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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Mar 15, 2015
  • 1697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15, 14-8주일오전

서론. 계속해서 로마서를 살피고 있다. 로마서를 살필 때 크게 두 가지 진리가 눈에 뛴다. 하나는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성경이다. 또 하나는 복음에 대한 바울 사도의 반응이다. 복음을 깨달은 자로서 바울이 자기를 누구라고 인식하게 되었는가? 또 어떻게 살려 하는가? 하는 바울의 반응을 볼 수 있다.

복음을 믿어 구원의 은혜를 받은 바울이 자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살려 했는가? 로마서 강해 첫 시간에 살핀 대로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 했다.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노예선언을 했다. 우리가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또 v.1에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모태에서부터 택해 놓았다 구별해 놓았다 그랬다.

복음을 깨달은 이후 바울의 이런 자기 인식은 바울 사도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바울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노예로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는 사람이라는 인식,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사람 가운데 택정함을 받은 줄 알고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자지 인식이 있어야 하는 거다.

1. 이제 오늘 본문 v.14-15을 보면,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또 하나의 자기 인식과 고백을 볼 수 있다. 뭔가? ‘내가 빚진 자다’ 하는 것이다. 복음 때문에 나는 빚을 졌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같이 v.14을 보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가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빚을 졌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갚아야 한다. 빚은 갚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갈수록 사람들의 양심이 없어져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빚을 져도 갚을 생각을 안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빚을 갚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일 뿐인데도, 빚을 갚는 사람은 아주 양심적이고 선한 것처럼 보이고, 빚을 안 갚으면 그게 보통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여러분! 빚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갚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v.14에서 자기는 빚을 졌다고 한 다음, v.15에서는 어떻게든지 그 빚을 갚기 위하여 할 수만 있다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한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최대한 그 복음의 빚을 갚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 v.14-15은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나는 빚진 자다’ 하는 것이고 둘째는할 수 있는 대로 빚을 갚을 것이다’ 하는 것이다.

오늘 빚진 자로서 바울의 자기 고백을 살필 때, 우리 모두도 빚진 자임을 깨달아서 이 복음의 빚을 갚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품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은 누구나 다 빚을 지고 산다.

1) 저는 아주 어릴 때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번은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에 강에서 놀다가, 수영도 못하면서 깊은 곳에 빠져 죽을 뻔 했다. 지금도 그때 저를 건져준 사람이 누군지를 모른다. 누군지 알기만 하면 제가 근사한 데 가서 밥이라도 한 끼 사겠는데, 아직 누군지 몰라서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고 있다.

또 한 번은 제가 더 어릴 때 몸에 악창이 생겨서 거의 죽을 뻔했다. 오늘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보여주지를 못하지만, 그때 생긴 상처 자국이 아직도 제 오른팔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어떻게 살아났는지 저는 다 기억을 못한다. 다만 정말 많이 앓으면서 진통을 겪었었다는 기억만 희미하게 있다.

이렇게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은 저에게 참 소중한 교훈을 주었다. 바로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흔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그런 말을 하는데, 저도 정말 덤으로 사는 인생 은혜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 생명만 빚진 것이 아니라, 또 돌아보면 여러 사람들에게 참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왔다. 대학 시절 그렇게 어렵게 공부할 때, 제가 다니던 초광교회 성도들 몇 분이 뜻을 모아 매달 책값과 용돈을 주셔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해서 목회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가는 교회마다 성도님들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참 목회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성도들의 사랑을 마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은혜와 사랑의 빚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안고 사는 인생인 줄 알고 그저 겸손히 저의 직무를 감당하며 살 뿐이다.

2)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또 가정에서도 서로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산다. 결혼을 하면 남편은 아내와 자식을 위해 밤낮 없이 얼마나 수고하고 땀 흘리고 헌신하는가? 이전에 울산교회에서 섬길 때, 한 여자 구역장님 말씀이 생각난다. 자기는 나이가 들수록 남편이 너무 고맙고 귀하게 느껴진다 하시면서, 누가 자기를 위해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서 통장을 통째로 가져다주겠느냐 그러셨다.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또 아내는 아내대로 해도 해도 표도 나지 않는 집안일 다 하고 자기 자신보다 남편을 더 아끼면서 남편 위해 수고한다. 그러니 부부는 사실 서로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거다.

가정에서 사랑의 빚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부모에게 진 빚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 부모도 자녀에게 지는 빚이 있다. 부모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식만큼 기쁨과 위로를 주는 존재가 있는가? 어렵고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한 것이 자식보다 더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서 생각을 해 보면 가정에서만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은혜 아닌 것, 빚 아닌 것이 사실은 없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닦아 놓을 길을 가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누군가가 만든 옷을 입고 산다. 누군가 수고하여 지은 곡식과 과일 채소를 먹고 산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사랑의 빚이라는 생각, 빚진 자의 심정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성도의 합당한 생각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기장교회 성도님들!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는 이 빚진 자의 심정을 잃지 말고 사시기를 바란다.

3. 이렇게 우리 모두는 다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지고 사는 인생인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또 하나 특별한 빚이 있다. 무슨 빚인가? 바로 ‘복음의 빚’이다. ‘구원의 빚’이다. 바울은 자기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 놀라운 사실을 한편으로는 ‘은혜 위에 은혜’로 알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갚아야할 빚’으로 알았다.

어떤 의미에서 은혜인가? 내 자격 내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해 주셨기에 은혜이다. 구원받기 이전에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나?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다. 초대교회의 성령충만하고 신실한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스데반이 죽을 때도 증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예루살렘 성도들만 핍박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서 저 멀리 북쪽의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여서 기독교의 씨를 말리려고 살기등등하게 갔던 사람이 바울이었다. 그런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바울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은혜로 구원하셨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은 것은 사실 다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같은 복음의 대적자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일을 은혜로 알 뿐 아니라, 동시에 빚진 일로 알았다. 왜 바울은 빚을 졌다고 여겼는가? 행9장을 보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게 된 바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서 안수함으로 다시 눈을 뜨게 하실 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무슨 말인가? 부활하신 주님이 복음의 대적자였던 바울을 부르실 때, 그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그에게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예수님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택하셨다 하셨다. 말하자면 바울의 구원사건은 동시에 바울의 소명 사건이었다. 바울을 사명자로 부르신 사건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같은 대적자가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면서, 동시에 바울의 구원 사건 속에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는 줄을 알고서 빚진 자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빚진 자됨을 잊지 않았고, 동시에 복음의 빚을 갚고 산다고 해서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자기 공로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빚진 자로서 자기 인식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100% 은혜임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로 100% 은혜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이후에 다 복음에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천국의 복음을 제대로 깨달으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될 뿐 아니라 동시에 나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가 종종 우리 모두가 100% 은혜의 사람이요 동시에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비유를 한다. 여러분! 밀가루로 빵을 만들려면 먼저 누룩을 넣어서 반죽을 한다. 그렇게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 가루로 만든 빵을 먹을 때, 여러분 가루의 성분은 먹고 누룩 성분은 다 제거하고 먹을 수 있는가? 없다. 누룩이 가루에 들어가서 부풀게 만들었고 누룩과 가루는 이미 하나가 되었기에, 우리가 빵을 먹으면 가루의 성분과 누룩의 성분을 같이 먹게 된다. 우리의 구원이 마찬가지다. 100% 은혜 속에 복음의 빚이 녹아져 있다. 역으로 말하면 복음의 빚 속에 100% 은혜가 녹아져 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는 신비롭게도 은혜와 빚이 하나가 된다. 그래서 100% 은혜로 구원받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동시에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임도 알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시기 바란다.

4.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음으로 복음의 빚진 자 되었을 뿐 아니라, 사실 우리 한국교회는 서구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도 큰 복음의 빚을 졌다.

120년 전 우리나라가 어떠했는가? 일제 강점기 때 나라는 또 어떠했는가?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조선 땅을 밟고 드렸던 기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정말 그때 우리 민족은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매여 소망 없던 민족 아니었는가? 이런 절망의 땅을 위해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영혼을 바쳐서 복음을 전해 주었고, 또 수많은 학교를 세웠고 병원을 세웠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워 주었다. 어떤 선교사님은 이곳에서 남편을 묻고 자식을 묻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그래도 조선을 잊지 못해 다시 와서 결국 이 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어떤 선교사님들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다가 자기도 결국 전염병에 걸려 죽기도 했고, 어떤 선교사님은 길을 가다 만난 나병환자를 업고 가서 돌본 것이 시발이 되어 애양원 나병환자들의 보금자리를 이루기도 했다. 우리를 위한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만 해도 몇 날 며칠을 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복음에 빚진 인생이요 복음에 빚진 민족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것이다.

5. 오늘 바울은 누구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고 하는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그랬다. 헬라인과 야만인 하는 표현은 사실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오늘날로 치면 이것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하는 말과 같다. 바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러분!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인생이 있는가? 없다. 모든 인생은 다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잘 난 사람이라고 예수님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요 못난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멀리하는 사람도 없다. 세상적으로 잘 났느냐 못 났느냐는 주님께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은 세상적으로 잘 난 사람도 겸손히 주를 의지할 때 받아 주시는 분이시오, 세상적으로 못난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세상적인 그 어떤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생은 다 예수님이 필요하다. 저들이 무지와 완고함 가운데 있어서 저들에게 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지만, 모든 인생은 예수님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할 수 있다면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이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여 하나님의 제단에 드릴 수 있다면 바울 자신은 전제와 같이 부어져도 기뻐할 것이라 했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복음 전하기 위해 감옥에서도 길에서도 배 안에서도 어디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힘썼다. 할 수 있다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복음 전하려 했기에 오늘 v.15에서 고백한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주님이 마지막 때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게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많은 교회의 세속화다. 교회를 다니지만 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세상을 닮는 거다.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거다.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세상의 전에 없었던 핍박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이 없었던 때가 없었지만, 오늘날같이 전 세계적인 핍박이 있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희환하게도 이슬람이 무자비하게 기독교인을 죽여도 언론이 이슬람을 비판하지는 않고 기독교인을 도리어 비판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국내외를 무론하고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이 예언해 놓은 종말의 영적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인 것이다.

지금 제가 왜 이 말씀을 하는가? 우리가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한 사라에게라도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는 희생과 섬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다. 악한 마귀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더 완강하고 완악하게 빚장을 쳐 두었기 때문에, 우리 신자의 섬김과 희생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결론. 여러분! 제가 묻는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줄 믿는가? 예수님 믿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 줄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가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전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다. 은혜로 구원 받았고 은혜로 산다. 아무쪼록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또 예수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알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일에 우리가 마음을 쏟자. 이 일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자.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여주어서 저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예수 복음을 전해서 저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는 대로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는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요 소망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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