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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y 31, 2014
  • 4849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요일1:8-10, 14-3주일오전(274장)

서론. 오늘도 성삼위 하나님으로 인한 예배의 영광과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사도신경 강해 12번째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는 고백을 살펴보겠다.

1. 어떤 모임이든지 그 모임에 참여할 자격 조건이 있다. 어느 학교 동창회를 열었으면 그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갈 수 없다. 친척모임에는 친척이라야 갈 수 있다.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는 누가 참여하는가? 죄사함을 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계7:13-14이다. ‘..... 이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니라’. 하늘 시온산에 거룩한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묻고서 답하기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다. 한 치의 죄악이나 더러움 부정함도 없으시다. 요일1:5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우리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의롭고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온전하게 죄를 씻음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물러가지, 빛이 비추이는데 어둠도 그대로 있는 법은 없다. 온전한 의의 빛이신 하나님은 해결되지 못한 씻기지 않은 단 하나의 죄도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 온전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은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책망 받을 허물이 없고 형벌 받을 죄악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그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편 기자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허물의 사함을 받은 사함,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씻기고 가려진 사람이 복되다 한다.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 죄인인데, 누구도 스스로의 의로 천국 갈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 허물을 사하고 죄를 가려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신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2. 어떤 사람이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지는 복을 받는가?

누가 그랬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죄인들만 있다고. 세상에는 죄인이 있고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부류의 죄인만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이요 다른 부류는 자기가 죄인인 줄을 모르는 죄인들이다.

우리 성도님들이 성경을 죽 읽어보시면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는 말씀이 아주 많은 것을 보게 되실 거다. 그래서 잘못 생각하면, 성경도 사람을 처음부터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처음부터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롬3:10-12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생 가운데서 처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알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함으로 그 죄가 가려지고 허물이 사함을 받은 사람, 죄사함의 은혜가 감사해서 그 후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갈망하는 사람을 성경은 ‘의인’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죄인이요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루터는 이 진리를 깨닫고 ‘의인이 된 죄인’이라 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데 아직도 죄인인 죄인’과 의인이 된 죄인’이 있을 따름이다.

3. 아직도죄인인 죄인’의 모습이 어떠하는가?

1) 죄사함을 받지 못한 죄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른다는 점이다. 자기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죄의 은총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게 된다.

한 부자 청년을 보라. 어느 날 주님을 찾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 묻는다. 젊은 청년이 그저 ‘세상이 좋다’하고 살지 않고 영생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가? 그래서 주님은 그 청년을 사랑하사 먼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 당신이 선하시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대답에서 주님은 사실 청년에게 두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주님은 청년의 생각대로 사람인데 선한 사람이 아니고, 주님은 선하시되 하나님으로서 선하시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심으로, 인생은 스스로의 선 곧 자기 의를 가지고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 거다.

그리고 이어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하신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선한 이가 없다 하신 다음 왜 계명을 말씀하시는가? 만약 주님의 의도가 계명들을 다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자 하셨다면, 계명을 말하기 전에 ‘너는 의인이니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셨을 거다. 그런데 주님은 먼저 하나님 외에 인간은 아무도 선한 이가 없다고 의인이 없다고 분명히 밝힌 다음에 계명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주님이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의인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법 앞에 서면 모든 인생은 ‘아 내가 죄인이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법대로 살지를 못했구나’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거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주님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명을 듣고서 자신 있게 ‘이것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한다.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지를 제대로 모르고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해서, 칼을 가지고 사람 죽이지 않고 남의 아내를 빼앗은 일 없으니 자기는 계명을 지켰다고 여긴 거다. 청년의 대답을 듣고 주님은 이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도 지킨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려고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하신다. 여기 주님 말씀을 잘 들어보라.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신다. 무슨 뜻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되 ‘모든 이웃을 항상’ 예외 없이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소극적으로 사람 안 죽이고 도둑질 안 하면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다. 여러분! 지난 날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았는가? 오늘 모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항상 이웃을 사랑하며 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은 단 하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우리는 또 모든 이웃을 사랑하며 살지는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은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며 살지 못했다. 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부모님 혹은 일심동체라 하는 배우자라도 온전히 사랑하며 사셨는가? 부모님 생각하면 늘 죄송하지 않는가? 남은 고사하고 가족마저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러니 인생 중에 누가 ‘내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럴 수가 있는가? 사실 우리 인생은 반대로 ‘내가 어려서부터 단 한 가지 계명도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야 정직한 대답이다.

여기 부자 청년처럼 죄사함을 받지 못해서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는 죄인은 자기 죄를 깨닫지를 못한다.

2) 죄사함의 은혜를 몰라 여전히 죄인인 죄인의 두 번째 특징은 죄를 깨닫지 못하기에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면서 죄 가운데 완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만 아니라 사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본질이 뭔지를 모른 채 자기들은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칠 때, 세리들은 와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였고 창기들도 나아와 회개하셨다. 그런데 스스로 의롭게 여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 하면서 저들은 끝까지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고 회개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증거한다. 같이 보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여러분!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의인이라 주장하는 것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자기 양심을 속임이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먹고 마시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인생인데,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척 거룩한 척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거짓 중의 거짓이다. 나는 죄 없는 의인이라 하는 것은 둘째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 마음 중심에 뭐가 있는지 다 꿰뚫어보시고 하나님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셨다. 그런데 나는 죄가 없다 그러면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다 하신 하나님이 거짓말하신 게 된다. 여러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하신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건가? 아니면 ‘나는 죄가 없다’하는 내가 거짓말하는 건가? 온전히 의롭고 우리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시지 않으신다.

3) 자기가 죄인인 줄 몰라서 회개하지 않고 사는 인생의 결국이 어찌되는가? 요8:21이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① 죄 가운데서 죽겠고 ②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여기 두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결국 죄 가운데 죽는다. 죄문제를 해결 못하고 죽는다. 둘째 그렇게 죄 가운데 죽으면 주님이 가신 곳, 온전한 의가 다스리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비추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4. 오늘 크게 두 번째로의인이 된 죄인’의 모습을 살펴보자.

1) 의인이 된 죄인은 무엇보다 자기 죄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다. ‘내가 죄인이구나!’ 아는 사람이다. 피상적으로만 죄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는 고로,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로 인해 아파한다.

복음서를 보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베드로가 주님 명령대로 깊은데서 그물을 내렸다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과 신적 위엄을 깨닫고서 자기를 쳐다볼 때,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를 알고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랬다. 여기 베드로가 자기 죄를 깊이 깨달은 계기가 뭔지를 잘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으면서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발견하였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인격 삶 십자가의 희생 거룩하심에 내 모습을 비추어볼 때 자기 죄가 보이는 거다. 거울을 봐야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나 보이듯이, 거룩하신 예수님 모습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자기 죄를 알 수 있다 그 말이다.

요즈음 인터넷과 매스컴의 영향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살인 강도 성추행 사기 절도 같은 범죄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떻게 작용 하느냐 하면, 언론과 인터넷에 기사가 된 범죄들이 자기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는 언론에 떠들썩한 그런 범죄를 안 저질렀기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 가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실상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의와 영광 위엄과 사랑에 자기를 비출 때, 오늘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모든 것이 다 죄인 줄 알게 되고,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게 된다.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라.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추한지, 얼마나 더러운 생각이 가득한 지, 얼마나 분노하고 미워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사는지 보라. 우리는 죄인이다.

목회자로 살면서 많은 고민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어떻게 우리 성도들이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보게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자기 죄를 보고 죄책감에 눌려 어둡게 살레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① 자기 죄를 보아야 불신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눈을 뜨고 구원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② 또 자기 죄를 지속적으로 볼 줄 알아야 우리 성도들은 교만해져서 남을 전죄하고 비난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다. 도리어 나도 죄인인데 하면서 하나님께는 겸손히 긍휼을 구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부족함은 품어줄 수가 있다. 성령님인 자기 죄를 볼 줄 아는 눈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한다.

2) 의인이 된 죄인은 두 번째로 자기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자기 죄를 아파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 요일1:9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릴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약속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서 봐야 한다. 첫째는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서 평생 죄의 유혹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악을 무엇이 씼겠는가? 누가 씼겠는가? 오늘 함께 부른 274장 찬송에 ‘물 자기고 날 씻든지 불 가지고 태우든지 내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 그랬다. 이 가사는 정말 물로 씻거나 불로 태워서 내 죄가 씻겨진다는 말이 아니다. 물로 씻어도 불로 태워도 씻기지 않는 내 죄인데,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로 우리를 씻으신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노래하는 거다. 그래서 1절 첫 가사에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한다. 주님이 그 보혈로 나를 능히 씻어주시는 줄을 믿기에 주 예수께 비는 것이다.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주 예수님이 능히 씻으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둘째로 여기 요한일서 말씀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랬다. 우리가 우리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고 긍휼을 구할 때 주님은 우리를 씻으신다. 유다처럼 양심의 가책을 받고 절망하여 자결한다고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 가인의 7대손 라멕처럼 자기 죄를 알고서는 더 뻔뻔해져서 오히려 그 죄를 자랑하고 떠벌린다고 죄가 씻어지는 것도 아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으나 스데반을 돌로 친 사람들처럼, 자기 양심을 찔러오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버린다고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 안에서 자기 죄를 진실로 고백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신다. 시103:12이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5. 오늘 마지막으로 죄사함 받은 의인이 된 죄인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1) 의인이 된 죄인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죄는 미워하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사해주신다는 복음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죄사함 받을 길이 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죄짓자 그렇게 살게 하지 않는다. 도리어 죄사함 받은 영혼 속에는 자연스럽게 죄를 심히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그래서 의에 주리게 되고, 혹 약해서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이 심히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의인이 된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심히 미워하게 된다.

2) 의인이 된 죄인은 둘째 감사한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보라. 무엇 때문에 그 비싼 향유를 주님께 다 부어 드렸는가?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자기 죄를 깊이 인식할수록 죄사함의 기쁨도 커지고 그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헌신하는 마음도 커지는 법이다. 의인이 된 죄인의 마음에는 감사와 사랑 헌신이 늘 솟아나게 된다.

3) 의인이 된 죄인은 셋째 성령을 의지함으로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려 한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게 된다. 눅3장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세리들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 군인들은 사람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진정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내 영혼 내 삶 속에 맺혀져 가는 거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사함을 믿는다. 이미 용서받은 죄인으로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므로 죄씻음 받고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가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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