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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해설

  • 자니완
  • Jan 04, 2013
  • 8790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2-16, 12-12주일오전

서론. 오늘이 어떤 주일인지 다들 아시죠? 2012년 마지막 주일이다.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한 해 한 해가 정말 쏜살처럼 지나간다.

1년에 한 번 마지막 주일을 보낸다는 것이 참 복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마지막 주일에는 올 한 해는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왔나 돌아보게 된다. 또 이렇게 세월 가면 머지않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이를 것이고, 주님 다시 오셔서 역사도 마침표를 찍을 건데, 남은 세월은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마음도 가지게 된다.

시90:12 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다. 모세는 인생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한다. 인생의 날이 얼마나 짧은 지, 남은 세월은 얼마인지, 짧은 인생을 살아간 후에는 어찌되는지 생각하면서 살게 해 달라 한다. 왜 모세는 인생의 날을 계수하며 살려 하는가? 인생의 날을 계수하면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인생의 날이 짧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헛된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다. 짧은 인생 뒤에는 창조주요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줄을 아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죄 짓고 욕심 부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고 잘 살았다고 인정하실 수 있는 삶을 살려 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오늘은 2012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네 인생에게는 마지막 날이 있음을 알고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1. 오늘 말씀 빌3:12-16의 핵심은 16절이다. 같이 보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무슨 말인가? 아직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지 않아서 호흡이 남아 있는 모든 성도는 계속해서 달려가라는 말씀이다. 신앙의 경주를 멈추지 말라는 뜻이다. 마지막 목표 지점, 목표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는 결코 중단하거나 쉬지 말고 달려가야 한다.

사람마다 지금 현재 이른 곳은 다 다르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나 신앙생활한 지 오래된 성도들은 신앙의 경주를 80-90%를 마치고 한 10% 정도 남겨두신 분들이 계실 거다. 반면에 젊은 학생들이나 청년들 혹은 이제 갓 세례 받고 신앙생활 시작한 분들은 겨우 10- 20% 정도 밖에 경주를 못했고, 앞으로 남은 경주가 80-90%이상 될 거다. 저처럼 40대 중반 즈음 되는 사람은 50%정도 경주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10% 경주를 했건 50% 했건 90% 이상을 했건 상관없이, 계속해서 달려가야 한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0% 정도 밖에 안 한 분들은 언제 저 먼 레이스를 달리나 미리 겁먹거나 낙심하지 말고 열정적으로 달려야 한다. 이미 90% 이상 달린 분들도,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 나오는 거북이처럼 한 숨 자고 가도 되겠지 하는 안일한 자세 갖지 말고 계속 달리라 한다. 이렇듯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신앙 경륜의 길고 짧음을 떠나 각자 현재 자기 신앙의 수준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계속 달려야 한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2. 이렇게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계속해서 달려야 하는데, 우리 신앙의 경주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냥 막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달려야 한다.

재작년으로 기억하는데, 일본에서 열린 대학생 마라톤 대회 때 있었던 일이다. 처음부터 줄곧 1등으로 달리던 친구가 이제 골인지점을 불과 몇 킬로 안 남겨두고 있는데, 갑자기 정상 코스를 벗어나서 엉뚱한 데로 막 달려갔다. 관중들이 소리를 쳐서 잠시 후에 정상 코스로 돌아오기는 했는데, 이미 2등과 3등에게 앞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그래서 그 친구는 애석하게도 3등을 했다. 뭔가? 우리가 쉬지 않고 달려가되, 목표를 똑바로 보고 달려야 한다.

신앙의 경주에서 우리의 목표, 푯대가 뭔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거다. 주님을 온전히 닮는 거다. 12절 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기 보면 조금 어려운 말이 나온다.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 붙잡혔다. 왜 붙잡혔는가? 성도들을 하도 핍박하니까, 이제 그런 일 좀 그만하라고 붙잡혔는가? 이런 소극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닮아가는 사람 만드시려고 주님이 바울을 붙잡으셨다. 예수의 형상을 간직한 사람 만드시려고 붙잡으신 거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자기를 붙잡으실 때 가지신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이 푯대는 바울만의 푯대가 아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푯대이다. 롬8:29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미리 택정하여 붙잡으신 이유가 뭐라고 하는가? 그 아들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엡4:13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다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는 것이 믿음생활의 목표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 우리의 언어도 주님 같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향기가 되기까지 우리는 달려가야 한다.

3. 이렇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고 그 형상을 이루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인데, 이 목표를 향해 오늘 바울은 2번이나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12절 끝부분이다.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절 끝부분이다.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 여기 바울이 달려간다고 하는 말에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일이 단숨에 한 순간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이 신앙의 목표가 단숨에 이루어지면 계속해서 달릴 필요가 없을 거다. 우리가 예수 믿어 거듭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해진다면 거듭난 것으로 신앙은 완성이다. 그런데 여러분 거듭나셨죠? 거듭날 때 온전해 지셨는가? 아니다. 거듭남으로 새생명을 얻는 것이지, 온전해 지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특별한 신앙 체험을 하면 온전해진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불을 받아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감격적인 신앙의 체험을 하면 온전해 질 줄 여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방언이 터지고 바울이 삼층천에 오른 것처럼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도, 그것으로 한 계단 오른 것이지 그 영적 체험으로 온전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는 결단코 로또가 없다. 하루아침에 신앙의 거장이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달려가노라’고 한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해지를 갈망하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매일 큐티와 말씀읽기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나처럼 내려주시는 은혜를 새롭게 맛보아야 한다. 매주일 빠짐없이 예배드리고, 받은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이라도 붙들고 순종하려고 애써야 한다. 매일 눈만 뜨면 주님 생각하고, 길을 걷다가도 주님이 내 옆에 계신데 하고 또 주님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봄에 심겨진 씨앗이 시간이 가면서 물을 주고 햇빛을 보고 하면서 싹도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우리 신앙도 꾸준히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순종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라는 거다. 주님 닮기를 갈망하는 소원 가지고 꾸준히 주님 바라보고 살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생각도 언어도 삶도 주님 모습을 닮아가는 거다.

2) 달려간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달려가노라’. 달려가는 것은 가다가 섰다가 하는 게 아니다. 뒤도 한 번 돌아 봤다가 좌우를 한 번 둘러 봤다가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가는 게 아니다.

여기지금 바울이 ‘달려간다’고 고백하는 것은 1세기 로마시대 올림픽 경기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게 모든 성경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우리는 현대 올림픽만 알지만, 로마 시대에 이미 오늘날 100m 달리기나 400m 달리기와 비슷한 경기가 있었다. 경기장은 원형이 아니라 좌우에 관중석이 있고 직선도로로 약 200m 정도 되는 경기장이었다.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이 꽉 차 있는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선수는 어떻게 달음질 하는가? 경기를 마칠 때까지는 오직 목표점만 응시하고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달린다. 달리면서 관중석에 누가 앉아 있나 구경하지 않는다. 오직 골인 지점만 응시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달려가라 한다. 주님을 온전히 닮기 위해 열정을 품으라 한다. 주님처럼 살기 위해 혼신을 다하라 한다. 롬12:11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좀 열심을 한 번 내 보자. 기도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성경을 배우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2013년 새해에는 52주 가운데 한 주 안 빠지고 예배드리겠다 결심을 하고 열심을 내 보자. 선한 일 하는데도 열심을 내고, 교회가 일이 있어 모이자 그러면 또 열심을 내서 모이자. 날씨가 추워서 새벽기도 참여가 조금 주춤해 졌는데, 다시 힘을 내 보자. 일주일에 최소 2일 이상은 새벽기도 한다 각오 하고 다시 한 번 일어나 보라. 그게 뭔가 ‘달려가노라’.

4.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데, 이같은 신앙의 경주에서 우리가 늘 취해야할 자세가 있다. 오늘 크게 2가지만 말씀드린다.

1) 첫째는 자기의 부족함을 늘 인식해야 한다. 다시 12절 보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13절 초두도 보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뭔가? 자기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식이다. 아직 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뭔가 좀 되려면 아직 한참 더 달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다. 결코 자만하지 않는 거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 자기를 나타내려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성도님 정도면 신앙도 인격도 그만하면 참 됐다 싶은 분은 오히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아직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 하신 것을 읽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서전을 쓰지 않습니다. 참회록을 쓸 뿐입니다. 내가 이루었다 하는 것은 자서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자기 삶을 봅니다. 그러면 자신 안에 있는 죄악 모순 텅빈 허무 아직도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딱 맞는 말 아닌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참회록을 쓰지 자서전 쓸 일이 없는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미련해서 뭔가 내가 조금만 잘한 게 있다 싶으면 자기도 모르게 살며시 자만심이 고개를 내민다. 뭔가 주님 위해 헌신하고 선한 일하고 나면 ‘누가 좀 몰라주나, 목사님이 이것 모르시나’ 그런 마음이 찾아온다. ‘이 정도면 나도 꾀 괜찮은 성도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쉽다.

아마 빌립보교회 안에도 그렇게 자만심의 유혹을 받는 성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절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하신다. 무슨 말인가? 진짜 온전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하고 생각해야 되는데, 자기 스스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생각을 잘못하고 있음을 하나님이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이다. 큰 실수를 하게 하시든지 어떤 방법이든지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사시라.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일부러 겸손한 척 하려고 하는 겉치레 말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특별히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윗이 사랑받은 여러 이유가 있겠는데, 그 중에 하나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하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삼하7:18이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로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뭔가?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아무 것도 하나님 위해서 한 것이 없다고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 주셨는가? 결코 자만하지 않은 거다.

주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이기에’ 하는 겸손한 마음을 늘 간직하셔서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시기를 바란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신앙의 경주에서 취할 두 번째 자세는 과거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14절 끝 부분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여기 뒤에 것은 잊어버리라는 말은 과거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씀도 수없이 나온다. 신7:19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신9:7이다.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이처럼 성경은 지금까지 살면서 함께 하시고 도우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 한다. 또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고 실수했던 일들도 잊지 말라 한다. 그래서 살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면 과거에 도우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도우실 줄 믿고 하나님 의지하라 하신다. 또 우리가 과거에 잘못한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같은 실수와 죄를 반복하지 말라 하신다.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 많은데도 오늘 바울은 왜 뒤에 것은 잊어버린다고 하는가? 바울이 뒤에 것은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과거를 의지하지 않겠다는 거다. 과거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거다. 과거에 발목이 붙들려 오늘 멈추어 서지 않겠다는 말이다. 과거를 자랑하면서 오늘은 게으르고 안주하며 살지 않는다 그 말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사실 바울이 뒤의 것을 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 아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은 평생 간증하고 다닐 만하다. 삼층천 체험도 그렇다. 세 번의 선교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고, 얼마나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는가? 이런 과거를 생각하면, 바울은 이제 새로운 사명을 위해 더 달리지 않고도 그저 유명인사로 얼마든지 살아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과거를 우려먹으면서 오늘을 안주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남은 시간은 좀 인정받고 박수 받고 살자 그러지 않았다.

간혹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한 번 힘내서 뭔가 해보자고 하면 ‘과거에 저도 열심히 다 해 보았습니다’ 하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여러분! 과거에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주님 오실 때까지 달려가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행한 일이 마지막 날 칭찬과 상급이 되지 못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있는가? 과거에 받은 은혜로는 과거를 살았고, 오늘은 오늘 받은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이 영적 삶의 원리다.

우리 고신 교단은 사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선배들의 신앙유산이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정신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신앙선배들의 순교정신을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오늘 우리가 순교정신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늘 우리도 선배들의 순교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과거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과거 신앙 전통 위에서 오늘 신앙의 경주를 잘 달리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 선배들의 신앙을 자랑하면서 정작 오늘 우리가 순교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로 인해 안일해진 맥 빠진 신앙 밖에 되지를 않는다.

또 이런 성도도 있을 수 있다. 과거에 교회에서 혹은 구역이나 기관에서 다른 성도에게 상처 받은 일이 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는 드리되, 더 이상 봉사나 교제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살겠다 한다. 이게 뭔가? 과거에 발목이 붙들린 거다. 과거에 상처받은 기억이 있거나 아픔이 있다면, 십자가 사랑과 능력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일어나서 다시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스스로 과거라는 기둥에다가 자기 발목을 묶어놓고 한 발 자국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겠다는 거다.

오늘 뒤에 것은 잊어버리라는 말씀은 이처럼 과거 역사 때문에 발목이 붙잡히지도 말고, 또 과거에 잘한 것 우려먹으면서 안일하지도 말라는 말씀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요셉을 보라. 만약 요셉이 과거에 발목 붙잡힌 사람이었다면 요셉은 애굽에서 화병으로 죽었을 거다. 남도 아닌 피를 나눈 형들이 노예로 팔아버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의 아내가 음욕이 가득해서 유혹하는데,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범죄치 않으려고 도망친다. 그런데 역으로 모함을 당해 옥에 던져진다. 이렇게 연거푸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다. 과거에 매여 원망만 하고 있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미래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애굽에 내려온 형들이 아버지 이름을 내세워 자기들을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할 대 요셉이 뭐라 하는가? 창45:5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미래를 봄으로 과거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갈렙은 어떤가? 열두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더불어 유일하게 믿음으로 보고한 사람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젊은 세대 앞서 본이 되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었다.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이 원칙적으로 다 마치고 도면상으로 열두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할 때, 85세 된 갈렙이 뭐라고 하는가? 수14:12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러분! 85세 된 갈렙이 가나안 기업의 땅을 좀 더 얻어 본들 그것 가지고 무슨 낙을 누리겠는가? 그런데도 왜 85세 된 갈렙은 평지도 아니고 그 험한 산지 땅을 달라고 하는가? 과거에 하나님이 칭찬하신 정탐군으로서의 공적을 우려먹고 살지 않겠다는 거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달려가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다는 말 아닌가?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처럼, 혹은 요셉이나 갈렙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자.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남김없이 완수하기까지 달려가자.

우리의 신앙의 달음질에는 상급이 있다. 14절 끝부분을 보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 하나님은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썩어질 상이 아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영원한 하늘 기업을 주실 것이다.

2012년 마지막 주일이다. 바라기는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욱 힘써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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