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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r 23, 2014
  • 5013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습니다 고전1:18, 14-2주일오전(87)

서론. 사도행전 강해 다섯 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하는 고백을 살펴보겠다.

1.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 받으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한다. 이 말은 주님은 오직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사실 사복음서가 증거하는 주님의 고난의 내용들을 유심히 살피면, 빌라도도 주님이 고난 받는 일에 동참하지만, 더 완악하고 집요하게 주님을 멸시하고 고난 받게 한 장본인들은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저들의 꾐에 빠진 우매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이 주님의 고난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하는 까닭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최종적인 사형 선고를 내린 자가 바로 빌라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빌라도에게 받은 고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로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을 포함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1) 사실 우리 주님의 생애 전체는 우리를 위한 고난의 삶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이야 세상에 태어난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누구나 생일이 되면 기뻐하고 축하하고 때로는 잔치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부터가 사실은 고난의 시작이셨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누우실 곳이 없어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셔서 그 탄생이 고난이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처럼 존재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이미 2주 전에 살핀대로 주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영원한 영광 가운데 계셨다. 그러니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저 영광스러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 가운데 천사들의 찬양과 받으시면서 계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죽을 우리네 인생을 위해서 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한없이 낮아지신 일이셨던 거다. 요즈음은 그런 비유로 말씀하시는 분을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 같은데, 옛날에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쳤던 것을 기억한다. “참하나님이시오 영광스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이 벌레나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여러분!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벌레나 짐승이 되는 것은 좀 고등한 피조물이 좀 비천한 피조물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아들이 사람 되신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의 하나가 되는 일이셨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은 사실 이 세상에 오신 것 그 자체로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성육신 속에 담긴 고난의 신비를 찬송가 87장은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가? ‘시온성 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주세주’. 빌2:5-7에서도 말씀하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이처럼 하늘 영광을 내려놓고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주님의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는데,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이 땅을 사시는 모든 날 동안 주님은 또한 우리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가스펠송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 하는 찬양에서는 공생애 동안 늘 고난 가운데 사셨던 주님의 삶을 단적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렇다.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고난의 주님이셨다. 배고픔을 배우셨고 슬픔과 고뇌를 아셨다. 때로 울기도 하셨고 탄식도 하셨다. 고향 갈릴 사람들로부터 목수의 아들이 무슨 메시아냐 하면서 모욕과 배척을 당하시기도 하셨다. 심지어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율법의 원래 뜻을 바로 풀어 주실 때, 자기들이 전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 같지 않다고 여러 번 죽이려는 위협을 받으셨고, 거짓 선지자요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라는 온갖 비난과 오해도 당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로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니 오히려 그것을 뒤집어 씌워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런 일을 하는 마귀의 앞잡이요 귀신들린 미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으셨다. 의도적으로 고소할 거리를 찾기 위해 악의에 찬 사람들의 여러 시험도 받으셨고, 때로는 너무도 피곤하여 풍랑 치는 배 속에서 주무시기도 하셨어야 했다.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온 줄 아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그 마음이 심히 민망하다 하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있다 하신 거다. 제자 중의 하나가 당신을 팔 줄을 아시고서도 주님의 마음은 심히 괴롭고 고통스러우셨다.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잡히시던 날에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속마음을 보이시기를 ‘내 마음이 너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가셔서 기도하시기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땀방울이 핏방울 되기까지 그렇게 기도하셨다. 십자가 지시기 전 대제사장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는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서 철저히 부인을 당하시고, 모든 제자들에게 버림까지 받으셨다. 말하자면 창조주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어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신 그 첫날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마지막 날까지 주님의 전 생애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의 이셨다.

성경이 증거하는 우리 주님의 삶의 내용은 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온전히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셨다. 당신을 위해 단 하루도 사시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선한 뜻을 따라 가셨다. 또 하나는 그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온전한 섬김의 삶이셨다. 가난한 자의 소망이 되셨고, 병든 자의 치유자가 되셨다. 무엇보다 죄인들의 구주가 되시고, 저들의 어두운 영혼에 하늘 생명의 빛을 비추셨고, 연약한 인생들을 긍휼이 여겨 주셨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처럼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어가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온 마음과 삶을 다 드리신 주님의 전 생애에 늘 뒤따라 다닌 것은 무지한 인생들로 인한 아픈 마음과 고난과 멸시와 오해였던 것이다.

3) 세상에 오신 일로부터 시작되어 전 생애 동안 계속된 주님의 고난은 이제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속들을 보내 겟세마네 동상에서 주님을 체포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미리 준비한 거짓 증인들을 세워 거짓 증언을 하게 함으로 어떻게든 주님을 죽일 죄목을 확정하려 한다. 일의 시비를 가리는 재판이라는 것은 원래 증거들을 찾고 증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죄의 유무를 가려내는 공의를 세우는 수단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서, 다만 예수님을 죽일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재판을 하였다. 우리 주님이 받으신 심문은 역사상 가장 모순된 재판이었다. 만왕의 왕이요 창조주시며 마지막 날 온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 아무 죄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 참으로 위선되고 가증스러운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들의 손에서 제대로 된 아무런 증거 하나도 없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신 것이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실 때, 사람들은 저 참람한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심지어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면서 온갖 조롱을 다하였다.

그렇게 주님을 치고 모욕한 다음 결박하셔서 짐승처럼 끌고 빌라도에게 넘겨준다. 대세자장이 뜰에서와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재판장에서도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은 이어진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죽을만한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다만 시기로 잡아온 줄을 알았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도 쓴다. 명절에 죄수 중에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해서 극악한 죄수 바라바를 데려 나와서 예수와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 묻기도 한다. 그러나 빌라도의 나름 양심적인 체 하는 알량한 위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 군중의 소리 앞에 빌라도는 그 양심을 팔아먹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하고 마는 것이다.

빌라도의 재판이 끝나고 다음 날 날이 밝아 골고다로 가기까지 주님은 로마 총독의 군병들에게 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멸시를 당하신다. 군병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누더기 자색옷을 입힌다. 자색으로 된 옷은 왕족들이 입는 옷이다. 그래서 누더기 자색 옷을 입힘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모욕하려 한 것이다. 또 가시 면류관을 씌운다.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움으로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신의 면류관 참 멋지십니다. 당신은 멋진 왕입니다’ 하고 또 모독하려 한 것이다. 그것만 아니다. 또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게 한다. 옛날에 왕들은 오른손에 항상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려주면서 또 주님께 말로 형언치 못한 모독을 하였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놀이도 하였던 것이다. 여러분! 이 하나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모독인가? 영광의 하나님을 저 버리지같은 인생들은 그렇게 모독했던 것이다. 주님이 당하실 이 엄청난 멸시와 천대를 미리 보고 옛적에 선지자는 예언하였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또 예언하기를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22:14,16)’ 하였다. 여러분! 주님의 고난과 멸시가 이러함에도, 우리가 주님 당하신 고난과 멸시를 생각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찔림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죄악으로 인하여 돌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고난 앞에 우리 마음은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그것만 아니다. 희롱을 다한 후에 왕의 홀이라고 주었던 갈대를 빼앗아서는 예수님의 머리를 갈대로 내리쳤다. 심지어 그 얼굴에다가 침을 뱉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시는가? 이 군병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갈대로 치면서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뭐라 했겠는가? ‘이 인간아 너가 세상을 구원할 왕이냐 이 인간아’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것만 아니다. 홍포 곧 왕의 의복인 자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도로 입게 한 다음 주님을 채찍질 하였다(막15:15).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가죽 줄에다가 쇠 조각이나 날카로운 뼈 조각을 접착제로 붙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채찍을 잘못 맞으면 살이 다 찢어져서 어떤 사람들은 채찍을 맞다가 창자가 몸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한다. 말하자면 이 채찍은 온 몸을 그야말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채찍인 셈이었다. 주님이 당하실 이 고난의 혹독함도 옛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보고서 또 이렇게 예언하였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 천장에 붙었나이다 ........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22:14,17)’.

4)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죄에 대한 저주와 형벌로 받으신 주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십자가가 남아 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위해 짐승같이 멸시 받고 고난 당하신 후,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우리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려고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친히 지고 피 흘림의 땅 골고다로 가셨다. 거기서 주님은 양손에 못을 박히시고 하늘로 높이 들리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그 현장에서조차 저 버러지 같은 로마 군병들은 한 푼 돈을 더 얻기 위해 예수님 입고 있던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제비를 뽑았다. 하나님 아들이 왜 죽으시는지에 대해 저들은 그야말로 단 한 치의 관심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십자가에서의 주님이 당한 모욕과 고난 역시 사람의 말로는 다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의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주님의 모습을 간단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멸시였음을 역으로 반증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면서 모욕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저들의 말은 참 타당한 말 같으나,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저들의 말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직후에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나에게 절하면 온 천하를 너에게 주겠다’ 하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섬기는 왕 대속의 제물이 되는 왕의 길을 버리고, 온 세상이 환호하며 걸어가는 힘으로 군림하는 왕이 되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마귀는 끝까지 미련하고 무지한 인생들을 통해서 주님을 시험하고 있었다. 무지한 행인들과 합세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주님을 희롱한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러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여기 종교지도자들의 말도 잘 보라. 역시 마귀가 주님을 높은 곳에 세워두고 시험하여 이르기를 ‘띄어 내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너의 발을 붙들어 너가 돌에 부딪혀 죽지 않게 하사, 너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 하였던 시험과 같은 말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갈채 받고 영광 받는 아들의 길을 가라는 미혹의 말이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뿐 아니라 또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지금까지 성육신과 공생애 기간과 재판 받으실 때 당하신 고난과 모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고난과 멸시를 다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받으신다.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고난이 어떠하셨는지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두 마디 호소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목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주님이 누구신가? 창조주시다. 창조주가 목이 마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십자가에서 온 몸에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갈 때,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주님의 입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절규가 되게 하였다. 이런 육신의 고통만 다가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보신 이이 없는 주님이 우리 죄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받고 단절되는 아픔을 겪으신다. 사실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은 삼위일체로 완전히 하나이신 분인데, 그 사이에 단절이 생겼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는 우리 인간은 사실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고통이다. 특별한 신적인 고통이다. 참하나님이신 예수님만 느낄 수 있는 고통이셨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또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참혹한 시험을 주님은 어떻게 감당하시는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다 맡기셨다. 그리고 당신으로 이 십자가를 지게 하신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저 버러진 같은 인생을 보시면서도 주님은 분노하시지 않으셨다. 원수 갚아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님 당신이 죄 없는 몸으로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바로 저 버러지 같은 죄인들 때문임을 하나님께 고하시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보사 저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또 주님은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마지막까지 주님은 오직 이렇게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시면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셨다. 당신을 죽음의 자리에 나아가도록 하신 그 아버지께 당신의 영혼을 부탁하셨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십자가 위에서의 이 마지막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다.

2. 이렇게 주님은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하심으로 십자가가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몇 가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1) 먼저 주님의 십자가는 ‘징계의 길 - 평화의 길’이다. 사53:4-5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다. 주님이 당한 고난과 십자가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우리 허물과 죄로 주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이제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상하고 찢겼던 우리 영혼이 고침 받게 되었다. 십자가는 주님이 워리 대신 징계 받음으로 우리에게는 평화를 가져온 길이었다.

2) 주님 십자가는 두 번째로 ‘미련할 길 - 능력의 길’이다. 오늘 본문 고런1:18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다.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의롭지만 나약한 인간이 세상 권력 앞에 결국 굴복당하고 억울하게 죽고 끝난 미련한 죽음 밖에 아니다. 개죽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하늘의 지혜인 줄을 깨달으면, 십자가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죽었던 우리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다. 어두웠던 우리 영안을 여는 능력이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하는 능력이다. 돌처럼 굳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깨어지게 하고 옥토같이 부드러워져서 감사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다.

3) 주님 십자가는 세 번째로 ‘멸시의 길 - 용서의 길’이다. 살펴본 대로 주님의 전생애와 십자가지심은 주님이 벌레처럼 짐승처럼 멸시받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주님은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들을 용서하셨다. 오늘 우리도 하늘 아버지 법정에서 의인이라 용서함을 받게 하셨다. 요일1:7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은 주님 죽인 우리의 모든 죄악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허물을 용서받게 하는 용서의 길이었다.

4) 마지막 네 번째로 십자가는 ‘주님 가신 실 - 우리도 가야할 길’이다. 주님이 가실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님 위하여 목숨을 버리더라도 따라 가겠다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하시고 후에는 따라 오리라 하셨다. 요13:36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뭔가? 주님이 우리 위해 홀로 십자가를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신 다음에는, 우리도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를 덧입고서 이제 주님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능력은 무능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 가신 섬김의 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길, 온 세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주님이 먼저 홀로 가신 길이면서, 이후에는 우리 모든 성도도 같이 따라가는 거룩한 생명의 길인 것이다.

결론. 우리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도신경 고백처럼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주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인 줄 알고, 날마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십자가를 본받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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