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공과해설

  • 자니완
  • Mar 22, 2015
  • 1639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롬1:16, 14-8주일오전

서론. 이 시간 성령님이 역사하사,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거듭나고 새힘을 얻는 신령한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오늘 살피는 1:16과 다음 주에 살필 17절 두 절은 로마서의 대주제라 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 전하려 했던 복음의 핵심이 1:16-17에 요약돼 있는 거다. 뿐만 아니라 v.16, 17 두 구절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엑기스와 같은 말씀이다.

로마서 강해 첫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종교개혁자 루터의 인생의 대전환점을 가져온 말씀도 바로 이 두 구절이다.

1.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기에 한 주에 한 절씩 살펴보려 하는데, 우리 성도님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앞뒤 문맥을 짚어 보겠다.

15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 한글 성경에는 v.16, 17에 괄호 안에 있는 (왜냐하면)이 없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있다. 그런데 ‘왜냐하면’을 넣어서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왜냐하면’을 넣어서 v.15-17을 해석하면, 핵심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첫째 바울은 어떻게든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 전하기를 원했고 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유가 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② 둘째 복음은 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 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③ 셋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때문에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뭔가?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 구원에 이르는 거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의’ ‘믿음’ 이 세 단어가 키워드인데, 그 중에 오늘은 16절,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겠다.

2. 오늘 먼저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시는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가? 바울 사도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진리를 알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할 위험성은 사실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 시대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성도가 있다.

그래서 딤후1:8에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한다. 여기 보면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자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있고 하라는 것이 있다. ① 하지 말라는 것이 뭔가? 주 예수를 전하는 일과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한다. 단적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거다. ② 하라는 건 뭔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한다.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이라면 달게 여기란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왜 이런 권면을 했을까? 타고난 성품이 소심했던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과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일을 두려워하고 또 부끄러워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디모데를 너무나 잘 알았던 바울은 디모데를 아끼고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살라고 권면하게 된 것이다.

2) 과거 디모데만 아니라 생각해보면 오늘날에도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우리 성도들이 좀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신앙생활 할 때는 성경 찬송을 옆에 끼고 갔다. 성경 찬송만 딱 들고 교회로 갈 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도 있었지만 더러는 부끄러워하는 분도 있었다. 또 우리 성도들 중에는 회사 동료들과 식사할 때면 부끄러워서 식사 기도를 안 하시는 분들도 더러 계신 것 같다.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담대하게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있는 거다.

우리 성도님들이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핵심은 세상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고 우리 신자는 소수인데, 그 다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고 무시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싫어하고 무시하는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날까 봐 부끄러워하고, 특히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더욱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복음이 뭔지를 붙들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의 이목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 오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바울 시대는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박수 쳐 주고 칭찬해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 시대에도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복음을 싫어하였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우습게 여겼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운운한다고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전1:22-23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 말씀을 잘 보시면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땅 위의 인생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 자랑스럽게 여기고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다. 뭔가? ‘표적과 지혜’라 했다. 표적은 달리 말하면 권세 힘 돈이고 지혜는 명예 학벌 그런 거다. 여러분! 그렇지 않는가? 사람들이 무얼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가? 표적과 지혜에 속한 것들이다. 세상적으로 화려해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무엇에 목매달고 사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다. 성도는 자나 깨나 예수님이 전부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가장 귀히 여기고 산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 어떻다고 하시는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기 거리낀다는 것은 쉽게 말해 미워한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은 무시한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가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십자가 복음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은 왜 무시하고 싫어하는가? 한 마디로 십자가 복음은 세상이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하는 표적과 지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여러분!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세상의 출세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가? 부자가 되도록 약속해 주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는다. 사실 십자가 복음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은 표적과 지혜가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거다.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말라 한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오늘 일시적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 한다. 그러기에 그 영혼이 거듭나서 영원한 것에 눈을 뜨기 이전의 자연인은 절대로 십자가 복음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아서 십자가 복음을 싫어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다수인 세상 사람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하나님은 곧잘 잊어버림으로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직면한 이런 현실과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할까 염려하여 오늘 담대하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한다. 바울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서 아무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거다.

세상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영원한 것에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을 싫어하고 또 무시하지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복음의 영광을 알기에 바울처럼 복음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4)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로 복음을 자랑스러워했는가? 갈6:14 같이 보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러분! 바울이 세상적으로 정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학문 가문의 배경 로마의 시민권 등 자랑할 게 많았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보니 그 모든 세상의 자랑들은 배설물과 같은 것일 뿐이더라는 거다.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스운 일이더라는 거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게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자랑한다면 우스운 일 아닌가? 게다가 십자가의 가치 십자가의 능력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거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하는 것이다.

전 미국의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를 기억하시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는 별로 큰 영향을 못 끼쳤는데, 퇴직 후에 더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두 가지 일이다. 하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여해서 몸소 망치를 들고 전 세계 빈민촌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흔히 선거 때 하는 쇼가 아니다. 정말로 부부가 함께 망치를 들고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산다. 둘째는 대통령 재직 시절이나 퇴직 후나 한결같이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한다. ‘교회학교 교사는 내 평생의 사명이요 소명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직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이 일을 멈추는 것은 곧 내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내 최고의 기쁨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성경을 가르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한다. 그래서 카터는 하나님이 성경을 효율적으로 가르치게 하시려고 나에게 대통령이라는 경력을 더해 주셨다고 고백한다. 여러분! 현재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바울 사도와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의 가치, 복음의 절대 가치를 아는 거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나 카터만의 고백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한다.

3. 오늘 둘째로 생각할 것은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유가 뭔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① 구원을 주시는 ②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한다. 복음은 능력인데 무슨 능력인가? 첫째는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1) 먼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는 능력이다. 못할 일이 없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결단코 실패하지 않는 능력이다.

우리 사람에게도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 든다. 어떻게 이 엄청난 무게가 하늘을 날게 하나 참 대단하다 생각한다. 요즈음 의술은 어떻는가? 예전에는 불가능하다 여겼던 암도 고치고 초기에만 발견하면 치매도 더 이상 진전되지 않도록 막아도 준다. 우리 교회가 한 참 공사 중인데, 공사 과정을 매일 지켜보면서 요즈음 건축 기술과 장비의 능력에 제가 놀란다. 그 외 첨단 산업과 통신 우주산업들도 보면 인간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 생각된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한편 대단한 것 같지만 또 다른 한편 어떻는가? 사실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해마다 몇 건씩 발생하는 비행기 사고 막지 못한다. 지진이 한 번 나면 아무리 잘 지은 집도 무너진다. 요즈음 루게릭병과 에볼라 바이러스가 온 세상의 화제이다. 의학이 엄청 발전한 것 같지만 아직도 루게릭처럼 발병 원인조차 모르는 질병이 수십 가지고 에볼라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앞에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인간의 이 모든 능력은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데 실패했다. 과학 기술이 엄청 발전했지만 악한 인간의 본성이 과거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오히려 갈수록 세상은 사랑이 식어져만 간다. 또 모든 인간의 능력 다 동원해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그야말로 소수무책이다. 죽음 앞에 서면 어떤 지식도 능력도 의술도 기술도 다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 바다 물이 벽처럼 서게 하는 능력이다. 바울이나 오네시모 같이 쓸모없던 인생을 유익한 인생으로 그 본성을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는 실패란 없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힘이 모자라서 구원치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2)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는 실패가 없는 능력이 있으신데, 특별히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능력을 베푸신다.

여러분! 복음이 뭔가? 로마서 강해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다. 복음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늘 영광 버리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별 것 아닌 것 같다. 시시해 보인다. 십자가 그거 믿는다고 어찌 영생을 얻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전도할 때 뭔가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해야 될 것 같고, 또 불치병이 눈 앞에서 치료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이 좀 일어나야 믿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십자가 이거 전해서 구원 받겠나, 새사람 되겠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 시시해 보여도 단순히 십자가의 복음 전하면 하나님 역사해 주셔서 구원하시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 복음 외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복음은 믿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옥한음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집에서 읽은 내용이다. 어떤 예수를 잘 믿는 초등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부모는 신앙에 아예 관심이 없다. 이 아이는 구원의 감격이 너무 벅차서 자기만 구원받을 수 없어 부모님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고, 매일 기도를 드렸다. 또 틈만 나면 아빠 엄마를 졸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교통사고로 이 아이가 죽고 만다. 부모의 슬픔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었다. 아들은 가슴에 묻은 뒤 아들을 그리워하며 유품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아들의 일기장 발견한다. 그 일기장에서 놀라운 내용을 발견한다. 죽기 삼일 전의 기도문이었다. ‘하나님 우리 엄나 아빠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기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아빠의 마음이 충격과 함께 감격에 휩싸인다.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생명과 바꿀 정도로 중요한가 고민하며 씨름하다가, 예수님 믿고 회개한다. 아들의 생명과 자기 구원을 바꾼 셈이 되었다. 이후에 이 아빠가 CCC 대학생 선교회 국제 본부 부총재가 되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전도받아 복음의 큰 일꾼 된 것이다.

결론. 오늘 두 가지 말씀 드렸다. 첫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복음은 실패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 믿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는 능력임을 믿으라. 복음을 믿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라.

나아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내 육신의 생명보다 복음으로 영혼 구원하는 일을 더 귀히 여겨서 복음을 자랑하고 증거하시기를 축원한다.

제목 날짜
구역공과 21-49   2021.12.08
구역공과 21-48   2021.12.02
구역공과 21-47   2021.11.26
구역공과 21-46   2021.11.18
구역공과 21-45   2021.11.10
구역공과 21-44   2021.11.05
구역공과 21-43   2021.10.24
구역공과 21-42   2021.10.22
구역공과 21-41   2021.10.15
구역공과 21-40   2021.10.03
구역공과 21-39   2021.09.26
구역공과 21-38   2021.09.18
구역공과 21-37   2021.09.17
구역공과 20-51   2020.12.18
구역공과 20-47   2020.11.22
구역공과 20-46   2020.11.14
구역공과 20-45   2020.11.08
구역공과 20-44   2020.11.01
구역공과 20-43   2020.10.30
구역공과 20-42   2020.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