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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Apr 17, 2013
  • 7168

주님의 부활, 성도의 부활 24:1-12, 고전15:35-45, 13-3부활주일

 

 

서론.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의 날이다. 부활, 말만 들어도 가슴 벅차고 힘이 나지 않는가? 우리 주님 부활하셨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그 창시자들의 무덤을 거창하게 만들어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무덤을 갖고 있지 않다. 성지순례를 가면 빈 무덤하나를 만들어놓고 주님 묻혔던 곳이라고 소개한다는데 그건 상술로 만든 것이고, 사실은 주님이 묻혔던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우리는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v.5 보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렇다. 우리 주님 다시 사셨다. 우리 죄와 허물 인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한 의인의 죽음이라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영원히 주님을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 부활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주님 다시 사셨다.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오늘 성령과 말씀 안에서 만나 뵙고 온 마음으로 경배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주님 부활의 날 되시기 바란다.

 

 

1.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더 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건물들이 ‘4이 아예 없고 3층 다음에 5층으로 바로 가기도 하고, 4층 대신에 ‘F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얼마나 죽음을 회피하고 싶으면 아라비아 수 ‘4 자하고 죽을 사 의 발음이 같다고 4층이란 말도 안 쓰겠나?

죽음에 대한 거부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 강한 두려움과 절망적인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를 흔히 만가輓歌 라고 하다. 상여를 메고 갈 때 수레를 끌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다. 지역마다 다양한 만가가 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만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솥 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 위에 삶은 닭이 나래 칠 때 다시 오랴

한 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하노라

여러분! 보라. 얼마나 허무한가? 소망 없는 죽음의 길을 인해 얼마나 서럽고 두려워하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죽음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거나 서러워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승리를 기뻐하는 노래들이 가득하다. 고전15:55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까지 아무도 죽음의 권세를 이긴 자가 없기에 항상 큰소리쳐 온 사망을 향해 외친다.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는 영원히 이김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죽음을 비웃어버린다. 죽음의 권세를 향해 승리를 선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에 권세에 대해 승리를 확신한 믿음의 선배들을 보라. 죽음의 위협 앞에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6-8)’.

베드로 사도는 또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 앎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알게 한 것이 .....(벧후1:14-16)’. 베드로는 육신의 죽음을 장막을 벗어나는 것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그 장막을 벗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실 일을 기억시키고 있다.

성경의 인물들만 그런 게 아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았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랬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오늘 신문에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로 옮겨 간 것뿐입니다그랬다.

초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여사는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어떻게 승리의 노래 기쁨의 노래를 불렀는가? 두 가지 확실한 진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주님의 영광스런 부활이요 둘째는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다.

 

 

2. 오늘 함께 읽은 눅24장을 보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지 사흘 되던 날 새벽에, 평소에 주님을 너무 사랑했던 여자들이 주님 시체에 향품이라도 발라 주고 싶어서 동굴로 된 무덤을 찾아간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저들은 가면서 무덤을 막아 놓은 큰 돌문을 누가 굴려줄 것인가를 걱정하며 갔다.

 

1) 무덤에 도착했을 때 저들을 기다리는 것은 놀라운 광경들뿐이었다. 우선 돌문이 굴려 옮겨져 있다. 남자들도 여럿이 힘을 모아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돌문이 옮겨진 거다.

마태복음을 보면, 대제사장의 간계로 빌라도의 군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키던 군병들이 어떤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서는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

뭔가? 하나님 아들 우리 주 예수님 앞에 아무도 그 무엇도 막아 설 세력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권세도,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자랑하던 로마의 군대도, 나아가 피조물의 하나인 돌문 곧 자연의 힘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방해할 수 없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렇게 돌문은 굴려졌고 지키던 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대화조차 가능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주님을 사랑했던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무덤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저들은 무덤에서 주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 저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 부활하셨구나생각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 시체가 보이지 않음으로 근심했다.

 

2) 그때 문득 찬란한 옷 입은 두 사람이 여자들 곁에 선다. 본능적으로 여자들은 두려움에 얼굴을 땅에 댄다. 두 천사가 말한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여러분! 그렇다. 무덤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죽음의 땅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생명의 나라에 거하신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이 여자들이 주님에 대한 바른 믿음도 가졌더라면, 저들은 주님을 위해 향품을 준비하지 않고 주님께 불러드릴 영광의 찬양을 준비했을 것이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천사들의 말이 계속된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빈 무덤과 주님 입고 계시던 세마포와 지키던 자들이 죽은 것 같이 된 것을 보고도 아직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천사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주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하였다.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면, 주님이 죽으심을 인하여 두려워만 할 일이 아니라, 주님 부활하실 것을 소망 중에 기다림이 맞는 일이라 하였다.

주님 말씀을 잊어버림으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여자들에게 갈릴리에 계실 때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하는 천사의 권면은 이 여자들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인 줄 안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이 주님의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무덤에서 주님을 만나려 했던 여자들처럼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의심하고 살지는 않으신가?

주님 하신 모든 약속의 말씀들을 잊어버림으로 나를 이끄시고 가르치시고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채 영적으로 메마르고 곤고한 모습으로 살지는 않으신가?

이제 천사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다시 듣고 마음에 새기라.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잠든 시간에도 함께 하시고, 어렵고 힘든 일 만나 마음이 괴로워서 주님하고 부르면 주님은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다하신다. 살아계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는 신앙을 이제 청산하고,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라. 생명의 땅, 말씀이 역사하는 심령 속에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함께 하신다. 영원히 함께 하신다.

 

3) 천사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덤을 떠난다. 더 이상 무덤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오늘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요한과 마태의 기록을 보면, 천사의 말을 듣고 무덤을 떠날 때 예수님은 친히 여자들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평안하냐’. 친히 나타나신 주님을 뵈올 때 여자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 구유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의 높고 존귀하심을 알고 경배한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주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했다는 기록이 없다. 주님이 부활하시기까지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배를 받으셔야하는 높고 영화로우신 분이심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실 때 저들은 누구에게 가르침 받지 않았어도, 영광스러운 주님은 모든 인생 모든 피조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엎드려 경배해야할 분이심을 느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경배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거다.

마찬가지다. 오늘 성령님이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의 존귀와 영광을 깨닫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주님 발을 붙들고 경배한 것처럼 온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해 존귀하신 주님을 경배하시기 바란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존귀하심을 알고 경배할 때, 주님이 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무서워하지 말라’. 그렇다. 우리가 진심으로 높고 크신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 때, 부활의 주님 승리하신 주님 모든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은 우리 심령에 담대함을 주신다. 평안을 주신다. 세상이 빼앗지 못할 신령한 하늘의 위로를 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마음에는 거룩한 평화가 임하는 거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붙드신다. ‘무서워하지 말라’.

 

 

3. 이렇게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주님의 부활은 주님 당신만의 부활로 끝나지 않는다. 주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것을 보증하신다.

고전15:20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 주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 했다. 농부가 가을에 첫 열매를 거두면 추수를 마치는가? 아니다. 첫 열매는 계속되는 추수의 기쁨을 기대하게 한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 되셨고, 이제 우리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

고전15:45도 보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조주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죽은 존재 혹은 죽을 존재로 짓지 않았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아담을 산 영곧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 이렇게 아담은 살아있는 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남을 살려줄 수 있는 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당신이 영원히 부활 생명으로 살아계실 뿐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살려주는 영이신 것이다.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영생을 주는 영이시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부활이 있다.

 

 

4. 이렇게 살려주는 영이 되신 예수 안에 다시 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잘 믿지를 못한다. 아니 마음이 완악해서 믿으려 하지를 않는다.

오늘 우리 시대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던 시대도 그랬다. 그래서 오늘 함께 읽은 고전15:35 보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무슨 말인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심하는 질문들을 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질문이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떻게 다시 사느냐는 거다. 죽어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썩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사냐 하는 거다. 또 하나는 정말로 부활한다면 도대체 어떤 몸이냐 하는 거다.

여기 이 두 가지 질문은 부활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는 대표적인 의문들이고, 그 외에도 완고한 인생들은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을 만들어서 주님 부활도, 우리 신자의 부활도 믿을 수 없는 공허한 소리로 만들려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이 완악해서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인데, 그런데도 자기가 믿음 없음을 숨기려고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만드는 거다.

그러면 부활에 대한 대표적인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뭔가?

1) 첫째 질문 어떻게 다시 사는가?’에 대해서는 오늘 v.36-38이 명쾌하게 답을 한다. 시간이 없어 결론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장차 부활의 몸을 주실 거다.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가? 이것을 믿는다면 부활을 왜 못 믿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네 인생도 만드시고 영혼도 만드신 하나님이, 장차 우리 육신이 죽으면 우리 영혼에게 먼저 죽지 않는 생명을 주시고, 이후에 주님 재림하실 때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도 주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부활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단계는 우리 영혼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낙원에 가는 것이요, 둘째 단계는 주님 오실 때 우리가 새롭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떻게 다시 사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하신다.

2) 둘째 질문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에 대해서 v.39-44까지 자세하게 대답한다. 역시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 땅의 몸과는 비교가 안 된다. 짐승의 몸과 사람의 몸이 다르듯이,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지금의 몸과 장차 덧입을 부활의 몸은 그 가치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시는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썩지 않는 몸,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몸, 다시는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몸, 다시는 죄의 유혹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 이 땅의 몸을 주셨던 창조주 하나님이 장차 하늘의 신령한 부활의 몸도 주실 것이다.

 

 

결론. 설교를 준비하면서 서론에서 소개한 장송곡 만가 외에도 여러 만가들을 좀 살펴보았다. 이런 만가도 있다.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어허 어허 어허리 넘차 어허

....................... ........................

못 오시네 못 오시네 한 번 가면 못 오시네

친구 벗님들 많다거늘 어느 친구가 대신 가며

일가친척 많다거늘 어느 일가가 동행할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마는 날 일러주오

......................... .........................

북망산이 웬말인가

인생아차 죽어지면 처량한 게 인생 넋이로구나

세월아 세월아 오고 가지 말지어다

마지막 간다 어허 어허 어허리 넘차 어허

 

여러분! 이것이 소망 없는 인생들의 마지막 노래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고, 주님 부활 안에서 나도 부활할 생명의 소망을 가진 우리 성도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가네 가네 나는 가네 기다리던 천국 가네

먼저 가서 기다리마 천국에서 다시 보자

내 주님 나를 위해 하늘 집 예비하고

나 홀로 가지 않고 주님 손잡고 함께 간다네

복되도다 성도의 죽음이여

오라 오라 속히 오라 주님 오실 그 날 나는 기다리노라

제가 바꾼 가사이다. 괜찮은가? 여러분! 주님 부활하셨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부활할 것이다. 부활의 소망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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