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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Feb 12, 2016
  • 585

선물을 기다리는 거룩한 나그네 벧전1:13-21 16-1주일오전

 

서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한다. 오늘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은혜와 평강이 풍성하기를 바란다.

약속한 올해의 요절 같이 외우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오늘로 베드로전서 강해 네 번째 시간이다. ‘선택받은 나그네’ ② ‘찬송하는 나그네’‘구원을 기뻐하는 나그네’에 이어 오늘은 ‘선물을 기다리는 거룩한 나그네’다.

13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같이 보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3절에는 세 가지 동사가 나온다. ① ‘동이라(묶으라)’ ② ‘근신하라’ ③ ‘바라라’. 이 세 동사 중에서도 핵심은 ‘바라라’다. 그래서 13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라라’가 된다.

1) 무엇을 바라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져다주실 은혜’라는 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가 온다는 점이다. 작년 성찬절과 송구영신예배 때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신다. ‘왕의 귀환’이라고 했지 않는가?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아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 반드시 그 왕은 다시 오신다. 둘째로 왕이 오실 때 그냥 오시지 않는다. 무엇인가 가지고 오신다. 무엇을 가지고 오시는가?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 그랬다. 우리의 왕 예수님은 다시 오시되 반드시 은혜를 가지고 오신다. 우리 성경이 ‘은혜’라고 번역 했는데 조금 아쉽다. ‘선물’이라고 번역 했더라면 이해하기도 쉽고 훨씬 피부에 와 닿았을 거다. 여러분! 주님은 저와 여러분 위해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 우리는 주께서 오실 때 가져다주실 선물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누군가 선물을 가져올 줄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신 적 있으신가? 어릴 때 저는 모내기하러 가신 어머니가 저녁에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 기다린 것도 있지만, 어머니가 오실 때 간식(새참)으로 나왔던 사탕을 드시지 않고 저에게 꼭 가져다 주셨기에 더 기다렸다. 요즈음 우리 청년들이나 자녀들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제 어릴 때 시골에서 어머니가 가져다주는 사탕은 정말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녁에 선물을 들고 오는 어머니가 그렇게 좋았다.

여러분! 사탕 하나 가져다주시는 어머니도 그렇게 좋은데, 우리 구주께서 오실 때 저와 여러분 위해 어떤 선물을 가져다주시는가?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이다.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꾸지 못할 선물이다. 구주께서 가져다주실 선물을 계2-3장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①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실과’ ② ‘생명의 면류관’ ③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 ④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⑤ ‘흰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니는 은혜’ ⑥ ‘하나님의 성에 이름이 기록됨’ ⑦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다스림’이라고 한다. 부활의 은혜, 영생의 은혜,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은혜와 권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선물을 온전히 바랄지어다’.

2) 그리스도가 가져다주실 선물을 어떤 자세로 바라고 기다려야 하는가?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표현은 당시 근동 지역의 옷을 보면 이해가 간다. 우리처럼 편리한 바지가 아니라 길고 넓은 치마같이 헐렁한 옷들이다. 그러니 일을 하거나 달릴 때는 끈으로 단단히 묶어야만 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위해 유월절 양을 먹을 때도 허리에 띠를 하고 신발끈도 묶은 채 먹으라 했다. ‘출발’하는 신호 소리만 나면 바로 일어나서 갈 수 있도록 만방의 준비를 하고 먹으라 했다. 마찬가지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언제든지 주님 맞을 만방의 준비를 갖추고 살라는 말씀이다. 주님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제 오너라’ 하면 언제든지 ‘예 하나님! 제가 얼마나 하나님이 저보고 오라고 하실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길 만방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우리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큰 핍박을 겪었다. 갖은 고초와 어려움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옥중 성도나 출옥성도들은 일본이 망하고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핍박이 두려워서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해방이 도리어 부끄러움이 되었다. ‘왕의 귀환’ 우리 주님이 선물을 가져 오시는 그 날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에게 한없는 위로와 영광의 날이 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치와 두려움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그 날이 영광의 날이 되도록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선물을 가져오실 주님을 바라라 하신다.

 

3) 우리 청년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그런 기억이 있으실 거다. 기다릴 때는 너무 길게 느껴져서 시간이 빨리 좀 갔으면 했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긴 시간이 아니었고 도리어 참 짧았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험이다. 저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3년이 그랬다. 중학교까지는 시골에서 살아서 거의 공부를 안 했다. 고등학교는 진주에 나와서 3년 자취를 했는데, 자취하는 3년이 참 지겨웠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3년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그때 3년을 좀 더 긍정적으로 즐기면서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찬가지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리스도가 가져오실 선물을 기다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때로 길게 느껴지고 힘겹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잠시 후면 그 시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님을 기다리며 살던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 시간 주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왜 좀 더 잘 살지 못했는지 아쉽고 후회될 것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님을 위해 촌음을 아껴 충성하며 살라. 우리 구주께서 엄청난 선물을 가져오실 때 후회하지 않도록 충성하라.

 

2. 구체적으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선물을 가져오실 구주를 기다리는 모습이 무엇인가? v.14-15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선물을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태도는 크게 둘이다. ① 첫째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② 둘째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신다.

1) 먼저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 하셨다. 사욕 곧 육신의 욕망대로 살지 말라는 말씀인데 ‘너희 사욕’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사욕이 아니다. 너 자신의 사욕이다. 무슨 말인가? 한 마디로 나의 악한 본성대로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여러분! 우리 본성이 성결하고 의롭는가? 아니면 죄로 물들고 뒤틀리고 일그러져 있는가? 타고난 내 본성이 선한지 아니면 죄로 일그러져있는지 잘 모르겠거든 오늘 내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나난 사람에게 나누어 줘 보라. 그러면 바로 안다. 하나님이 처음 하나님 형상대로 지으실 때 아담과 하와는 그 본성이 온전히 의로웠다. 그래서 저들은 서로 미워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을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타락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인생의 마음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본성이 악해져 버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래서 ‘너희 사욕’ 이라 한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이 너 자신의 타고난 그 악한 본성을 따르지 말라는 거다. ‘내 본성’ 나의 타고난 성격대로 살지 말라는 거다. 가끔 제가 농담 삼아 그런 말 한 것 기억하지 않는가? ‘성질 충만하지 말고 성령 충만하라’고. 여러분! 우리 성도는 자기 성질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하신다. 타고난 대로 사는 사람 아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타고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씀을 배워서 말씀대로 살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다음 ‘나는 원래 태생이 그런 사람이니 너가 이해해라. 그래도 나는 뒤끝은 없다’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 안 된다. 잊지 말라.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 본성대로 살면 영원한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롬8:13 보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 ‘육신대로, 몸의 행실’ 그랬는데, 베드로전서의 ‘너희 사욕’과 같은 뜻이다. 사욕대로 육신대로 살면 어찌된다 하는가?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원한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성도는 본성대로 사는 존재 아님을 명심하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 죽이시기 바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하나님 말씀 잘 배워서 타고난 내 본성과 싸우는 것 그게 신앙이다.

 

2) 둘째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신다.

오늘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세상이 참 악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그런데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은 아니다. 로마 시대의 타락상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폼페이 최후의 날’ 들어 보셨죠? 폼페이는 로마 시대 최고의 휴양도시로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그야말로 음란과 사치와 광적인 쾌락의 도시였는데, 엄청난 화산폭발로 도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화산재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1700년경에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발굴된 모습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조각상이나 그려진 그림을 보면 19금영화를 방불케 한다. 당시 로마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다. 오늘 우리 사회가 전체가 동성연애 문제로 시끄러운데 로마 시대도 이미 동성연애가 아주 흔한 관행처럼 인식되고 있기까지 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오늘 말씀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하신다. 여기서 ‘모든 행실’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행실’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항상’이다. 언제나 늘 거룩해야 한다. 한 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거룩을 좇아야 한다. 다윗 보라.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지은 시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늘 성결하게 살려고 기도하면서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 사울이 죽고 열두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고 나라가 안정되니 그만 영적 긴장이 풀려 버렸다. 결국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연고로 넘어지고 그로 인해 얼마나 큰 아픔과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자는 평안할 때가 더 문제다. 환난의 바람과 맞서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잘 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평안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면서 거룩이 깨어지기 쉬운 법이다. ‘모든 행실’에 거룩하려면 항상 영적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한다. ‘모든 행실’에 거룩하려면 둘째로 모든 영역에서 거룩해야 한다. 말도 거룩하고 행실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거룩해야 하지만 직장에서도 거룩하고 가정에서도 거룩해야 한다. 무엇보다 거룩의 시작은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이다. 마음의 생각이 거룩하면 말과 행실도 거룩해진다. 시19편이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시편 기자는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심지어 마음의 묵상 곧 생각조차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 되기를 원했다. 우리는 반복해서 집안을 청소하며 산다. 더러운 것을 치우고 깨끗하게 한다. 더러워지면 또 치운다. 마찬가지다. 내가 품은 생각이 거룩하도록 날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청소하라. 더러운 마음은 비우고 성결한 마음을 채우라.

설교를 준비 하면서 울산교회 시절 한때 제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제목들이 생각났다. ‘하나님! 제 눈에 하나님의 긍휼히 가득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제 귀에 하나님 마음이 깃들어서 모든 사람을 만나고 들을 때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듣고 대하게 해 주옵소서. 제 영혼 속에는 하나님 영광이 가득하게 하시고, 제 마음에는 하나님의 거룩이 채워지게 하시고, 제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제 입술의 모든 말에 성령의 감화가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게 하시고, 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되 내 마음부터 거룩하기를 바라는 기도 아닌가? 우리 모든 성도들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기를 갈망하고 기도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이어지는 v.16-19은 우리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해야할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신다.

1) v.16 보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요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닮기 원하신다.

사람인 부모는 자식을 보면서 나를 좀 닮았으면 하는 부분도 있고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희환하게 닮았으면 하는 것은 안 닮고 안 닮았으면 하는 것은 닮는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보실 때 닮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닮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온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닮으면 그것은 보기가 좋다. 하나님을 닮지 않으면 보기 흉하고 미워지는 법이다.

창1장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지으신 ...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곧 하나님을 닮도록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을 닮게 지었더니 그 결과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으면 보기가 그렇게 좋은 법이다. 하나님 닮으면 그만큼 선하고 영광스럽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해야할 첫째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백성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닮기 위해 거룩해야 한다.

스펄젼은 우리가 거룩해야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단지 자연적인 사람의 저급한 생활을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왕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만왕의 왕의 후손입니다. 여러분의 혈통을 타락시키지 마십시오. ...중생하여 왕의 후손됨이 여러분을 거룩한 생활로 부르고 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 말처럼 우리는 ‘왕의 혈통’이다. 왕의 혈통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인 줄 알고 거룩하시기 바란다.

 

2) 우리가 거룩해야 할 둘째 이유는 심판하시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v.17 보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아는 게 많은 것 같아도 사실 모르는 게 더 많다. 마지막 최후 심판도 그렇다. 최후 심판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은 있지만 모르는 게 더 많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도 아직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우리 성도가 받을 최후 심판이다. 세상이 최후 심판을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데, 구원받은 우리 성도는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될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아주 단순화시켜서 “성도는 ‘형벌심판’이 아니라 ‘상급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일면 사실이다. 그런데 결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오늘 말씀 다시 잘 보라. ‘...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도에게는 상급 심판이 전부라면 행위대로 심판하니 나그네로 사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겠는가? 상급 심판이 전부라면 앞뒤가 안 맞다. 그래서 상급심판도 있지만, 행위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어떤 국면이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이제 나는 다 되었다고 하고 안일하게 살면 안 되고 나그네로 사는 동안은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

 

3) 우리가 거룩해야 할 셋째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v.18-19이다. ‘너희가 … 대속함을 받은 것은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비싼 값을 치루고 산 고가의 물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왕의 혈통을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것을 대가로 지불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우리 구주의 보배로운 생명의 피를 흘려 구속하셨다.

구주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주고 사셨기에 보배로운 피를 흘려 구속했기에 우리 존재의 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계산이 안 된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모습이 버러지 같고 죄를 즐기며 산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그리스도의 생명을 헛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우리는 구주께서 그 생명의 피를 주고 사신 자들이기에 거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거룩의 길을 가야 한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에 처음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의 구주는 머지않아 다시 오시되 저와 여러분을 위한 놀라운 선물을 가지고 오신다. 그 날 주님을 대면하는 일이 기쁨이요 영광이 되도록 오늘은 ‘사욕’ 곧 타고난 본성대로 살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 날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룩한 자가 되어 의의 세마포 입고 다시 오실 주님 맞이하는 모든 성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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