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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Sep 29, 2012
  • 8847

1.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성숙한 신앙일수록 자기의 약함을 알고 더 겸손하다. 자기 의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만을 붙들고 자랑하게 된다. 반면에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마치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고 큰 소리로 자랑하고 떠벌리기도 한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이 주는 교훈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 ‘온전히 이룬 자’는 성숙한 신자를 가리킨다. 성숙한 신자는 ‘이렇게 생각하라’고 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앞 단락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곧 육체의 자랑 세상의 자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의 자랑과 의는 오직 예수님의 의 뿐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의는 오직 예수님의 의밖에 없으므로 바울은 자기가 온전히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닮기 위해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다. 내가 뭔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했다하는 공로주의 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은 우리의 자랑과 의는 오직 예수님뿐이기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그 예수님 닮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뭔가 된 사람이 못되고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기에,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고,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2. 이어서 17절 말씀에 보면 바울은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한다.

어떤 바울의 모습을 본 받으라는 것인가?

아직도 자기는 된 줄로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나를 본 받으라’고 하는 의미와 예수님이 ‘나를 본 받으라’고 하신 의미는 조금 다르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예수님 당신의 인격, 당신의 삶, 당신의 전부를 본 받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바울이 ‘나를 본 받으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쓰는 그 모습을 본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11:1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한다. 바울이 은혜를 입은 이후에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어떻게든 예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닮으려고 애를 쓰며 살았는데, 그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이다. 자기를 내려놓는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이 주님을 닮고자하는 삶의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주님 본받는 삶이다. 주님이 당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이 주님을 본받는 삶이다.

3. 18-19절 말씀은 본 받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17절에서는 본 받아야 할 삶, 18-19절은 본 받지 않아야 할 모습이다.

사실 우리가 눈만 뜨면 세상에는 본받지 않아야 할 것들로 가득차다. TV만 틀어도 우리가 본받지 않아야할 세속의 삶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손짓한다. 신문을 봐도, 이웃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도 하나님 없는 세상에는 온통 우리가 본 받지 않아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롬12:1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그랬다.

오늘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무엇을 본 받지 말라고 하는가? 18절 끝에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하신다. 십자가의 원리를 역행하는 삶을 본 받지 말라고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죄인인 줄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원수는 자기 죄를 모르고 자기의를 자랑하게 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십자가의 원수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게 한다. 어떻게든 땅에 속한 일에만 몰두하게 한다. 그래서 ‘저희의 신은 배다 저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다’고 한다. 저희 신이 배라는 말은 돈이 저들의 신이라는 말이다. 돈을 최고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돈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땅만 쳐다보고 살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다. 돈만 쳐다보고 사는 삶이 십자가의 원수이다.

이렇게 땅의 것만 바라고 추구하는 십자가의 원수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바울은 전에도 여러 번 말했지만,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4. 그러면 우리 성도는 왜 땅만 쳐다보고 돈을 신으로 여기고 사는 십자가의 원수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를 20-21절에서 3가지 말씀하신다.

1) 첫째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기에 하늘나라 바라보고 하늘나라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신자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돈을 벌어도 하늘나라를 위해서 돈을 번다. 돈을 신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해서 가치있게 쓰려고 돈을 버는 것이다.

같은 돈을 벌어도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2) 둘째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주 예수님을 기다린다. 머지않아 그리고 반드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것이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 오실 때 세상에 우리 마음에 완전히 빼앗겨 있지 않도록, 땅의 일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살아야 한다.

3) 셋째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은 우리 낮은 몸을 주님 당신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몸은 낮은 몸이다. 연약한 몸이다. 여기 저기 고장도 나고 아프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다. 게다가 이 낮은 몸을 입고 있는 우리의 영혼마저 약하여서 쉽게 낙심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죄의 소욕 앞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 낮은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탄식할 일이 많고 후회스러운 일도 많고 고통스러운 일도 참 많이 겪게 된다.

이런 우리의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든지 엠마오 가던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의 일부를 경험할 때 얼마나 기쁘고 좋았든지, 황홀경에 빠져서 그 영광스러운 주님과 함께라면 여기서 그냥 영원히 지내고 싶다고 고백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영광으로 변화신 주님을 보고 너무 신비롭고 놀라워서 죽은 자 같이 되었었다.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을 덧입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죄에게 유혹을 받지도 않을 것이며 죄의 도구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도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몸이다. 이 땅에서 눈이 어두웠던 사람이 그 날에는 밝히 볼 것이다. 저는 다리로 불편하게 살았던 분도 온전히 걷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온전히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생각으로 우리 마음이 가득차서, 그저 사랑하고 감사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결론.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이다. 십자가를 본받고 주님 닮기를 소원하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힘차게 살아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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