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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구절
    고전1:18
    설교일
    2014-02-09
    설교자
    권재완목사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습니다 고전1:18, 14-2주일오전(87)

 

 

서론. 사도행전 강해 다섯 번째다.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하는 고백을 살펴보자.

 

 

1. 사도신경이 밝히 고백하듯 예수님은 우리 위해 고난 받고 죽임 당하셨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참하나님이요 참사람이시며 아무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이시지만,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고백하면서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한다. 복음서를 잘 살펴보면 주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는 일에 더 완악하고 집요했던 사람들은 빌라도라기보다는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무지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이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도록 최종 선고를 내린 빌라도를 언급함으로, 주님이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이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는,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목 박히신 일만 아니라, 전 생애 동안 당하신 고난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1) 사실 주님의 생애 전체가 우리를 위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리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네 인생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자신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시작이었다. 누우실 곳이 없어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서 고난이란 말이 아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지 않았어도, 우리처럼 존재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2주 전에 살핀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로 영원한 영광 가운데 머물 수 있으셨다.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저 영광스런 하늘에서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시며 계실 수 있으셨다. 그러기에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죽을 우리네 인생을 위해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고 한없이 낮아지신 일이셨다. 요즈음은 그런 비유를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 같은데, 옛날에 제가 주일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쳤던 것을 기억한다. “참하나님이시오 영광스런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사람이 벌레나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 우리가 벌레나 짐승이 된다면 좀 고등한 피조물이 비천한 피조물 되는 일이겠지만, 하나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 되는 일이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신 그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었다. 성육신 속에 담긴 고난의 신비를 찬송가 87장은 이렇게 노래한다. ‘시온성 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 오신 예수님 참 내 주세주’.

그러기에 빌2:5-7은 권면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온갖 세상 욕심 다 채우는 것도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비움과 낮아짐의 신앙이다. 주님 마음을 본받아 겸손히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2)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된 주님의 고난은 전 생애 가운데 계속되었다. 복음성가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하는 찬양에 보면 공생애 동안 늘 고난 가운데 사셨던 주님의 삶을 단적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렇다.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셨다. 배고픔을 배우셨고 슬픔과 고뇌를 아셨다. 때로 울기도 하셨고 탄식도 하셨다. 고향 갈릴리 사람들에게 목수의 아들이 무슨 메시아냐고 멸시와 배척도 당하셨다. 천국 복음의 비밀을 밝히 전하실 때 자기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것과 다르다고 거짓 선지자라는 비난도 당하셨다.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실 때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런 일을 하는 마귀의 앞잡이로 오해받기도 하셨다.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온 줄 아시고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그 마음이 창자가 끊어지듯 아파하기도 하셨다.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팔리우는 아픔도 겪으셨다. 십자가의 고통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그 마음의 고뇌와 갈등을 인하여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기도 하셨다. 십자가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 밤에는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서 철저히 부인 당하시고, 모든 제자들에게 버림 받으셨다. 말하자면 세상에 오신 첫날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신 마지막 날까지 주님의 전 생애는 고난 그 자체였다.

왜 주님이 전 생애 동안 고난을 받으셨는가? 벧전2:20-21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먼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은 우리도 죄악 많은 세상에서 비록 고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을 행하는 백성 만드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수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많은 오해가 난무한 시대 같다. 그래서 예수님 덕분에 세상에서 형통하고 소원성취하고 잘 사는 인생 되는 줄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길은 좁은 길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로운 길을 가셨듯이, 예수님 믿는 길은 세상 풍조를 거슬러 고난 중에도 의로운 길을 가는 거다.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 좁은 길을 가는 것이다.

 

3)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고 전 생애에 계속된 주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와 빌라도의 재판장에 짐승처럼 끌려 다니며 영광스러운 주님은 그야말로 말로는 다 표현 못할 멸시와 고난, 그리고 역사상 가장 불의하고 모순된 재판을 받으신다.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을 수 없던 대제사장은 주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말씀하심을 듣고, 이렇게 신성 모독하는 자에게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며 군중을 선동한다. 이에 저 무지한 무리들은 사형에 해당하다고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께 달려든다.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며 온갖 조롱을 퍼 부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하며 소리치는 군중이 두려워서 그 양심을 팔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다.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형이 확정된 예수님을 로마의 군병들은 다음 날 날이 밝기까지 그야말로 짐승처럼 가지고 놀았다.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왕복의 상징인 누더기 자색 옷을 입혔다. 또 왕관을 대신해서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 또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홀을 대신해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셨다. 그리고는 왕에게 경배하는 흉내를 내어 예수님 앞에 절을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마음껏 비웃었다. 여러분! 이 하나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모독인가? 온전히 거룩하시고 창조의 근원이 되신 그 영광의 주님을 저 버리지 같은 인생들은 그렇게 모독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하신 선지자의 예언처럼, 주님은 그야말로 벌레처럼 그렇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신 것이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이 실상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는 그야말로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마땅한 줄 안다. 영광의 주님을 이토록 고난 받게 한 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다시 죄의 유혹 앞에 설 때 주님을 생각하고 돌아서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셨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멸시받은 자색 옷) 나 만져 봤도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고난의 주님 바라보며, 죄에서 돌아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4) 이것으로 주님의 고난은 끝이 아니다. 십자가가 남아 있다. 벌레처럼 멸시 받고 고난 당하신 후,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 속죄의 제물이 되시려고 당신이 달릴 십자가를 친히 지고 골고다로 가셨다. 거기서 양손에 못 박히시고 하늘로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당한 고난의 깊이도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의 깊이는 더 말할 게 없다. 역사상 인간이 만든 사형제도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십자가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의 고통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못에 온 몸의 무게를 의지한 채 몸이 아래로 쳐져 내릴 때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게다가 몸 안의 물과 피가 다 쏟아진 상태에서 그 뜨거운 사막 가운데 높이 세워졌을 때, 내리쬐는 햇볕으로 인한 두통은 차라리 빨리 죽여주기를 간절히 애원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이런 육체적인 고통이 전부가 아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함께 못 박힌 강도도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도 입을 모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스스로 구원하고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노라며 하나님의 아들되신 주님의 신분을 멸시하였다.

우리로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님 아들이신 주님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목마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주님이 누구신가? 창조주시다. 창조주가 목이 마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십자가에서 온 몸에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갈 때,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주님의 입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절규가 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돼 보신 일이 없는 주님이 아버지께 버림받고 단절되는 아픔을 겪으셨다. 사실 성부 하나님과 예수님은 삼위일체로 완전히 하나이신 분인데, 그 사이에 단절이 생겼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는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가 없는 고통이다. 특별한 신적인 고통이다. 참하나님이신 예수님만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사실 죄를 먹고 마시며 사는 우리조차도 한 번 은혜를 맛 본 뒤에는 우리 마음에 은혜가 메마르게 될 때 얼마나 영적으로 괴롭고 고통스럽는가? 그렇다면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영광과 풍성한 은혜에서 멀어지거나 메마름이 없었던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은 어떤 것이겠는가? 우리는 도저히 짐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주님은 어떻게 감당하셨는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했다. 오직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셨다. 이 십자가를 지게 하신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먼저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버러진 같은 인생을 향해 분노하지 않으셨다. 원수 갚아 달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신이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바로 저 무지하고 완악한 죄인들 때문임을 하나님께 고하시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보사 저들을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신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마지막까지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시면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신 거다. 당신을 죽음의 자리에 나아가도록 하신 그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당신의 영혼을 부탁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 모진 십자가의 고통과 멸시 가운데서도 원수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는 이 땅의 남은 생애를 어찌 살아야 하겠는가? 벧전3:8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그렇다. 주님 지신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도 갚지 않으며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비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삶으로 인도한다. 십자가 능력으로 원수를 위해 복을 비는 하나님 백성이 되라. 그렇게 사는 것이 제사장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죽도록 인도하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자신의 영혼과 전부를 의탁하고 죽으셨다. 그렇다. 우리도 바로 이렇게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하늘 아버지가 우리 인생을 평탄하고 좋은 길로 인도할 때도 신뢰하지만, 주님처럼 십자가 지는 고난으로 인도할 때도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우리 영혼과 인생을 맡겨야 한다. 괴로운 날이나 즐거운 날이나 하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는 굳센 믿음 위에 서시기를 축원한다. 특별히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하고 견고한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이렇게 주님은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하심으로 십자가가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몇 가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1) 첫째 주님의 십자가는 징계의 길 - 평화의 길이다. 53:4-5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다. 주님이 당한 고난과 십자가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이제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상하고 찢겼던 우리 영혼이 고침 받게 되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대신 징계 받음으로 우리에게는 참 평화와 영혼의 안식을 가져왔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영혼의 평화를 누리라. 나아가 십자가 붙들고 가는 곳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십자가는 징계의 길 - 평화의 길이다.

 

2) 십자가는 두 번째로 미련할 길 - 능력의 길이다. 본문 고전1:18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한 의롭지만 나약한 인간이 세상 권력 앞에 결국 굴복당하고 억울하게 죽고 끝난 미련한 죽음일 뿐이다. 개죽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하늘의 지혜인 줄을 깨달으면, 십자가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죽었던 우리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다. 어두웠던 우리 영안을 여는 능력이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하는 능력이다. 돌처럼 굳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깨어지게 하고 옥토같이 부서져서 감사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다.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내 영혼의 두려움과 어둠을 몰아내는 능력이다. 내 힘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도 용서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능력이다.

 

3) 주님 십자가는 세 번째로 멸시의 길 - 용서의 길이다. 살펴본 대로 주님의 전 생애와 십자가지심은 주님이 벌레처럼 짐승처럼 멸시받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주님은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들을 용서하셨다. 오늘 우리도 하늘 아버지의 하늘 법정에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게 하신다. 요일1:7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은 주님 죽인 우리의 모든 죄악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허물을 용서받게 하는 용서의 길이었다. 십자가는 죄로 죽을 인생에게 유일한 사죄의 길 생명의 길이다.

 

4) 마지막 네 번째로 십자가는 주님 가신 실 - 우리도 가야할 길이다. 주님이 가실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주님 위하여 목숨을 버리더라도 따라 가겠다 한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하시고 후에는 따라 오리라 하셨다. 13:36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뭔가? 주님이 우리 위해서 먼저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신 다음에는, 우리도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를 덧입고 주님 가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주님이 이미 담당하신 십자가는 무능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 가신 섬김의 길,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길, 온 세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한다. 십자가는 주님이 먼저 홀로 가신 길이면서, 이후에는 우리 모든 성도도 따라가야 하는 거룩한 길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느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려 하려 함이라한다. 주님은 십자가로 죄를 그치셨고, 우리는 이제 주님 가신 그 십자가를 따라 감으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말씀이다.

 

 

결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주님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 나를 대신하는 십자가인 줄 알고, 날마다 십자가를 사랑하라. 십자가를 자랑하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본받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