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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Jul 03, 2015
  • 1086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롬2:11-16

서론. 오늘도 우리 하늘 아버지가 말씀으로 은혜와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한다.

간혹 병원에서 환자를 오진해서 낭패를 당하거나, 심각한 병이 있는데 모르고 지내다 치료할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일이 있다. 제대로 치료 받으려면 제대로 진단이 돼야 한다.

계속해서 로마서를 살피는데, 1:18-3:20까지는 하나님 떠난 인생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시는 말씀이다. 모든 인생이 철저히 부패하고 죄를 범함으로 가만있으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영적 형편을 지적한다. 우리가 다 죄인임을 깨달아 속히 치료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구원의 길로 가라고 외치는 말씀을 살피는 거다.

1.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는데, 두 단계로 임한다 했다. 첫째는 버려두심이라 했고 둘째는 그 날의 심판이라 했다. 롬1장은 버려두심에 대해, 롬2장은 그 날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다.

지난 주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행위대로’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당을 짓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진노를 받는다 하였다.

이제 오늘 v.11부터 살필 차례인데, 그 전에 지난 주 말씀 v.6-10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릴 것이 있다. 롬2장에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하시고 또 참고 선을 행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셔서 이것이 마치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성도님들이 잘 아시듯이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얻는가? ‘믿음으로’이다. 분명히 성경 전반의 가르침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인데, 왜 롬2장은 마치 행위대로 구원받는 것처럼 말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롬2장에서 ‘행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잘 알아야 구원의 도리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내용이 조금 어렵지만 사실 롬2장은 행위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인간은 아무도 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선한 행위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행위는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할 근거가 된다.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근거이다. 셋째 행위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구원 얻는 방식은 분명히 믿음으로서 인데, 구원 받을 참 믿음을 가지면 그 결과로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로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열매가 나타난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이 땅에서 아직 온전하지는 못하여 때로는 넘어진다. 그러나 거듭난 새생명을 가진 성도는 다시 일어나서 그 삶의 방향과 목적은 선을 행하고 영광과 썩지 아니함을 추구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씀드렸다.

2. 이제 오늘 말씀 v.11-16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차별이 없음을 말씀하신다. 우리 성도님들이 오늘 말씀을 읽으시면 알 듯 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래서 먼저 오늘 말씀의 전체 내용부터 정리해 보겠다.

11절- 하나님은 차별없이 심판하신다.

12절(구체적설명)- 율법을 가진 자든 갖지 못한 자든 차별없이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13-15절(보충설명)- 율법 가진 유대인, 율법 없는 이방인이 차별없이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16절- 하나님이 차별없이 은밀하게 심판하시는 날이 온다.

3. 이처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차별이 없음을 가르치시는 말씀인데, 먼저 v.11부터 같이 보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외모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세상에는 차별이 참 많다. 그래서 공기업 같은데 보면 낙하산 인사니 하면서 말들이 많고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묘하게 군 면제를 받는 사람들도 참 많다. 지역차별 인종차별 성별차별 학벌차별 미모차별 하면서 온갖 차별 때문에 속상하고 억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에 따라 결코 차별하지 않으신다. 귀족이라고 특별히 봐 주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고 괄시하지 않으신다.

1) 구약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특별대우를 하셨다고 느끼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출애굽 역사를 보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허다한 잡족들 곧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아닌 사람들도 같이 나왔다. 아브라함의 혈통 아니어도 믿음으로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도 믿음으로 할례 받지 않으면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했다. 차별이 없었던 거다.

아간과 라합도 비교해 보라. 둘 다 여리고와 깊이 연관된 인물이다. 라합은 하나님 모르는 여리고 성에 태어나고 살아온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굳센 믿음을 가져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았다. 반면에 아간은 아브라함 후손이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불순종함으로 여리고 성 백성처럼 죽임을 당하고 구원에서 멀어졌다. 하나님은 혈통 따라 차별하지 않으셨다.

2) 그래서 고전1:26-28에서 말씀하신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기 보라. 하나님은 세상의 학벌 능력 문벌 재물 신분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으신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다고 하나님 백성으로 불러 주지 않는 분이 아니시다.

물론 역차별도 하시지 않는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구원받을 수 없다 하시지도 않는다. 그래서 ‘많이 아니하며’를 반복하신다. 구원받은 백성들 중에도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도 있는데, 그러나 그런 사람 많지는 않다는 거다. 왜 그렇는가?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고 눈이 멀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 중에도 부자와 많이 배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많지는 않다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 혹 세상의 것을 많이 갖지 못했다고 서운해 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알고 보면 그것이 사실 은혜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추구하기 좋은 조건이다. 그러니 도리어 감사하라. 세상에 대해 가난함으로 하나님께 대해 부요케 하심을 감사하라.

또 우리 중에는 세상의 것도 많은데 믿음생활도 잘 하는 분 계시다. 그런 분 역시 감사하라.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셨는데, 세상의 것 많으면서도 거기 얽매이지 않고 하늘의 것 추구하게 된 것은 정말 특별한 은혜를 받은 거다. 그러니 또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것 많이 가지고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성도가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딤전6:17-19을 보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① 마음을 높이지 말고 ②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③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④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⑥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가운데 세상에서 부요한 사람들 어떻게 살라하시는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신다. 재물을 더 쌓는 데만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신다.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나누어 주기를 힘쓰라 하신다. 그렇게 할 때 장래에 곧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에 좋은 터 곧 하늘의 상급과 영생의 기업을 얻는 길이 된다 하신다.

4. 이처럼 하나님은 신구약을 무론하고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데, 심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 법정은 불공정하거나 아예 잘잘못이 뒤집혀 버리는 일이 많다. 황제노역 그러죠.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그렇지 않다.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도 더 봐 주는 일이 없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오직 ‘행위대로’ 의롭게 심판하신다.

1) v.12-13을 같이 읽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특혜를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해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거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어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들이다. 저들은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가졌기에,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오늘날로 치면 그냥 교회만 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다.

v.13에서 밝히 말씀하듯이 율법을 듣기만 한다고 의로워질 수 있지 않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한다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 아닌 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들은 바 율법에 순종을 해야 의로워진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여러분! 천국 잔치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 기억하시죠? 아무도 의가 없이는 의로우신 하나님 계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율법을 듣기만 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마련되지 못하는 거다. 이것은 마치 밥상을 차려놓고 먹지는 않는 것과 같다. 배가 고픈데 밥상만 차려놓으면 배가 불러지는가? 차려진 밥상의 밥을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율법을 행하지는 않고 듣기만 해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가 없다.

2) 지금 바울이 이 말을 왜 하는가? 로마서 중에서도 사실 2장 3장이 가장 어려운데,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을 무론하고 스스로의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만약 사람 가운데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이 있다면, 누가 가능성이 제일 많겠는가? 그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마저도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음을 단정한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천하 인생 가운데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래서 스스로의 ‘의’로 구원받고자 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v.12이 명확하게 결론짓는다. 다시 한 번 읽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여기 보면 온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어 놓았다. 율법 없이 범죄하여 율법 없이 망하는 사람과, 율법이 있고 범죄하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사람이다. 모든 인생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면 결론은 똑 같다. 구원받는 데 실패하고 심판받아 망할 뿐이다. 왜 그렇는가? 근본이 타락하여 뼛속까지 죄로 물든 인생은 율법이 있으면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율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죄를 짓기 때문이다. 율법이 있으면 이렇게 살면 죄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 죄를 이길 힘이 없어서 죄의 세력 앞에 굴복하고 마는 거다.

3)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의해서 볼 것이 있다. 다시 v.12을 잘 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죄를 지어서 하나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동일한데, 심판의 근거는 차이가 난다. 무슨 차인가? 율법을 가지고 범죄한 유대인은 율법에 근거해서 심판을 받지만,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이방인은 율법 없이 망하게 된다 곧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 정말 공평하다. 이방인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율법을 근거로 심판하면 그건 공평하지를 않지 않는가? 그래서 율법 없는 이방인은 율법에 근거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닌 거다.

5. 그러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무엇에 근거해서 심판을 받는가? v.14-15을 같이 보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무엇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는다 하시는가? 바로 본성에 새겨진 양심의 법이다. 하나님께서 창초에 인류를 하나님 형상대로 지으실 때, 그 영혼 깊은 곳에 양심의 법을 주셨다. 바로 그 본성에 새겨진 양심의 법에 근거해서 이방인은 심판을 받는다.

여기 v.14-15은 사실 어렵기도 하고 생각해야할 것도 많은 말씀인데, 주일 오전에 그것을 다 다룰 수가 없다. 그래서 간단히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렇다.

첫째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새겨놓으신 본성의 법 양심의 법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도덕적인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도 한다. 이 양심의 법이 있기에 세상 나라에도 법도 만들어지고 나름의 윤리도 있는 것이다.

둘째 그 양심의 법이 죄로 인하여 현저하게 왜곡되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는 분명히 온전한 양심의 법을 주셨는데, 우리 인생들이 그 양심을 현저하게 더럽히고 왜곡시켜 버렸다. 단적인 한 예로,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누구나 죄로 여긴다. 그렇죠? 그런데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여기지를 않는다. 하면 좋고 안 하면 본전이라 여긴다. 그런데 이것은 왜곡된 양심이다. 원래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양심을 주셨던 거다.

셋째 인생은 부분적으로 양심의 법을 따르기도 하지만, 양심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일이 더 많다. 양심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것은 양심의 법이 왜곡되어서 죄를 죄인 줄도 모르고 짓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경우는 사실 자기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죄를 짓는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짓듯이, 이방인 역시 양심의 법이 있지만 허다한 죄를 짓는 것이다.

넷째 이렇게 양심의 법이 있지만 죄를 짓기 때문에 이방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도 죄를 지음으로 율법에 근거하여 하나님 심판을 받듯이, 이방인 역시 양심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 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는다. 이 네 가지가 v.14-15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6. 오늘 마지막으로 율법을 가진 유대인과 율법 없는 이방인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v.16을 보자.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여기 v.16도 짧지만 생각할 것은 참 많은 구절이다. 우선 궁극적으로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심판하신다고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다. 그렇다. 우리 주님이 천군천사들을 거느리고 다시 오실 때, 성부 하나님께 모든 권세를 받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심판하시는 권세를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시는 일을 가리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한다. 여기 잘 보라. ‘은밀한 것’이라고 했다. 2주 전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잘 모른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참 관대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추하고 더러운 죄들을 지었는지, 내 마음 속의 생각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제대로 잘 모른다. 그래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심판받을 일이 없다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은 율법에 근거하고 이방인은 양심의 법에 근거해서 심판하시는 날이 오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이방인은 양심의 법을 어기고 또 얼마다 많은 죄를 지었는지 그 감추어졌던 ‘은밀한 죄’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모든 은밀한 죄들을 다 드러내어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결론. 요즈음 어떤 분들은 사람들이 싫어하니 심판에 대한 설교를 하지 말라 한다. 그런데 저는 심판에 대한 설교를 성경에 나온 대로 할 것이다. 환자가 듣기 싫어한다고 의사가 병이 있는데도 없다고 속이고 내버려 둘 수 있는가? 마찬가지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모든 인생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설교해서 알려야 한다. 목적은 뭔가? 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여 참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 앞에서나 양심의 법 앞에서 내가 심판받을 죄인임을 깨닫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내 죄를 회개함으로, 내 스스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영생의 복을 받아 누리는 참 그리스도인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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