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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Dec 28, 2014
  • 2354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음이라 사9:1-7, 14-12성탄

서론. 기쁨의 성탄이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심령에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복한다. 나아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셔서 섬김의 왕이 되신 예수님 본받아, 우리도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1.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이 땅에 세워졌던 나라는 가진 자 많이 배운 자 힘 있는 사람들이 환영받고 살기 좋은 나라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실상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를 가진 나라였다.

1) 과거만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는 권력이 우선이 되어 경제적 특혜까지 누리게 되고, 자본주의는 돈의 힘으로 권력까지 장악하게 된다. 몇 주 동안 나라 망신이라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어느 항공회사의 땅콩회항 사건은 자본주의 병폐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번 땅콩회황에서 드러난 것 같은 일들이 우리 회사는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기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정도의 차이 모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더 높은 지위와 더 가진 돈의 힘으로 낮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고 심지어 속이고 빼앗는 일은 이 땅에 속한 나라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온 땅이 돌과 잡초로 가득하듯,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억울하여 눈물짓고 한숨 쉬는 일이 가득한 것이 세상 나라 모습이다. 오죽하면 이런 세상 나라를 구약의 묵시록인 다니엘서와 신약의 묵시록인 계시록은 짐승에 비유하겠는가? 오직 약육강식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짐승처럼 사납고 거칠고 힘으로 억누르고 짓밟는 세상 나라를 성경은 포악한 짐승들인 사자 곰 표범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2) 이렇게 짐승의 속성을 가진 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 수 밖에 없는데, 거룩하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이런 세상 나라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저 닥치는 대로 싸우고 물어뜯는 짐승 같은 세상 나라에서 고통 받는 인생들을 구원하셔서, 이 땅에 속한 나라와는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른 한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셨다. 긍휼과 사랑이 밑바탕에 흐르고 그 결과 의와 공평이 그 나라 구속구석까지 충만한 나라를 세우기 원하셨다. 다시는 그 나라의 권세를 악한 세력들과 악한 인생들이 빼앗아가지 못함으로, 그 나라의 평강과 의와 사랑이 영원히 지켜지는 신비한 나라를 세우셔서 고통 받는 인생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사9: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같이 읽자. ‘그 정사와(권세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먼저 붉은 색으로 쓴 말씀을 주목해보라.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굳게 세우시는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한다. 우리 하나님이 한 특별한 나라를 세우시는 거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나라의 특징이 뭔가? 첫째 ‘그 정사의 .... 더함이 무궁하며’ 그랬다. 표현이 조금 어려운데 그 권세가 영원하다는 말이다. 절대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그 나라의 권세는 무너지지를 않는다는 말씀이다. 유사 이래로 이 땅의 모든 세상 나라들도 항상 이것을 꿈꾸었다. 그 권세가 결단코 꺾이지 않는 제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어느 한 나라도 그 권세가 영원한 제국을 세우지 못했다. 전성기 때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제국이라 여겼지만, 결국은 다 무너졌다. 바벨론 제국이 그랬고 로마 제국도 그랬다.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강대국들은 그 나라의 권세가 영원하기를 바라고 몸부림치지만, 이 땅의 나라는 절대 그 권세가 영원하지 못하다. 그 권세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나라는 인생들이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 밖에 없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우시는 이 나라는 둘째 ‘그 .....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하신다. 절대 그 나라의 평화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 나라는 절대로 평강이 깨어지지 않고 세월이 갈수록 도리어 평강이 더해져 가는가?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하신다. 그 나라를 세우시는 만군의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로 보존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평강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 것이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평강이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이기에, 그 나라 안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서 서러워할 일이 없고, 힘이 없어서 억울해 할 일도 없다.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서 갈등하고 다툴 일도 없다. 모든 것이 넘치도록 풍족하여 서로 더 가지려 욕심낼 이유도 없다. 정의와 공의, 사랑과 섬김과 긍휼이 그 나라 권세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그 나라의 평강은 영원하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런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바로도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 땅에 타락한 인생들이 여전히 죄 아래 살면서 만드는 나라는 결코 이런 나라가 될 수 없다. 이 나라는 하늘에 속한 나라요 신령한 나라이다. 그러나 없는 나라가 아니라 실제 있는 나라요, 구속받은 하늘 백성들이 반드시 들어가는 나라다.

이런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하나님은 2000년 전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2. 여기서 이런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잘 생각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는 두 단계로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먼저는 부분적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 온전히 들어갈 때가 온다.

1) 먼저 부분적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면서도 부분적으로 그 나라의 능력과 은혜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눅17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묻기를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였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②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느니라’. 여기 주님의 대답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데,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 했다. 세상 나라 같으면 볼 수가 있다. 로마제국이 세상을 정복할 때 로마 나라가 임하는 것을 온 세상은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육신의 눈으로 보이도록 이 세상에 임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임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하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령에 임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우리 영혼에 임하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도록 우리 심령 속에 먼저 임한다. 우리 영혼 속에 성령으로 또 하나님 말씀으로 먼저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롬14:17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신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도대체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경험한다. 성령이 내 마음에 오셔서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의를 사모하게 하시는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다. 성령님이 내 영혼 속에서 한없는 평강을 누리게 하시는 나라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나라다. 나아가 성령으로 인하여 세상의 속된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한 거룩한 기쁨 곧 희락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이 땅에서 먼저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2)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나라 전부가 아니다. 이 땅에서 우리 영혼이 먼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그야말로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우리 영혼이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온전한 모습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구할 뿐이다.

그러면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떻는가? 계21장을 보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1절) ........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은 다 지나 갔음이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4-5절) ....’. 여러분! 그렇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맛보기만 했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영광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제가 가장 좋아도 하고 많이 하기도 하는 설교가 천국설교인데, 여러분!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 나라에 집착하지 말라. 짐승의 특징을 가진 세상 나라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한 순간 다 멸망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3. 이렇게 그 권세와 평강이 무궁한 나라,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기로는 먼저 부분적으로 경험하다가 장차 주님 오실 때 온전해질 그 나라, 그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구약 성경에 많은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9장이 바로 대표적인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 방금 말씀드린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제 사9장 말씀을 살펴보자.

함께 읽은 사9:1-7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5절 : 평강과 기쁨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6-7절 : 평강의 나라를 어떻게 세우실 것인가에 대한 말씀

1) 먼저 v.1-5이다. 죄악으로 고통 받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v.1a 같이 보자.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v.2도 보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지금까지 인생들이 수많은 사연과 사건과 이유들로 인해 고통 받으며 살았고 어둠속을 헤매며 살았는데, 이제 그 고통이 사라질 날이 온다 하신다.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비추이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v.1b은 고통당하고 어둠 속에 살던 인생들에게 빛이 비추인다는 것이 뭔지 한 예를 든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살던 땅들 중에 스불론 지파 납달리 지파가 살던 해변 길 그리고 요단 동편의 땅들은 애굽과 앗수르와 같은 대제국은 물론이고 주변의 여러 크고 작은 나라들로부터 가장 많이 침략을 받은 땅들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포로로 잡혀간 땅들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민족과 혼혈이 되었다고 멸시를 받던 땅들이다. 바로 그런 고통과 멸시의 땅에 거하는 사람들조차도 전날의 고통과 멸시를 벗어버리고 영광을 얻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이다.

스불론과 납달리 그리고 이방의 갈릴리는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의 대명사와 같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사람취급 받지도 못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빛 소망의 빛 은혜의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가장 비천한 삶을 살던 인생들에게서 전날의 모든 원통함과 애통함이 물러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되, 마치 추수하는 날에 즐거워하듯이 즐거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이 전리품을 나누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거워하듯 그렇게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 한다. 전날에는 가장 비참하고 가장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즐거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런 기쁨에 겨워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2) 고통 받고 멸시 당하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v.5도 같이 보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무슨 말인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과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시는 전쟁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쟁을 위해 만든 군인들의 신 곧 군화와 군인들이 싸울 때 입는 옷 곧 군복을 벗어서 짚을 태우듯이 다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전쟁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적대감과 적의가 사라져야 한다. 마음속에 단 한 사람이라도 적대감이 남아있으면 언제든지 전쟁과 다툼은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남과 북이 휴전선을 그어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오늘 당장은 전쟁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남과 북은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벗어버리지 못했지 때문에,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 그대로 휴전 중이어서 언제든지 전쟁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군화도 군복도 불에 다 태버리지를 못하고 있다.

이처럼 군화와 군복과 칼과 창을 다 불태워 버리려면 마음속의 모든 적대감이 없어져야 가능한 것인데, 그렇다면 인생의 마음에서 어떻게 모든 적대감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이 내 마음속만 잘 들여봐도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우리는 항상 누구에게 인가는 어느 정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산다.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심령이 적대감과 미움을 가득 안고 살고 있다. 그러니 적대감이 다 사라지는 온전한 평강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오늘 성경 말씀은 분명히 마음의 적대감이 온전히 사라져 군화와 군복을 다 태워버릴 그런 평화가 온다고 말씀하신다.

4. 그러면 여러분! 흑암의 고통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보고, 피 묻은 군화와 군복을 벗어 불에 태워버려도 좋은 온전한 평강이 언제 어떻게 임하게 되는가? v.6을 같이 보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흑암이 없어지는 나라, 군화와 군복을 모두 불태워버려도 좋은 온전한 평강의 나라가 한 아기가 태어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한 아들, 이 땅에 태어난 수천 수억의 아들들이 아니라 특별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이 모든 믿기지 않는 은혜의 예언들이 현실이 될 것이라 하시는 거다. 한 마디로 주 예수님을 믿고 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백성들 안에 죄로 인한 고통과 적대감을 인한 싸움과 다툼이 그치게 된다는 말씀이다.

1) 단적으로 스데반을 보라.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형편에 이르렀다. 여느 사람 같으면 어찌 반응해야 하는가? 마음속에 정말 강한 적개심과 분노를 품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향해 이를 갈고 저주를 쏟아 붓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속에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의 얼굴에는 악심이 보이지 않는다. 스데반의 마음은 적개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기에, 스데반은 도리어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저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평강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 속의 적개심이 눈처럼 사라진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오셨다. 이제 여러분 마음의 모든 분노와 적개심을 내어버리고 군복과 군화를 불태워 버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심령을 온전히 주장하기를 축원한다.

2) 하나님이 우리 위해 세상에 보내신 한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따를 때 우리 영혼을 황폐케 하는 적대감이 사라질 뿐 아니라, 우리 심령과 인생을 얽매던 어둠의 고통도 사라진다.

전북 김제에 가면, 처음 복음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남녀를 따로 앉게 하기 위해 ‘ㄱ’(기역 자)로 지었던 교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기역 자 교회이기도 하지만, 초창기 양반과 상놈의 벽을 허문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아름다운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1904년 전주를 본거지로 삼고 활동하던 테이트라는 선교사가 금산에 내려가서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 마침 그 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요 양반이었던 조덕삼 어른의 집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었다. 그 날 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복음과 선교사의 인격에 감화를 입은 조덕삼이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어 놓음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조덕삼의 집에는 남해 출신이자 고아였고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이자익이라는 마부 일을 하는 종이 있었다. 그런데 양반 조덕삼이 지켜보니까 종이지만 이자익이 머리가 너무 영특해서 일하면서도 귀동냥으로 천자문을 다 외워버린다. 그걸 보고 조덕삼은 자기 아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해 주고 신앙생활도 같이 했다. 그러다가 금산교회가 장로 투표를 하게 된다. 묘하게도 주인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이 후보가 되었다. 당연히 주인이자 양반인 조덕삼이 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종인 이자익만 되었다. 순간 교회 분위기가 묘해지고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조덕삼이 일어나 말을 한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 큰일을 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를 뽑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후로 조덕삼이 후원을 다 해서 이자익은 평양에서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고, 조덕삼은 이자익을 이어 금산교회 장로가 되어 또 같은 교회를 섬겼다. 양반이자 주인이던 조덕삼 장로님이 상놈이자 종이었던 이자익 목사님을 그렇게 겸손히 협력하여 잘 섬긴 것이다.

저는 조선말에 있었던 이 기막힌 은혜의 역사를 들으면서 ‘전에 고통 받던 자들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흑암이 없을 것이라’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분! 전에 고통 받고 흑암 아래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대부분 종이요 상놈이던 이자익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르다. 둘 다이다. 이자익은 자기 힘으로 벗을 수 없는 상놈과 종의 멍에로 고통 받았다면, 조덕삼은 양반이요 부자여서 마음이 교만해서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종을 짓밟고 그렇게 사람구실 못하고 살 가능성이 많았던 영적인 멍에 아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본받음으로 이자익은 상놈과 종의 멍에를 벗었고 조덕삼은 양반과 주인의 허세와 교만의 멍에를 벗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기묘자 즉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분, 모사 곧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 영혼 속에 행하시는 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모셨기 때문에 가능해다. 저들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흑암과 교만의 고통을 벗어던진 것이다.

결론. 바로 이런 나라 이런 변화 이런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은 2000년 전에 하나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 전날의 고통이 사라지는 나라, 다시는 마음속에 적개심을 품지 않음으로 전쟁이 없는 나라, 그 밑바탕에 사랑과 긍휼이 흘러서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나라, 그리고 그 평강과 권세가 영원한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나라는 먼저 성령 안에서 오늘 우리가 맛을 보다가, 장차에는 저 신비로운 하늘에서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 주 예수님 세상에 오신 성탄을 맞아, 예수님을 여러분 영혼 중심에 모심으로 온전한 평강과 섬김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 충만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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