상태에 머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 신자는 죽으면 그 즉시로 죄와의 싸움을 그치고 그 대신 온전한 의와 거룩함 가운데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지극한 기쁨과 위로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그 때의 한량없는 영광과 기쁨은 지금 우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것들이다.

이 세상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은 사실 죽음을 심히 두려워하게 된다. 입으로는 ‘죽으면 그만이지’ 하면서도 실제로는 죽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쓰게 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또 죽음 너머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지 못함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죄와의 싸움으로 생각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는 성도는, 이 땅의 삶을 나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청지기로 알고 사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에서조차도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육신의 죽음은 죄를 그치는 일이요 영생에 들어가는 일이며 영원히 하나님 안에 안식을 누리는 일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다. 빌1:23이다. ‘내가 (삶과 죽음)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살전5:10도 보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러분!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실 뿐 아니라 장사까지 지낸 바 되심으로 우리를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건져 내셨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살든지 죽어 이 세상을 떠나든지 주님과 함께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죽음조차도 유익하다.

이 믿음 가지고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음조차도 우리에게 축복인 줄을 알고 하늘 아버지가 부르실 때 감사함으로 죽음의 요단강 건너실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2.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후 장사지낸바 되셨던 우리 주님은 당신이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고전15장에서 말씀하시듯,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모든 인생 가운데 믿는 자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 말하자면 십자가와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초석이다.

1) 오늘 본문에도 나타나듯이, 열한 제자를 비롯해서 주님을 따랐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신 주님이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주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갔다. 주님이 부활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열한 사도에게 달려가 주님 부활의 소식을 알리지만 제자들은 하나같이 여인들의 말을 허탄하게 여긴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도 무덤에 가서 확인조차 해 보려 하지 않는다. 다만 베드로와 요한만 무덤에 달려가서 세마포만 남겨진 것을 보고,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시신이 없어진 것에 대해 기이하게 여겼을 뿐이다. 이처럼 사도들을 비롯해서 가장 가까이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마저도 주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다시 사셨다. 마28장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큰 지진이 나고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러 버리고 그 위에 앉아 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병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되었다. 돌을 굴려낸 천사들은 향품을 가지고 찾아온 여인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밝히 증거하였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 베드로가 달려가서 확인한대로 주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는 개켜 진 채 그저 무덤 속에 놓여 있었고 그야말로 무덤은 비어 있었다.

수많은 부활의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신비로운 몸이지만 동시에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는 몸으로 친히 찾아오신다.

가장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요20장을 보면 빈 무덤을 확인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간 후에도 마리아는 무덤 앞에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흰옷 입은 두 천사와 함께 주님이 찾아오셔서 마리아를 만나주신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물으시지만, 마리아는 처음에 주님이신 줄을 몰라본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인자하신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실 때 비로소 마리아는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 알았다.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바로 그 날 저녁, 곧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도마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한 자리에 모였고 문은 닫혀져 있었는데, 홀연히 부활하신 주님은 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 가운데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여드레가 지났다.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던 도마도 같은 집 안에 모였을 때 주님은 또 다시 열한 제자를 찾아 오셨다. 그리고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친히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 보게 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다.

이 외에도 갈릴리로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주님은 또 찾아오셨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도 동행하시며 친히 말씀을 풀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시고 저들의 눈을 열어 부활의 주님을 깨닫게 하셨다. 또 고전15장을 보면 육신의 동생이자 훗날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사도가 될 야고보에게 나타내 보이셨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40일이 지나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서 많은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승천하심으로 또 보여 주셨다. 맨 마지막으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다시 나타나셨다.

이렇게 주님이 역사적으로 부활하신 일은 너무나 확실한 증거들과 증인들이 있기에 행1:3에서 말씀하신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고 다시 사셨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 그러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오늘 제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여러 번 인용했는데, 역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5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하고 묻고서 답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서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잘 정리해 놓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째 그리스도 자신이 칭의를 얻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의롭다 함을 받으셨다는 말이 우리 성도들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딤전3:16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으시고’. 여기 보면 예수님이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셨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옳다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사건임을 뜻하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속죄제물로 드리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모든 공의를 만족 시켰고, 따라서 이제 후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로움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칭의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의롭게 되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 부활의 두 번째 유익은 예수님 부활생명의 능력으로 우리가 새생명을 얻게 되었다. 죄로 죽었던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살게 되었다. 죄와는 상관없는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믿는 것이다. 더 이상 육신의 종이 아니고 죄의 종도 아니며, 오로지 성령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새 백성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생명을 얻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따라 사는 하늘 백성 되는 것이다.

롬6:11,13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③ 그리스도 부활의 세 번째 유익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보증이다.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다. 고전15:51-52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몸의 변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결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도 다시 살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사도의 권면을 마음에 잘 새기셔서 부활의 소망 가운데 헛된 세상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의 일에 더욱 힘쓰고 사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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