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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Jan 18, 2015
  • 2590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줍시다 잠22:6, 29:15, 15-1주일오전

서론. 주 예수를 믿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소원한다.

지난주에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자고 설교하면서, 올해는 꼭 가정예배를 드리자고 말씀을 드렸다. 지난 주중에 온 가족이 가정예배 드리셨는가? 신앙교육은 반복이라고 했다. 첫 가정예배를 드리셨다면 이제 매주일 반복해서 가정예배를 드리라. 반복해서 진실하게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면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사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이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혹 지난주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가정예배를 놓치신 가정도 한 번 못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 이번 주부터 다시 시작하라. 우리 하나님이 부모 세대에 주신 최대의 과업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임을 자각하고, 다시 가정예배를 시작하라. 우리 하나님이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시작하려고 첫걸음을 내딛는 우리 성도들 가정에 정말 은혜를 주실 주셔서 변화의 열매와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가족의 화목과 사랑의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1. 지난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서 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하는 친구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목사들이 전화하면 으레 교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는 올해 가정예배에 집중하려 한다면서, 다니는 교회는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친구 목사님이 잘 했다고 격려해 주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성도들이 다들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새벽기도를 모이지는 못하는데, 대신에 담임목사님이 동영상으로 매일 촬영을 해서 홈페이지에 올려놓는다 한다. 그러면 성도들이 그것을 보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그 교회는 개척한 지 채 10년이 안 된 교회인데, 처음부터 가정을 바로 세우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출발한 교회였다. 그렇게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다보니, 제일 먼저 변화가 온 것은 놀랍게도 아버지들이었다. 자녀교육을 위해 시작한 가정예배인데 먼저 은혜를 받은 것은 부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는 설교 전에 잠시 간증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고등학생 자매가 간증하기를 아버지가 전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이제 진지하게 가정예배에 참여하게 되었고 교회 생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신앙생활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증을 하더란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놀라운 변화 이런 은혜의 역사들이 나타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하였다. 우리가 그 동안 잊어버렸던 가정예배를 통해 먼저는 부모인 우리가 변화고, 그 변화의 은혜가 자녀들에게 흘러가서 정말 우리 기장교회 가정들이 은혜와 사랑과 믿음의 가정들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런 소망 가지고 정말 올해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살아가자.

2. 오늘 잠언에 나오는 두 말씀을 읽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다시 한 번 보자.

1)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제가 무슨 설명을 더할 것이 없는 말씀이다.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땅히 우리 인생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지 아이에게 가르치라 하셨다. 어릴수록 더 좋다. 조엘 비키 목사님의 <언약 자손으로 양육하라>는 책에 보면 ‘부모의 역할은 양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는 말이 있다. 이런 뜻이다. 1살 때는 부모가 1m 거리에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백발백중 부모의 말이 자녀에게 다 새겨지고 심겨진다는 말이다. 5살까지도 5m 거리니까 거의 백발백중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이제 10살이 되면 10m 거리가 된다. 부모의 말이 먹히는 것과 먹히지 않는 것이 반반으로 현저하게 떨어지는 거다. 20살이 되면 20m 거리다. 이제는 과녁을 맞추기가 어려워져 버린다. 그래서 오늘 잠언 말씀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하신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 여러분! 품 안의 자식이라 하지 않는가? 자녀들이 내 품을 벗어나기 전, 부모의 말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때 마땅한 신앙의 교훈들을 자녀에게 가르치시기 바란다.

옛날에는 대부분 다 그러셨듯이 저의 부모님도 많이 배우신 분들이 아니시다. 그래서 특별히 체계적인 가정교육 신앙교육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은데, 어느 봄날 주일인데 이상하게 교회에 가기가 싫고 놀러가고 싶었다. 봄바람이 난 거다. 그래서 주일학교 결석을 하고 놀러 다니다가 저녁에 집에 갔다. 그런데 주일학교 선생님이 한 번도 결석을 안 하다가 결석을 하니 이상해서 저희 어머니께 왜 결석했는지 묻는 바람에 탄로가 나 버렸다. 그 날 얼마나 회초리를 맞았는지, 회초리를 맞으면서 얼마나 주일학교 안 간 것을 후회했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후로는 주일학교를 한 주일도 결석한 일이 없었다.

여러분! 마땅히 행할 길 믿음의 길을 우리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면 늙어서도 떠나지 않는다 했다. 자녀들이 과녁에서 벗어나기 전에 믿음의 도리를 저들 뼛속까지 새겨주라.

이렇게만 말하면 혹 오늘 우리 중에는 마음에 근심이 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미 자녀는 다 커서 내 품을 떠났고, 그런데 미처 그 자녀의 손에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지는 못한 분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답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말씀드린 조엘 비키 목사님의 <언약 자손으로 양육하라>는 책에 또 이런 말이 있다. ‘어린 시절 뿌려졌지만 완전히 시들고 말라버린 것처럼 보이던 씨앗이 부모가 죽은 후에야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된 자녀들에 관한 기적적인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여러분 자녀 중에 이미 장성해 버렸고 믿음의 유산은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그런 부모님들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그 자녀를 위해 기도하라. 필요하면 편지도 쓰시라. 이전보다 더 애정 어린 말로 또 권면도 하라. 부모가 죽은 후에라야 열매를 맺는 일도 많은 것이다. 그러니 죽는 순간까지 내 자녀를 위한 신앙교육과 기도를 멈추지 마시기 바란다. 그렇게 자식의 영혼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애태우는 부모님의 수고를 우리 하나님이 헛되지 않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다.

2) 오늘 두 번째 구절 잠29:15도 보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대개 부모님들이 잘 속는 것이 있다. 우리 아들은 착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딸은 절대 남에게 해코지하거나 거짓말할 애가 아니라는 거다. 자기 자녀는 선하다는 생각을 거의 99% 부모가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부모가 무조건적인 사랑의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기에 하는 생각이고,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잠22:15이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아직 세상에 때를 묻히지는 않아서 어른들보다 순수하고 해맑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아이의 그 순수하고 해맑은 표정과 웃음이 그 아이의 본성까지 선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길러보신 분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실 줄 안다. 자녀를 길러보면 아이의 이중적인 면을 다 보지 않는가? 환하게 웃을 때는 정말 저 아이 속에는 어떤 욕심도 거짓도 교만도 없을 것 같다. 그랬던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고 울어댈 때는 어떻는가? 아무리 부모가 아프고 바빠도 아이는 부모의 사정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뭔가? 세상에 때 묻지 않았어도 아이의 본성은 아담의 부패한 성품을 물려받은 타락한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하신다.

이렇게 아무리 해맑게 웃은 아이라도 그 마음속에는 부패한 본성과 미련한 것으로 얽혀 있기에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하신다. 임의로 행한다는 것이 뭔지 아시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내버려 두면 부모를 욕되게 만드는 쓸모없는 자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찌해야 하는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하고 또 필요하면 회초리도 들라 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를 잘 보라.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 처음 하나님이 깨끗하게 창조하셨던 본성이 더러워져 버렸다. 그렇게 본성이 더러워지고 죄를 범한 뒤에 어떻게 했는가? 스스로 ‘아이구 하나님 제가 잘못했는데 용서해 주시고 살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하나님을 찾아 나왔는가? 아니면 하나님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 얼굴을 피해서 숨어 버렸는가? 물론 숨어 버렸다. 무슨 말인가? 우리 인생의 부패한 본성은 창조주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해서 자꾸만 숨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우리 자녀를 임의대로 내버려 두면 어찌되는가?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자꾸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게 된다. 임의대로 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믿는 부모가 계속해서 우리 자녀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 마음속에 절대로 이제는 무슨 일을 만나도 내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들어가기까지, 부모가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3. 성경을 보면 믿음의 유산이 자녀에게 잘 물려진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1) 지난주일 설교 본문이 딤후1장이었는데, 제가 그 본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못하고 지나갔다. 오늘 다시 한 번 보다. 딤후1:5이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했던 믿음의 아들이자 동역자요 또 후배 목회자가 디모데였다. 그 디모데가 어떻게 믿음으로 세워졌는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그랬다. 외할머니의 신앙을 어머니가 이어 받았고, 어머니의 그 신앙은 또 디모데에게 유산으로 전해진 것이다.

오늘 우리 기장교회에 정말 수만은 로이스와 유니게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박 로이스 김 유니게 정 로이스 이 유니게, 정말 다들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의 가정에서 로이스가 되고 유니게가 되라. 그래서 여러분의 아들딸을 또 여러분의 손자 손녀를 디모데로 길러내라.

2) 제가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경건서적이 몇 권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설교 시간에 말씀도 드린 바 있는 책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부제목이 <실격된 순교자의 수기> 그렇게 돼 있다. ‘실격된 순교자’라는 말은 정말 저자인 안이숙 사모님은 순교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싶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 위해 순교자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보시고 너는 순교자 될 자격 없어 하시면서 자기를 순교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격된 순교자’ 낙제 받은 순교자다. 우리 어르신들은 이미 많이들 이 책 읽으셨고 또 안이숙 사모님 이야기를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이다.

저는 ‘죽으면 죽으리라’를 읽으면서 안이숙 사모님도 참 대단한 믿음의 거장이지만, 그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시다고 느꼈다. 지난 주 소개했던 손양원 목사님 배후에 믿음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이 계셨듯이, 안이숙 사모님 배후에는 유니게 같은 믿음의 어머니가 계셨던 것이다. 책에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이렇게 소개한다. ‘나의 어머님은 내게 너무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그는 성경을 잘 알아서 내가 물어보면 거의 다 풀어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믿음의 힘으로 나를 앞서서 끌어당겨 주었고, 또 뒤로는 사랑으로 밀어 주셨다. 그는 총명하고 인정이 많았다. 그는 사랑하는 딸이 ...........’.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이 다음에 부모였던 우리를 추억할 때 이런 모습으로 우리 모습을 떠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믿음의 힘으로 나를 앞서서 끌어당겨 주었고, 또 뒤로는 사랑으로 밀어 주셨다.’ 앞에서 믿음으로 끌어주셨던 우리 아버지, 뒤에서 사랑으로 밀어주셨던 내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세상 살면서 좀 어려움이 온다고 비관하고 주저 앉지 않을 것이다. 믿음 생활하다가 때로 환난의 바람이 불어도 침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환난의 날을 만나도 믿음의 힘으로 끌어주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일어날 것이요, 인생의 짐이 고달파 힘겨운 날에도 뒤에서 사랑으로 밀어주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시 하늘 아버지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3) 이렇게 믿음의 유산이 자녀에게 잘 물려진 참 복된 일들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대표적으로 누가 그랬는가? 바로 엘리 제사장 집이었다. 대제사장의 집이니까 어느 집보다 신앙교육이 잘 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였다. 엘리는 전혀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지를 않았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정말 몹쓸 짓을 한다는 말을 엘리 제사장이 들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불러 말한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삼상2:24)’. 이 말씀만 보면 엘리도 자녀들을 교육했는데 자녀들이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엘리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보라. ‘너희는 어찌하여 .....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경멸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29-30)’. 엘리가 정말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했다면, 두 아들이 성소에서 행한 악행들은 좋은 말고 타이르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성소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을 강제로 추행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가져온 제물을 강탈해서 빼앗아 먹는 일이 좋은 말로 타이르기만 하고 말 일인가? 무슨 수를 쓰서라도 다시는 못하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엘리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교육만 한 것이다. 그런 엘리의 모습은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다.

이렇게 자녀의 신앙교육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은 엘리 가문은 두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고 자신도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져 죽는 비참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4) 믿음의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 우리 한반도의 역사는 사실 완전히 다른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강돈욱이라는 교육자이자 교회 장로가 있었다. 그에게 강반석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역시 교회를 다니던 청년 김형직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이름을 ‘일성’이라고 지었다. 아버지 성이 ‘김’씨니까 무슨 일성이죠? 바로 ‘김일성’이 되었다. 누구 이야기인 줄 아시겠죠? 외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아버지 어머니 역시 교회를 잘 다닌 성도 였기에, 이 집안에서는 당연히 디모데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을 본받아 디모데가 나왔듯이, 외할아버지 장로님과 어머니 아버지 역시 믿는 부모였기에 그 슬하에 디모데 같은 믿음의 거장이 나와야 하는데,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에 실패하니까 기독교 사상을 버리고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독재자가 나오고 만 것이다. 믿음의 가정에서 신앙교육 그리고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4.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언약 자손으로 양육하라>는 책에 나오는 두 개의 글을 좀 더 소개하려 한다.

1) 첫째 글은 믿음의 부모 밑에 태어났으나 지옥에 가게 된 자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하게 될 말이다. ‘내가 여기서 받는 이 모든 고통은 모두 부모님들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내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죄로부터 멀리하도록 바로 잡아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패와 죄책이 당신들로부터 전가되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벗어나야한다는 어떤 경고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영혼에 대한 당신들의 무관심으로 우리는 계속 죄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죄 때문에 저주 아래 있습니다. 화로다 우리 자녀들이여! 육신적이고 생각이 모자란 부모를 두었구나! 자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그들의 영훤한 비참함의 운명을 막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일에 나태한 부모를 둔 것이 참으로 화로구다!’.

2) 두 번째 글은 우리 부모가 자녀들이 이제 독립해서 부모의 품을 떠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는 내용의 글이다. ‘사랑하는 아들아(딸아), 우리가 네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너희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씨름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완벽한 부모라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단다. 완전무결한 경건의 삶은 아니었지만 거짓 없는 믿음을 우리를 통해 보았을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이 가정의 주인이라는 것을 너의 양심이 증거해 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고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진리와 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 ..... 부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심판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 오른쪽에 서고 너는 그 왼쪽에 서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우리가 같이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란다’.

결론. 여러분! 이제 어떤 부모가 되실 것인가? 이제 여러분의 선택이 남았다. 자녀들의 영혼의 문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구원의 도를 전혀 가르치지 않은 부모였다고 원망듣는 부모가 되실 것인가? 아니면 결과는 우리가 어찌 못한다. 하나님의 손에 결과는 맡기지만, 그래도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경건의 삶의 본을 보이고 저들을 위해 기도했고 저들을 믿음으로 이끌었고 사랑으로 밀어 주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실 것인가?

아무쪼록 가정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우리 자녀를 믿음으로 말씀으로 신앙으로 사랑으로 양육하는 부모 되시기 바라고, 그 첫걸음으로 정말 이번 주에 다시 가정예배를 드리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어떻게든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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